- ▲ 선암사 승선교와 강선루. 우리나라에서 가장 아름답다는 돌다리다.
올 봄은 유난히 견제 세력이 많습니다. 힘들게 안착해서도 꽃샘추위로 혼나는 게 안쓰럽고, 그래서 더 포근히 반기며 안아주고 싶어집니다. 그러느라 요즘은 주말 이틀을 다 봄맞이 나들이로 보내고 있지요.
지난 주말 토요일은 전남 순천 조계산 자락 굴목재를 타고 왔고요, 일요일은 다다음날이 한식이라 부산 김해에 있는 부모님 산소로 성묘하러 가 오전에 끝내고 양산 천성산 자락으로 옮겨 노전암 계곡 주변 봄을 즐겼습니다.
천성산은 고교 시절 대입 공부한다고(실은 공부 잘하는 친구 따라) 내원사 부속 암자인 익성암과 금봉암에서 겨울과 여름방학 각각 한 달씩 머물렀던 적이 있어 제겐 모든 산봉우리와 골짜기가 낯익고 사연과 추억이 아주 많은 곳이기도 하죠.
- ▲ 30년 전 법정스님과.
우리나라 3대 사찰이자 선종 불교의 요람인 송광사는 16명의 국사 등 유명한 스님을 많이 배출해 육당의 말처럼 ‘둘러볼수록 큰 절, 옛 절, 갸륵한 절’이라 할 수 있죠. 또 최근 입적하신 법정스님이 1975년부터 17년간 머물렀던 부속암자 불일암과의 인연으로 이 절에서 스님의 다비식을 거행, 전국에 더 잘 알려졌지요.
옛날엔 송광사보다 큰 도량이었다고도 하는 선암사는 지금은 이런저런 이유로 사세가 많이 기울어 무척 어렵답니다. 하지만 이런 이유가 오히려 이 절을 더욱 소박하고 고졸한 옛 모습 그대로 남게 해 저는 개인적으로 새롭고 크고 보물 많은 송광사보다 다소곳이 예스러운 이 선암사를 더 좋아합니다. 또 무엇보다 꽃을 좋아하는 제게 봄이면 호남
5매로 일컫는 무우전 매화가 피어 더 반갑지요.
이해인 수녀님이 보낸 뜻밖의 선물
- ▲ (위)선암사 천도제 광경. 옛날에는 3일간 지냈으나 요즘은 약식으로 하루만에 끝낸다. (아래)선암사 원통전 붉은 목단 문양의 창살. 선암사를 ‘사시사철 꽃이 피는 절’이라 부르게 하는 그 창살이다.
사실 올해는 선암사를 찾을 계획은 없었습니다. 그런데 지난 금요일 제게 우편물이 하나 왔습니다. 책이라서 또 어느 출판사에서 홍보해 달라고 보냈나 하고 뜯어보았는데, 아~ 이거 발신인이 누굽니까! 이해인 수녀님이 아닌가요! 수녀님.
작년부터 수녀님이 항암 치료 받은 뒤 정양 중이시란 얘길 들었습니다. 사실 우리 세대는 그간 살아오면서 수녀님 시 신세 한 번 안 진 사람 없는데, 우린 그 소식 듣기만 하고 아무것도 해 드리지 못하는 게 너무 안타까워 용기를 냈지요. 제 들꽃 캘린더라도 한 권 보내 드려야겠다고요. 주소를 수소문해서 제 뜻을 담은 메모와 함께 캘린더를 보내 드린 게 올 초였고, 그리고 저는 그만 까마득히 잊고 먹고 있었거든요.
그런데 지난 2월 24일 오후 제 다음 e메일을 검색하고 있는데 ‘이해인’이란 발신자 이름과 함께 ‘이해인 수녀입니다’란 제목의 메일이 들어와 깜짝 놀랐지요.
“봄이 일어서니 / 내 마음도 / 기쁘게 일어서야지 / 나도 어서 / 희망이 되어야지 / 누군가에게 다가 가 / 봄이 되려면 / 내가 먼저 / 봄이 되어야지 / 그렇구나 / 그렇구나 / 마음에 흐르는 / 시냇물 소리.”
