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한(1916 ~ 1999), 4가지 이름으로 살다 간 여인. 태어나서 받은 이름이 김영한. 가문은 서울 4대문 안의 부유한 집안이었으나, 한 친척이 당시 일제가 일부러 붐을 조성한, 마치 미국의 서부 개척사를 연상케 하는, 골드 러쉬의 붐을 조성한, 손쉽게 자원을 강탈해 가는 통로였던, 그 광산 개발, 그 일확 천금의 뉴타운, “잘 살아보세”의 개척사에 푹 빠진 어느 친척의 꾐에 빠져 보증 서주고, 집안의 주요 자산을 속임수로 저당 잡힌 끝에, 모든 걸 차압 당하고 쫓겨나며 폭삭 망했다. 16세에 스스로 집안의 어려움을 해결 코자, 홀로 남으신 어머님의 짐을 덜고자, 기생의 길로 접어든다. 그 때 받은 이름이 김진향. 기생이라 하나 오늘날의 퇴폐적인 향락 상과는 전혀 다른 문화적 아이콘이다. 상당한 수준의 기예가 필요하고, 학습이 필요하다. 그저 몸바쳐서 돈 만을 목적으로 하는, 현대판 기생(?)들과는 전혀 차원이 다른, 영혼이 몰수된 타락한 삶과는 다른 여인의 길이었다. 일제 시대에 서서히 조선 기생의 품위와 고급 문화적 기풍이 일제의 퇴폐적인 자본주의 문화 앞에서 맥을 못 추어 가며, 그 맥을 상실했던 것이다. 일본이 저지른 문화적 말살 사 중 하나이다. 예기에서 창기로 타락한 전형이다. 조선 기생이 풍류와 예능에 탁월하였으며, 판소리의 맥을 이어주는 통로 구실도 하였고, 시와 화의 풍류를 전파하는 난장 구실도 하였다고 한다. 조선을 침략한 적장을 품에 안고 목숨 걸고 나라를 지키려는 여인들이 있었으니, 현대판 창기들과는 전혀 판이하다. 춘향을 권력으로 명하여 품었으면 될 일을, 폭정의 아이콘인 변학도는 왜 문초까지 하면서 그 난리를 쳤을까 하고 새삼 놀라지 않을 수 없다. 퇴폐에 물든 현대의 앵벌이들. 그런 자신의 타락한 영혼을 거침없이 쏟아내는 김문수 처럼, 춘향전의 요체는 변사또가 춘향이를 따먹으려는 장난질이라고 인식한다면, 조선 기생이나 문화에 대해 잘못된 인식을 하는, 일제 시대의 천박한 잔재를 털어 내지 못한 수준이다. 기생, 아무나 갈 수 없는 길이지만, 수입이 좋았다고 한다. 그런 김진향을, 어머님은 좋아하는 사과나 과일을 사 들고 온 딸을 볼 때마다 늘 아픔으로 울었고, 흐느꼈다. 네가 기생이 됐다니, 내가 죄인이로구나 하며.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그 신분이 바뀌지 않고, 죽을 때까지 기생으로 자식 없이 살아가야 할 여인의 운명에 한탄한 것이다. 당시 일제는 조선 문화와 영혼을 말살하는 일에 혈안이 되었는데, 이미 한글을 엄청 수준 낮은 글이라고 멸시하는 풍조를 만들기 시작하면서, 한글을 사용하지 못하도록, 세종 시대 한글을 “언문’이라 비하 하던 엉뚱한 역사를 들추며, 시대에 앞서가는 미래인들은 외래어인 일본어를 잘 사용해야 한다고 은근 부추기며, 한글 사용을 탄압하기 시작했다. MB의 치세(?)에 영어 사용을 나팔부는 정책과 맥이 상통하는 역사 대목이다. MB가 집권한 해에 영어공용어 정책을 주창했던 복거일이나 일제 식민지 시대의 한글에 대한 노골적 비하와 탄압을 앞장선 반민족 행위자들이나 쌍생아로 보일 수 밖에 없는 역사의 맥이다. 공식적으로 한글 사용을 금하고 이름을 일본어로 개명하라고 압박하기 전에 일선 학교의 일제에 충성스런 교장들은 학교 내에서 한글 사용을 금지하기 시작했다. 그 때, 김진향은 가나다라 등을 줄기차게 연습하고 사용하면서 이를 신문지 이면에 써서 일본 앞잡이들이 잘 모르게 풀어 쓰는 법을 터득했다. 이 일이 입 소문을 타고 퍼져서, 당시 지하 활동을 개시했던 조선어학회의 간부들 중 특히 해관 “신윤국” 선생이 이 사실을 알고 매우 칭찬하며, 장차 나라의 앞길에 중요한 인재라 생각하고 일본 유학을 권하였다. 많이 배워서 나라를 구하는 일에 앞장서라는 취지로. 교육의 중요함을 실천한 것이다. 그 길로 일본 유학 길에 오른 김영한은 본국에서 보내주는 학비와 생활비로 열심히 공부하는 중에, 그만 본국의 조선어학회 간부들이 밀정의 밀고로 모조리 체포되어 멀리 함경남도 흥원 형무소로 보내졌다는 소식을 듣게 된다. 