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겨울나무 外--문근영

병노 2012. 7. 7. 18:23

겨울나무 / 문근영 시인

 

바람이 가지를 당길 때마다

아, 힘껏 아프다

고열에 시달려 오들오들 떠는 것은

 

소곤소곤 왔다가 와르르

가버린 잎새들 때문

툭, 툭 불거진 골 깊은 주름사이로

누더기 같은 세월

흔적만 걸쳐두고 속살 훤히

비쳐서 울고 있는 것은

 

가슴 동그랗게 긁힌 상처 때문이지

 

그렇다고, 송두리째 뽑혀

나가자빠질 순 없어

푸른 수액을 심장에 뿜어 사방팔방으로

봄을 꽃처럼 퍼 올릴 거야

물관과 체관으로 맑게 거른

나만의 꽃빛 음표들 와락 쏟아지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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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미 / 문근영

 

돌담 아래 쪼그리고 앉았다

까맣고 좁은 통로를 가만히 들여다본다

그 통로 속에 두근거리며 매달려 있을

흙내 물씬한 방들을 생각한다

햇볕 쨍쨍 작열하는 일터에서

땀에 절어 몸이 새까맣게 타버린 개미

허리가 부러질세라 휘어도 어쩔 수 없이

금방 죽은 개미도 떠메고 간다

사인은 무엇일까 사망진단서엔 분명

일하다가 쓰러져도 툭툭 털고 일어나

"나는 괜찮다." 손사래 치며 일터로 나가신

아버지가 "업무과로"로 누워 있을게다

한 뼘의 여유도 숨 돌릴 틈도 없는 삶들의

저 슬퍼할 틈도 없는 절실한 몰두

더듬이를 다듬으며 입술을 꼭꼭 깨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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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앗 하나가 / 문근영

 

꼼틀 꼼틀 태기가 있었나보다

햇볕의 담금질로 해산할 모양이다

어둠을 꼬박 지새운 길에서

산통 때문에 이리저리 몸을 가누고 있다

은하수 같은 꿈을 왈칵왈칵 쏟아 놓고

꽃밭인 듯 가슴 졸인 머리를 빠끔히 내민다

해산의 꿈들이 어둠을 헤엄쳐와

줄줄이 날개를 펴고 비상하는 탄생

꽃잎 하나 살며시 열고 햇살이 내려와 앉는다

가슴으로 빨려들 듯 봄이 반짝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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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집에서 / 문근영

 

빈집 한 채 허름한 마음을 앓고 있다

바람도 춥게 낡아 실어증 같은 빈집 곳곳에

단속되지 않은 문간과 녹슨 문고리들이

외딴 추억으로 한 잎 한 잎 몸살을 앓는다

 

빈집처럼 허리가 비틀어진 아버지의 한숨과

마당 가득히 널어놓은 어린 시절이

유년의 온기를 잃고 시리게 떨고 있다

 

항아리가 푹푹 익어가고 빨래가 너울너울 춤추는

가슴속에 잠들었던 고향이 꿈을 꾼다

몸이 활짝 열리고 붉게 타는 저녁노을이

어머니 치마폭에 잎잎이 내려와 젖는다

 

상큼달달한 꿈속에서 빈집이 일어서고 있다

풀기 빳빳한 기억 속에 옛날이 무더기로 자라고

바람을 깨우는 아버지의 웃음소리 환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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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도 / 문근영

 

 

하늘을 걸어 잠근 서러운 사연이

마음 한 잎 부칠 데 없어

허공을 찢으며 길 없는 언어가 되었다

 

음표를 잃고 흐느적거리는

물결 모퉁이의 뒷소문을

해안선 따라 더듬더듬 내려놓았다

 

천 년의 목숨이 피고 진 억겁으로부터

비롯되었을 저, 물결의 모음과 자음들이

천 길 푸른 속내의 비밀을 걸어 잠그면

 

보라, 뼈대만 앙상하게 남은 숙명의 말들이

푸른 울음을 꿀꺽꿀꺽 삼키며

현기증처럼 울렁울렁 천문(天門)에 솟구치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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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선 / 문근영

 