‘봄 일기’란 이 자작시 한 편과 함께 제가 보내드린 캘린더를 보시고 “들꽃 사진에서 향기가 나는 것 같다”면서“1집 여분이 있으면 보고 싶다”고 하시길래 기쁜 마음으로 챙겨 보내드렸지요.
그리곤 또 잊어버리고 있었는데, 이날 우편물로 시집 한 권을 보내주신 겁니다. <꽃은 흩어지고 그리움은 모이고>라는 2005년도 인쇄본인데 제목 아래 특별히 ‘이해인 꽃시집’이란 부제가 붙어 있습니다. 펼쳐보니 앞면에다 수녀님이 직접 그리신 듯한 꽃 그림과 금박 모자이크까지 한 친필 사인과 함께 또 한 장 간단한 인사말과 그림을 그려 넣은 시 엽서까지 들어 있는 게 아닙니까! 까까머리 중학생 때 예쁜 여자 국어선생님으로부터 시집을 한 권 선물 받은 것처럼 가슴이 콩닥콩닥, 얼굴도 발그스레…. 아마 제 마음은 더 붉은 홍당무였을 겁니다.
수녀님께서 꽃을 이렇게까지 좋아하시는 줄은 몰랐지요. 보낸 시집은 그야말로 꽃시집으로 수녀님이 주변에서 흔히 접하는 모든 꽃에 대한 그때의 느낌들을 각각 한 편씩 담아냈는데, 읽을수록 공감에 제가 모르는 꽃 얘기까지 소복합니다.
그 중 ‘달맞이꽃’이란 시 해설 “솨아솨아… 소리내며 달맞이꽃이 피는 모습을 스님과 함께 지켜보던 송광사 불일암의 달밤이 잊혀지지 않습니다…(후략)”란 부분을 읽자 그만 제게 필이 “딱!” 하고 꽂혀버렸습니다. 아아~, 불일암! 그리고 법정스님…. 수녀님과 스님의 문인적 교류는 알려진 대로 우리도 잘 알고 있지요. 한데 법정스님은 제게도 사연이 있다고 지지난 메일에 얼핏 말씀을 드렸지요. 그래서 스님 돌아가셨을 때 길상사로, 송광사로 달려가고 싶었지만 여건이 못돼서, 게을러서 못 갔다며, 그리고 그 핑계를 ‘스님이 그러는 걸 원하지 않으셨을 것’이라고도 대고, 대신 TV 화면으로만 보고 나도 몰래 눈물만 많이 흘렸다고요.
하지만 수녀님의 시 해설을 읽는 순간 갑자기 그 불임암이 보고 싶어지는 거 있죠. 그 많은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은 스님이시지만 지금은 안 계신, 다비식도 다 끝나고 수습된 뒤 적막만이 남아 있을 그 빈 암자가요.
- ▲ 선암사 백매. 수령이 600여 년으로 이곳 무우전 홍매와 함께 호남 5매에 드는 명매다.
30년 전 법정스님과의 인연 돌이키면 무슨 연기설화 같아
제가 만드는 우리 회사 일요 기내신문 <스카이뉴스> 78호(2003년 5월 16일자) 맨 뒷면 ‘추억의 여행 사진’이란 제 칼럼에 스님과의 인연에 대해 이런 글과 사진을 실은 적이 있지요.
최근 모 텔레비전이 주말 스페셜 프로그램을 통해 ‘법정스님, 산중에서 그를 만나다’를 방영, 스님을 존경하는 사람들은 물론 많은 시청자에게 신선한 감동을 주었다. 이 프로그램은 스님께서 1993년부터 강원도의 깊은 산골에 혼자 은거하시기 전 계셨고, 지금도 하안거나 동안거 후 잠깐씩 찾으시는 전남 순천시 조계산 송광사 불일암에서 찍은 것으로 최근 3년여의 스님 모습을 담은 것이었다. ‘법정스님’과 ‘불일암’이라고 하면 나에게도 순식간에 심장의 박동이 드세질 만큼 애틋한 추억이 하나 있다. 1982년 이른 봄 신변에 일어난 어떤 일로 크게 상심해 혼자 감내하기 힘든 적이 있었다. 누군가와 상담을 하고 싶어도, 함부로 발설할 수 없는 일이라 전전긍긍하던 차 당시 스님의 글을 즐겨 읽던 터라 이 난제를 스님께 한번 여쭤보고 싶어졌다.
