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정스님 글모음

살아있는것은다행복하라전문

병노 2011. 11. 4. 17:20

“살아있는것은 다 행복하라”

이 책은 법정스님출가50주년기념하여법정스님 말씀을 류시화 시인이편집하여 엮은 책으로서 일명 ‘법정스님의 잠언집’이라고도 합니다.

책이 절판되어 구할 수 없기에 교보문고에서 제공한 목차를 기준으로인터넷

여기저기서 여러날에 걸쳐 한편 한편 찾아서 128여편을 전부 찾아서 수록 했습니다.

다른책과 중복된 내용도 있으나 ,힘들거나 고된삶으로지친영혼을달래주며 마음을 다스리는데 도움이 될만한 주옥같은 말씀들이 수록되어 있습니다.

목차 (목차는 교보문고제공)

엮은이ㆍ류시화

1.행복의 비결

2.자기 자신답게 살라

3.말이 적은 사람

4.죽으면서 태어나라

5.날마다 새롭게

6.모든 것은 지나간다

7.기도

8.하나의 씨앗이

9.인간이라는 고독한 존재

10.하늘 같은 사람

11.유서를 쓰듯이

12.가난한 탁발승

13.안으로 충만해지는 일

14.지금 이 순간

15.무소유의 삶

16.외로움

17.존재의 집

18.영원한 것은 없다

19.내 자신이 부끄러울 때

20.마음은 하나

21.참된 앎

22.친구

23.녹은 그 쇠를 먹는다

24.연잎의 지혜

25.꽃에게서 배우라

26.먹의 세계

27.삶에는 즐거움이 따라야 한다

28.창을 바르며

29.스스로 행복한 사람

30.인연과 만남

31.마음의 주인이 되라

32.녹슨 삶을 두려워하라

33.물처럼 흐르라

34.삶의 종점에서

35.수행자

36.말과 침묵

37.소욕지족

38.묶이지 않은 들짐승처럼

39.수류화개

40.날마다 출가하라

41.자신의 등뼈 외에는

42.현재의 당신

43.회심

44.사는 것의 어려움

45.그리운 사람

46.빈 마음

47.귀 기울여 듣는다는 것

48.나무 꺾이는 소리

49.누구와 함께

50.다 행복하라

51.소유한다는 것은

52.바람은 왜 부는가

53.인간의 봄

54.마음의 바탕

55.흙 가까이

56.긍정으로 향하는 부정

57.산

58.다시 길 떠나며

59.존재 지향적인 삶

60.가을은 이상한 계절

61.나무처럼

62.산에 사는 산사람

63.큰 거울

64.무학

65.명상에 이르는 길

66.있을 자리

67.살 때와 죽을 때

68.어디에도 물들지 않는

69.그는 누구인가

70.단 한 번 만나는 인연

71.용서

72.원한의 칼

73.개체와 전체

74..오해

75.묵은해와 새해

76.빈 들녘처럼

77.최초의 한 생각

78.깨달음의 길

79.참고 견딜 만한 세상

80.얼마나 사랑했는가

81.자기를 배우는 일

82너는 네 세상 어디에 있는가

83자신의 눈을 가진 사람

84.눈꽃

85.만남

86.중심에서 사는 사람

87.살아 있는 모든 것은

88.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89.텅 빈 고요

90.귓속의 귀에 대고

91글자 없는 책

92나의 꿈

93.뒷모습

94.살아 있는 선

95.산에 오르면

96.함께 있다는 것

97.속뜰에서 피는 꽃

98.생의 밀도

99.간소하게, 더 간소하게

100.이 자리에 살아 있음

101.도반

102.가장 큰 악덕

103.깨어 있는 사람

104.가뭄으로 잦아드는 논물 같은

105.인연

106.강물처럼 흐르는 존재

107.직선과 곡선

108.부드러움이 단단함을 이긴다

109.빈 그릇에서 배운다

110.꽃과의 대화

111.인간의 배경

112.눈 속에 꽃을 찾아가는 사람

113.끝없는 탈출

114.그냥 바라보는 기쁨

115.알몸이 되라

116.소유로부터의 자유

117.자신을 창조하는 일

118.자연 앞에서

119.종교적인 삶

120.수행의 이유

121.생활의 규칙

122.허의 여유

123.빈 방에 홀로

124.어느 길을 갈 것인가

125.침묵

126.달빛

127.좋은 말

128.하루 한 생각

 

**행복의 비결**-1-

 

세상과 타협하는 일보다 더 경계해야 할 일은

자기 자신과 타협하는 일이다.

스스로 자신의 매서운 스승 노릇을 해야 한다.

우리가 일단 어딘가에 집착해 그것이 전부인 것처럼 안주하면

그 웅덩이에 갇히고 만다.

그러면 마치 고여 있는 물처럼 썩기 마련이다.

버리고 떠난다는 것은 곧 자기답게 사는 것이다.

자기답게 거듭거듭 시작하며 사는 일이다.

낡은 탈로부터, 낡은 울타리로부터.

낡은 생각으로부터 벗어나야 새롭게 시작할 수 있다.