팽팽한 마음이 길 놓친 바람을 데리고

한 가닥 명주실이 되어

하염없는 실타래를 풀어 쥐고 멀리 외출 중이다

곧추세운 달빛 시위를 쏘고 쏘아도

일상에 닫힌 우울은 마음의 문을 열고 걸어나갔다

펄럭이는 미망의 세월을 뒤적거리며

애틋한 그 사람 이름 위에 지문을 찍어본다

수줍은 옷고름 풀고 속살 터지도록

사랑했던 과거는 언제라야 환히 부활하는 것일까

미처 선언되지 않은 연서 하나가

밤이슬 젖은 하늘을 이슥히 끌어내리며

명주실 끝의 팽팽한 그리움을 저토록 흔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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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마를 묻으며 / 문근영

 

볼 시린 성에 꽃이 겨울을 탈 때

무 속바람 키우듯 마음이 숭숭 뚫리고

이유 없이 허기가 지고 아득할 때

 

그을린 생각이 식은 세월을 헤집고 앉아

노을 낀 그리움을 천천히 풀어 내리고

내 마음 구석진 아궁이 속에 고구마를 묻는다

 

부지깽이로 토닥토닥 잔 불을 살려낸다

손을 번갈아가며 껍질을 벗기고

폭신폭신하게 익은 속살을 한 입 베어 물면

 

그대 향기 우거진 고운 밤하늘에

어둠을 뜬눈으로 삼키며 가슴 가득 흐드러지게

부풀어 오르는 단내나는 그리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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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숙자를 보며 / 문근영

 

춥다

찾아오는 밤이 두렵다

너덜너덜 찢어진 노숙이 서럽도록 새어드는 밤

거리로 내몰린 사람들이 이리저리 구겨지다가

구겨진 삶을 접고 오들오들 떨고 있다

뒤엉킨 실타래처럼 수치심마저 잃어버린

육신이 아무 데나 자리를 깐다

바닥에 누워있는 종이박스 한 장이 스멀스멀 파고드는

냉기를 막고 끈적끈적하고 매캐한 공기가

그의 육신 곁에 눈을 감는다

겨울 한 철 지날 때마다 몸속의 뼈는 부식되어 가고

생애도 점점 허물어져 간다 소주병이 쓰러진다

빈 소주병과 함께 나뒹구는 부스스한 시간

가슴속에 불빛으로 번질거리는 허공을 움켜쥔 채

살얼음을 배설하는 아련한 추억 한 토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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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진 거울 / 문근영

 

 

거울에 금이 가듯 마음도 길을 잃으면

무너진 믿음의 지붕을 걷고 서까래를 뽑는다

슬픔의 손사래로 던지는 사금파리

가슴이 베여 마음은 핏물로 굴절되었다

거울의 낭패처럼 무지개를 뭉개고

비늘 뜯긴 마음이 벼락을 치며 아파온다

사랑에 잠식당했던 기막힌 사연들은

땅 마른 불길이 되어 어쩌자는 것인가

눅눅한 꿈속의 앞뒤 없이 덤비는 금 간 아픔에서

들불 같은 매캐한 냄새가 난다

이 악물고 참았던 슬픔이 접고 접혔다가

금 간 길들의 뜨거운 상처 속으로 빠져들고 있다

사랑이란 잿불을 건드리는 바람 필경

시야를 지운 사금파리에 불과했음을 저도 알 때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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틈 / 문근영

 

헐거워진 그대와 나 사이에 틈이 생겼다

무심하게 엇나간 말 하나가 시간을 후비며

얽히고설킨 작은 틈으로 바람의 앙금을 얹고

쓰라린 간극에 웅성거리는 불신의 벽을 높였다

내 삶의 가장 안쪽을 불안하게 갉는 소리로

마음의 울창한 균열에 상처가 우거졌다

뒤틀린 허무의 헛된 말들이 월야(月夜)를 비집고

헝클어지고 깨진 마음을 가지런히 눕힌다

한 때의 행복했던 시간이 보이고 한동안의

그리움이 구석구석 일어나 찢기고 구겨진

종잇장 같은 허망한 어제를 마구 흔들어댄다

낡은 추억 끝 슬픈 틈새에 마침표를 찍으며

잊힐 거라는 아픈 사실 하나 망연자실 젖고 있다

   

 

 

출처 : 대구문학신문 - 시야 시야
글쓴이 : 애델바이스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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