일제 밀정들의 사찰은 상상을 불허할 정도로 잔인했다. 완벽한 반민족 행위자들의 정보 수집은 민족의 목숨을 완전히 끊어 놓는데 혁혁한 공(?)을 세운 것이다. 가슴이 미어지는 슬픔을 안고 일단 공부를 중지하고 형무소로 면회를 가고자 일본에서부터 그 멀리 왔으나, 당시 일제는 조선 민족지사들의 면회는 일절 허용치 않는지라, 계속 면회를 신청하며 나날이 흘러가고, 거기서 생활을 이어가고자 인근 함흥으로 가서, 다시 김진향으로 돌아갔다. 그 때가 20세였다. 함흥, 거기서 김진향은 인생을 전부 바꾼 자야로 태어났다. 함흥 영생 고보의 선생 이 취임식을 위로하는 어느 자리에 나갔다가 백석을 만난 것이다. 그 때가 22세. 백석, 본명은 백기행(1912~1995, 백기연이라는 설도 있음)으로 26세 때 김진향을 만나자 마자 바로 사랑을 고백하고 뜨거운 연애가 시작된다. 자신이 사랑하는 여인에게 “자야”라는 애칭을 붙여준다. 가슴이 뜨거운 젊은이 둘이 만났으니 무쇠 솥도 녹일 정도의 폭풍 사랑이었다. 뜨거운 만큼 상처도 컸으니, 당시 사회에 잔존한 신분 차이로 인한 결혼이 장벽에 부딪친 것이다. 자야는 백석의 앞길을 결혼 할 수 없는 신분의 기생이 막아 선다고 죄책감을 느끼며, 어느날 몰래 서울로 도망간다. 일방적으로 신부 감을 정하여 결혼 시키는 백석 집안을 벗어나, 멀리 만주로 가기로 한 약속을 깨고… 만주 행 기차표 대신 새벽에 서울행 기차를 타고 몰래 숨어 지냈으나, 백석은 온갖 수소문을 하여 자야의 행방을 찾았고, 메신저 보이 편에 다방에서 기다리고 있다고 메모를 보냈다. 그렇게 다시 만나 서울 동거를 시작했고, 백석은 함흥 고보를 떠나 조선일보사에 취직했다. 그 청진동 집에 무시로 드나들던 많은 문인 들 중 특히 아동 문학가 방정환이나 문학평론가 백철, 그리고 소설가 허준과 수필가이자 의사인 정근양이 자주 왔다. 다시 만날 그 다음날 백석은 함흥으로 돌아가면서 “나와 나타샤와 흰당나귀”를 봉투에 남기고 갔다. 가난한 내가 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 오늘밤은 푹푹 눈이 나린다 나타샤는 사랑을 하고 눈은 푹푹 날리고 나는 혼자 쓸쓸히 앉아 소주를 마신다 소주를 마시며 생각한다 나타샤와 나는 눈이 푹푹 쌓이는 밤 흰당나귀 타고 산골로 가자 출출이 우는 깊은 산골로 가 마가리에 살자 눈이 푹푹 나리고 나는 나타샤를 생각하고 나타샤가 아니 올 리 없다 언제 벌써 내 속에 고조곤히 와 이야기한다 산골로 가는 것은 세상한테 지는 것이 아니다 세상 같은 건 더러워 버리는 것이다 눈은 푹푹 나리고 아름다운 나타샤는 나를 사랑하고 어데서 흰당나귀도 오늘밤이 좋아서 응앙응앙 울을 것이다 이 시를 받아든 자야는 백석을 ‘연애 철학자’라고 생각했다. 그가 남긴 시상으로 상상의 나래를 펴며 날아가는 자신을 발견한 것이다. “왜 당신은 내가 말만 하려고 하면 입을 막아버리는 거에요?” “ 그 골치 아픈, 뻔히 아는 사실을 구태여 말로 아니해도 눈과 눈으로 전수하고, 또 모자라면 입과 입을 포개는 키스로 대화하면 통하는 것을. 키스란 모오든 남녀의 가장 확실한 사랑의 의사 전달 방법이야 ! 그래도 아니 통하면 그건 비문화인의 둔한 센스요, 벽창호지. 여자들이란 쓸데없는 데 신경을 써서 남자의 마음을 단련시킨단 말이야.” 둘의 사랑 대화다. 둘의 동거는 수많은 곡절을 낳으면서 결국 헤어짐으로 막 내린다. 함흥에서 서울로 동거 처를 옮겨도 결국 집안의 반대와 강권으로 그 사이 백석은 세 번의 결혼식을 올렸다. 그 때 마다 첫날밤을 지내자 마자 자야 집으로 돌아왔다. 그것은 사랑으로 치유되기 어려운 상처를 자야에게 남겼고, 자야는 윤심덕을 생각하기에 이르렀다. 같이 할 수 없는 남자를 보낼 결심으로 중국 상해로 홀연히 떠났다 달포 만에 돌아와 둘은 재회했고, 그 사이 백석은 만주로 갈 결심을 굳혔다. 모든 속박에서 벗어날 길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자야는 진정 사랑하는 이를 가지고 함이 신분의 차별로 막혀 있음을 아는 터라, 만주로 같이 감은 이미 세번의 강제 결혼을 치루었어도 난마에 휩싸인 집안을 더욱 파멸로 몰아 넣는다고 생각하고 동행을 거절했다. 