머리도 식힐 겸 여행 삼아 다녀오자며 집을 나선 게 7월 중순. 스님께서 송광사 불일암에 계신다는 것만 알았지 그때 그곳에 머무실지도 모른 채 무작정 나선 길이었다. 생각해 보니 그래도 선물은 하나 준비하는 게 도리일 것 같았다.
마침 암자 뜰에 10가지 나무를 기르고 싶은데 심지 못한 것이 비자나무와 석류나무라고 쓴 스님의 글이 생각나 바로 동네 농원에 들러 석류나무 한 그루를 샀다. 줄기는 가늘지만 키가 내 가슴까지 오는 걸로 뿌리에 흙과 새끼줄을 둘러 감싸 드니 꽤 묵직해 고속버스로, 시외버스로 옮겨 실으며 얼마나 낑낑거렸는지….
불일암 초입에선 주민 한 분이 염천에 땀을 뻘뻘 흘리는 내 모습이 보기 딱했는지 바지게를 지고 나와 나무를 받아서 옮겨주기까지 했다. 다행히 스님께선 암자에 계셨고 귀띔을 받고 나를 반겨 주셨다. 그리곤 우선 갖고 온 나무부터 심자며 윗옷을 벗으시고는 손수 곡괭이로 구덩이를 파시더니 정성껏 나무를 심으셨다.
잠시 후 스님과 단둘이, 안온한 조계산 능선이 바라보이는 불일암 마루에 앉아서 차를 들며 사람의 인연 등등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었는데, 어느새 서너 시간이 지나버렸다. 나는 그제야 겨우 내 고민을 털어놓았다. 가만히 들으시던 스님의 대답은 “오늘 밤은 송광사 큰절에서 묵고 내일 조계산을 넘어 선암사까지 산행을 하며 다시 한번 잘 생각해 보라”는 것이었다. 그때 스님이 내가 가져간 낡은 수동 필름 카메라에 관심을 보이시길래 “사진 한 장 함께 찍고 싶습니다”라고 했더니 포즈를 취해 주셨다.
- ▲ 대숲 안에서 쳐다본 하늘.
카메라를 마루에다 놓고 셔터를 자동모드로 해서 찍은 것이 바로 이 사진이다. 그 뒤로 적지 않은 세월이 흘렀지만 이번에 텔레비전에 나온 스님의 모습이 많이 노쇠해 보여서 마음이 아팠다. 하지만 워낙 맑고 홀가분하게 사시는 스님이신지라 부디 화면발이 나빴거나 내가 잘못 보았기를 바랄 뿐이다.
아무튼 스님을 뵌 지 20년 뒤에 이 글을 썼고, 그리고 또 10년이 더 지난 뒤인 지난달 스님은 입적하셨습니다. 이 또한 제게는 어떤 연기설화 같습니다. 그때 스님 말씀대로 그날 밤을 송광사 절에서 자고 다음날 천자암을 거쳐 장군봉에 올랐다 선암사로 하산해 순천으로 오는 버스를 탔는데, 켜놓은 라디오에서 경봉 큰스님께서 양산 통도사 극락암 토굴에서 입적하셨다는 뉴스 속보가 나온 겁니다.
전날 법정스님과 마주앉아 사람의 인연에 대해 대화하던 중 제가 서두에 잠깐 언급한, 양산 천성산 금봉암에서 공부한다고 기거할 때 경봉 큰스님을 알게 돼 그 뒤 스님의 상좌가 되고 싶었던 적이 있었고, 그리고 실제로 어느 여름 집을 나와 통도사 극락암 토굴까지 찾아갔다 스님께 야단만 맞고 돌아왔다고 말씀 드렸는데 “그 경봉스님께서 지금 건강이 안 좋으시다”고 하셔서 함께 걱정을 했었거든요.