언젠가 또 만나려나 하는 막연한 믿음을 마음 속에 담아두고… 그러나 이것이 영영 이별이었다. 그 후 아무도 그녀를 “자야”라고 불러주지 않았다. 백석은 북만주로 가서 영영 돌아오지 않았고, 나중에 북한으로 들어가 거기서 결혼까지 하였다. “죽기 전에 우리 사이에 이별이 없을 거야”하는 맹세도 당시 신분의 차별을 넘지 못하고 자야는 김진향으로 돌아갔다. 해방 후 둘은 분단선으로 갈라져서 아예 소식 조차 들을 수 없는 지경으로 살아가게 되었다. 1953년 중앙대 영문과를 졸업한 김영한은 남한 내 3대 요정의 하나인 ‘대원각’ 을 일구어 낸다. 평생을 독신으로 살면서 끝내 떠나간 님을 버리지 못한 여인으로 살았다. 주지육림의 본원 역할을 하던 대원각, 7,000여평의 넓은 땅과 40동의 건물을 자랑하던 요정의 주인은 김영한 할머니. 자야도 버리고, 김진향도 버린 후 대 요정의 회장이 되었다. 1987년 “무소유” 책을 읽고 흠모하던 차에, LA에 온 법정 스님을 만나 이 자리에서 김영한은 대원각을 스님께 시주할 터이니 받아달라고 청하였다. 그러나 무소유를 실행하고 있는 법정 스님은 정중하게 사양하였다. 이 때부터 10 여년간 둘 사이에는 기이한 실랑이가 있었다. “제발 시주를 받아 주세요, 스님.” “나는 그 시주를 받을 수가 없습니다.” 싯가 1,000억대의 재산을 조건 없이 시주하겠다는 김영한 할머니와 법정 스님은 끈질긴 실랑이 끝에 1995년 드디어 대원각을 고쳐서 절을 만들겠다는 결론을 만들었다. 2년간의 개보수 작업 끝에 1997년 “길상사”로 문을 연 식장에서 법정 스님은 “저는 이 길상사가 가난한 절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절은 더 말할 것도 없이 안으로 수행하고 밖으로 교화하는 청정도량이기 때문입니다. 진정한 수행과 교화는 호사스럼과 흥청거림에서 이루어 질 수 없습니다.”라고 말하였다. 그러면서 김영한 할머니에게 “길상화”라는 법명과 108 염주 한 벌을 목에 걸어 주었다. 법정 스님이 걸어준 염주를 만지고 또 만지던 할머니가 남긴 말, “제가 평생을 일군 터에 부처님을 모셔 한 없이 기쁩니다. 저는 죄 많은 여인입니다. 저는 불교를 잘 모릅니다만…, 저기 보이는 저 팔각정은 무수한 여인들이 옷을 갈아입는 곳이었습니다. 저의 소원은 저곳에서 맑고 장엄한 범종 소리가 울려 퍼지는 것입니다.” 2년 후 몸이 쇠하여 길상사로 들어와 마지막 산책을 한 후 유언을 남겼다. “나 죽으면 화장해 길상사에 눈 많이 내리는 날 뿌려주세요” 1999년 11월 14일 염주를 목에 걸고 운명했다. 그녀의 유언대로 12월 14일 소복하게 눈 쌓인 길상사 경내에 그녀는 재로 뿌려졌다. 무엇이 그녀로 하여금 이토록 남김없이 주고 가도록 만들었을까? 무소유 철학일까? 나는 사랑이라고 본다. 한 남성을 지극히 사랑한 여인으로서 사랑의 심연을 보여준, 삶. 백석을 사랑하였기에, 그가 살다간 세상에 한 점 남김 없이 아름답게 퍼주고 간 것이다. 자신의 청춘을 사랑으로 새겨준 님이 세상에 대한 사랑으로 부활한 것이다. 무소유, 불필요한 것은 가지지 않는다고 해석하는 소극적 사고가 아니라 무아를 실천하는 공유의 개념으로 접근한다면 쉬이 접근 가능한 매우 유용한 삶의 철학이리라. 내 것을 공유하는 그것도 사회적으로 공익적으로. 그러나 사랑보다 진하지 않음은 어쩔 수 없다. 안철수 재단, 나를 집어 넣고 공유하는 그런 기부가 아닌 순수하게 전부 내려놓고 나를 버리는 그런 공유의 재단이 될까 ? 미래의 탐욕 조차 한 티끌 없이 나를 버리는 자, 끝을 제대로 결실 맺는 자가 훌륭한 자이다. 열매도 맺지 못할 숱한 말들을 뱉어 놓고 가는 인간들 보다는 … 이 땅에 이토록 아름다운 기부가 또 있을까? 잘 지내시나요 ? 자야 님, 백석 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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