이번 저의 순천행은 옛돌트레킹단의 선암사, 송광사를 포함한 굴목이재탐방단과의 동행으로 이뤄졌습니다. 물론 이해인 수녀님의 그 꽃시집도 배낭에 챙겨 넣었지요. 수녀님께선 모르겠지만 그 시를 탄생시킨 배경이 된 현장에서 직접 읽어보면 느낌이 어떨까 싶어서요.
입력 : 2010.05.31 10:08
- ▲ 불일암 입구, 대나무 사립문.
서울 메트로 2호선 강남역 3번 출구에서 7시15분 출발, 11시 반쯤 승주에 도착, 점심을 먼저 해결하고 거기에서 차로 10분 거리인 선암사로 향했지요. 창 밖엔 벌써 봄이 한창이더군요. 사실 오늘 이 트레킹단의 탐방 여정에 불일암은 들어 있지 않습니다.
하지만 저는 선암사, 송광사는 다 둘러보지 못하더라도 불일암만큼은 꼭 둘러보기로 마음먹고 참가했지요. 그래서 대장님께 살짝 그 뜻을 피력했지요.
그랬더니 송광사에서 불일암을 다녀오려면 약 40분이 걸리니까 먼저 1시간 정도 걸리는 선암사 관람 시간을 줄이면 가능할 거라고 합니다. 다행입니다. 저는 재작년, 작년에도 무우전 매화들을 보러 선암사를 찾아왔으니까요.
- ▲ 선암사 달마전 약수. 최고의 물맛이나 전각 안 뒤뜰이라 찾기가 쉽지 않다.
마침 대웅전 앞에서는 큰 탱화를 내걸고 스님들이 천도제를 올리고 있었습니다. 대웅전을 돌아드니 매화 향이 코끝에 충만합니다. 우리 전통 매화만이 지닌 향이죠. 이번엔 대장님의 해설 덕분에 달마전 내 약수와 원통전 순조 임금 친필사액, 그리고 선암사를‘일년 내내 꽃 피는 절’이라 부르게 한 원통전 문살 붉은 목단 문양 등 몇 가지를 더 알게 됐지요. 하지만 불일암 때문에 대열을 빠져나옵니다.
특이한 디자인과 위생적인 구조로 소문난 뒷간 앞을 지나 굴목재 길로 들어섭니다. 선암사골 계곡과 다리를 건너고 울창한 편백나무 숲을 지나니 길가에 얼레지꽃이 만발해 있습니다. 전에 다른 곳에서들 많이 찍은 터라 그냥 지나려다 예쁜 녀석들의 유혹을 도저히 물리칠 수 없어 주저앉길 몇 번…. 그새 단원들이 저를 앞질러 갑니다.
안 되겠다 싶어 속도를 내 열심히 오르는데, 길이 생각보다 가파릅니다. 고갯마루에 가까워서는 급경사를 이루는데, 제가 이거 뭐 하는 짓인지. 꼭 이래야 하나 싶은 거 있죠. 아이스케이크 장사가 호객하는 굴목재는 그냥 통과합니다. 고개만 넘으면 내리막길이라 했는데, 말대로 급격한 내리막 길. 곧 수량이 많은 계곡과 다리를 건너고 그 유명하다는 꽁보리밥집에 도착합니다. 평지를 이룬 곳에 자리해 있군요.
평상 터 아래로 계곡에서 물길을 빼돌렸는데, 맑은 흐름이 탁족하기 그만일 것 같지만 갈 길이 급해 바로 10시 방향 송광사 가는 길로 올라섭니다. 길이 평지로 이어지고 도중 계곡을 여러 번 건너는 게 이상합니다. 더욱 그런 것은 길이 다시 오르막으로 변하는 점입니다. 이상하다 싶은데 궁금증은 좀 더 가서야 풀렸습니다.
또 하나의 굴목재가 나타났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이 산엔 굴목재가 둘입니다. 하나는 선암사 쪽 선암굴목재, 하나는 송광사 쪽 송광굴목재죠. 이 재 이름에서도 옛날 두 절이 아웅다웅했던 걸 알 수 있습니다. 해발 높이는 송광굴목재가 선암굴목재보다 100여m 더 높은 720m(일부 지도엔 665m)로 조계산 정상 장군봉 884m에 비해 별로 차이가 안 납니다. 그러니 이렇게 힘들 수밖에요.
제가 왜 평지가 계속될까 궁금해 하며 걷던 길은 바로 두 고개 사이에 형성된 평지 사면 구간입니다. 그 길이가 1.5km나 되고요. 선암사에서 선암굴목재까지는 2.8km, 송광굴목재에서 송광사까지는 3.6km입니다. 이제부터는 그 중간 지점인 홍골까지 급경사 길을 내려섭니다. 여전히 아름다운 돌계단 길이 많습니다.
그 계단 사이에 함초롬히 핀 꿩의바람꽃을 찍기도 하며 한쪽으로 시원한 계곡수가 흐르는 길을 따라 홍골까지 내려섭니다. 전국의 여러 산악회에서도 많이들 왔네요.
근데 이번 길에는 왜 그리 많은 사람이 계곡에서 탁족을 해대는지요. 원, 참…. 조계산이 높지도 않으면서 국보급 대찰 둘을 거느릴 수 있는 것은 이렇게 물 많은 골짜기를 여럿 안고 있음도 한 이유일 것 같습니다. 이름도 안 써놓은 20여m급 폭포며 깊은 단애 계곡 속에 숨은 더 많은 폭포들이 아직은 앙상한 나무들 덕분에 제 눈에 포착됩니다. 생각해보니 저쪽 선암사골도 이에 못지않았던 것 같습니다.
- ▲ 1.굴목재 길가에 지천으로 핀 얼레지꽃. 2.송광사로 내려서는 가파른 계단 길 틈새에 핀 꿩의바람꽃. 3.홍골 폭포 타운에 핀 진달래. 뒤에 폭포 물줄기가 하얗게 실루엣으로 잡혔다. 4.당우 아래 그늘로 밝은 기운을 전하고 있는 매화. 5.곧 하늘을 향해 열릴 동백 꽃봉오리.
송광사에서는 뜰에 화사하게 핀 연분홍 고매 한 그루만 찍은 다음 바로 불일암으로 향합니다. 버스 옆자리 선배 한 분은 선암사 관람을 통째로 포기하고 장군봉에 올랐다 내려와 이 길에 동행이 되고 있습니다. 30년 전에 왔던 길을 묻는데 알 수가 없지요. 또 그땐 마을에서 불일암으로 바로 붙었으니까요. 아름다운 우화각을 카메라에 담다 선배를 놓치고 길까지 놓쳐 저는 절 밖까지 나왔다 길을 되찾습니다.
옛날에 제가 올랐던 그 길이 맞습니다. 길 초입‘등산로 없음’이라고 쓴 팻말 글씨가, 또 조금 더 오르니 조그만 개울을 건너는 나무 엮음 발판이, 그리고 송광사 경내로 바로 연결되는 삼거리 갈림길에 은밀한 표식처럼 세워놓은 연꽃 그림 위‘ㅂ’이란 글자 하나 새겨진 나무 말뚝들이 다 스님의 흔적인 양 반갑고 정겹습니다.(나중에 알아보니 이건 뒤에 다른 사람들이 세워놓은 것이라 함)
그런데 거의 다 와 간다 싶으니 앞에 못 보던 높다란 대나무 숲 길이 나타납니다. 기억에 대나무 숲은 없었거든요. 참 멋집니다. 순간 그윽한 향이 코끝에 와 닿습니다.
‘맑고 향기롭게’아시죠? 법정스님이 쓰신 책 이름이자 스님의 뜻을 실천하는 모임 이름이죠. 대숲 사이로 들어온 햇살에도 희뿌옇게 향의 서기가 서려 있습니다.
대나무로 엮어 만든 가슴 높이의 문 한쪽이 열려 있는 암자 입구에 섭니다. 대나무 숲 길이 암자 내부로까지 이어집니다. 이윽고 오후 4시를 넘은 햇살의 역광 속에 불일암이 형체를 나타냅니다. 텅 빈 마당. 그 위에 우두커니 선 세 칸짜리 집 한 채. 마루에 스님 영정이 마련돼 있고 그 앞에 향로와 돗자리가 펼쳐져 있습니다. 참배객 몇 분이 합장한 채 절을 하곤 그 곁에 스님이 직접 만들고 즐겨 앉으셨다는 정육면체처럼 생긴 작은 걸상 위 방명록에다 사연 같은 걸 적습니다.
남쪽에 보이는 작은 행랑채 하나는 전에도 있었는지 기억이 없습니다. 앞뜰이 채소밭으로 변해 있었습니다. 그땐 여기 한편에 여러 화초와 나무들이 무성했던 것 같은데. 제가 낑낑거리며 짊어지고 온 석류나무도 여기 어디다 심어놓으셨을 텐데…. 딱 한 그루 서 있는 앙상한 나무가 눈에 듭니다. 아마 서른 살쯤 됐을 텐데 석류나무는 유독 더디게 자란다니까 제발 그 석류나무이길 바라봅니다.
이곳에 스님을 만나러 왔을 때 저의 고민거리는 인간 관계였죠. 그때 얻은 답들 가운데는 그 문제에 대한 것뿐만 아니라 법정스님에 대한 것도 있었기 때문에 그 뒤로 일부러 스님을 다시 만나려 하지도 않았고, 전처럼 연연하지도 않았습니다. 아무런 직접적인 지침도 없이 스스로 깨닫게 해주신 스님의 가르침 덕분이었지요. 그래서 몇 날 더 늦추어 오늘, 보다 자유로운 상념으로 이곳을 찾아올 수 있었고요.
- ▲ 1.송광사 입구. 계곡을 건너면 바로 대찰이 펼쳐진다.2.굴목재 위 보리밥집. 야외 식탁 바로 앞으로 맑은 물길을 내놔 이채롭다.
암자 마루에 카메라 셔터를 눌러 놓고 스님과 제가 나란히 사진을 찍었던 곳으로요. 바로 스님 영정 앞입니다. 사진의 시선은 마당 대숲 위 조계산을 보고 있군요. 실제로는 텅 빈 불일암이 스님 사진 한 장만으로도 가득 차는 것 같습니다. 이것도 일종의‘텅 빈 충만’일까요? 아아! 그걸 가르쳐 주신 우리 스님, 세상 그 어떤 것에도 연연하지 않고, 죽음 앞에서도 흔들림이 없으셨던 스님은 지금 어디 계신지요. 방명록에 저도 한 마디 적습니다. ‘스님! 석류 총각 다녀갑니다.’
알음알음 찾아오는 참배객들이 꼬릴 뭅니다. 5시까지 차를 타야 하니까 30여 분 남짓 남아 서둘러 대숲 길을 빠져나옵니다. 대나무 대문을 나서니 생각이 납니다. 제가 무엇에 쫓겼는지, 그만 이해인 수녀님 꽃시집을 꺼내 본다는 걸 깜빡해버렸군요. 하긴 그런다고 무슨 의미가 있는 것도 아니지요. 물론 스님 사후에 이러는 것도 제 마음일 뿐이고요. 그냥 내 지난 일기장 한 번 뒤적여 다시 한 번 읽어본 셈 아닐까요.
대숲에 바람이 입니다. 스님 글이 생각납니다. 대숲에 부는 저 바람처럼, 한밤에 계곡 물 속을 비추는 달빛처럼. 존재하되 그 무엇에도 걸리지 않는 무애한 삶이란 어떤 걸까요? 이 세상 어디에도 답은 없을 겁니다. 다만 깨우침만이 있을 뿐이겠지요. 불일암에서 또 하나의 화두를 얻고 돌아 나옵니다. 이 또한 이미 깊이 얽혀버린 온갖 인연의 세상 일에 쫓겨 금방 잊혀지겠지만요.
/ 글·사진 한승국 hansletter@para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