아무리 가난해도 마음이 있는 한 나눌 것은 있다.

근원적인 마음을 나눌 때

물질적인 것은 자연히 그림자처럼 따라온다.

그렇게 함으로써 내 자신이 더 풍요로워질 수 있다.

세속적인 계산법으로는 나눠 가질수록

내 잔고가 줄어들 것 같지만

출세간적인 입장에서는 나눌수록 더 풍요로워진다.

물질적인 풍요 속에서는 사람이 타락하기 쉽다.

그러나 맑은 가난은 우리에게

마음의 평안을 가져다주고 올바른 정신을 지니게 한다.

행복의 비결은 필요한 것을 얼마나 갖고 있는가가 아니라

불필요한 것에서 얼마나 자유로워져 있는가에 있다.

'위에 견주면 모자라고

아래에 견주만 남는다'는 말이 있듯

행복을 찾는 오묘한 방법은 내 안에 있다.

하나가 필요할 때는 하나만 가져야지 둘을 갖게 되면 애초의 그 하나마저도 잃게 된다.

그리고 인간을 제한하는 소유물에 사로잡히면

소유의 비좁은 골방에 갇혀 정신의 문이 열리지 않는다.

작은 것과 적은 것에 만족할 줄 알아야 한다.

그것이 청빈의 덕이다.

우주의 기운은 자력과 같아서,

우리가 일단 어두운 마음을 지니고 있으면

어두운 기운이 몰려온다고 한다.

그러나 밝은 마음을 지니고 긍정적이고 낙관적으로 살면

밝은 기운이 밀려와 우리의 삶을 밝게 비춘다.

 

**자기 자신답게 살라** -2-

 

어떤 사람이 불안과 슬픔에 빠져 있다면

그는 이미 지나가 버린 과거의 시간에

아직도 매달려 있는 것이다.

또 누가 미래를 두려워하면서 잠 못 이룬다면

그는 아직 오지도 않은 시간을

가불해서 쓰고 있는 것이다.

과거나 미래 쪽에 한눈을 팔면

현재의 삶은 소멸해 버린다.

보다 직설적으로 표현하면

과거도 없고 미래도 없다.

항상 현재일 뿐이다.

지금 이 자리에서 최선을 다해

최대한으로 살 수 있다면

여기에는 삶과 죽음의 두려움도 발붙일 수 없다.

저마다 서 있는 자리에서 자기 자신답게 살라.

 

**말이 적은 사람**-3-

 

침묵을 소중히 여길 줄 아는 사람에게 신뢰가 간다.

초면이든 구면이든 말이 많은 사람한테는 신뢰가 가지 않는다.

나도 이제 가끔 많은 사람들을 만나게 되는데 말수가 적은 사람들 한테는 오히려 내가 내마음을 활짝 열어 보이고 싶어진다.

사실 인간과 인간이의 만남에서 말은 그렇게 중요하지 않다. 꼭 필요한 말만 할 수 잇어야 한다.

안으로 말이 여물도록 인내하지 못하기 때문에 밖으로 쏟아 내고 마는 것이다. 이것이은 하나의 습관이다.

생각이 떠오른다고 해서 불쑥 말해 버리면 안에서 여무는 것이 없다.

그렇기 때문에 그 내면은 비어있다. 말의 의미가 안에서 여물도록 침묵의 여과기에서 길러 받을 수 있어야 한다.

불교 경전은 말을 하고 있다. 입에 말이 적으면 어리석음이 지혜로 바뀐다고

말하고 싶은 충동을 참을 수 있어야 한다.

생각을 전부 말해 버리면 말의 의미가, 말의 무게가 여물지 않는다.

말의 무게가 없는 언어는 상대방 에게 메아리가 없다.

오늘날 인간의 말이 소음으로 전락한 것은 침묵을 배경으로 하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들은 말을 안 해서 후회되는 일보다도

말을 해 버렸기 때문에 후회되는 일이 얼마나 많은가.

 

**죽으면서 태어나라**-4-

 

우리는 날마다 죽으면서 다시 태어나야 한다

만일 죽음이 없다면 삶 또한 무의미해질 것이다

삶의 배후에 죽음이 받쳐 주고 있기 때문에

삶이 빛날 수 있다.

삶과 죽음은 낮과 밤처럼 서로 상관관계를 갖는다

영원한 낮이 없듯이 영원한 밤도 없다

낮이 기울면 밤이 오고

밤이 깊어지면 새 날이 가까워진다

이와 같이 우리는 순간순간 죽어 가면서 다시 태어난다

그러나 살 때는 삶에 전력을 기울여 뻐근하게 살아야 하고

일단 삶이 다하면 미련 없이 선뜻 버리고 떠나야 한다

열매가 익으면 저절로 가지에서 멀어지듯이

그래야 그 자리에서 새로 움이 돋는다

순간순간 새롭게 태어남으로써

날마다 새로운 날을 이룰 때

그 삶에는 신선한 바람과 향기로운 뜰이 마련된다

우리는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 나그네인지

매 순간 살펴보아야 한다

 

**날마다 새롭게** -5-

 

행복이란 무엇인가

밖에서 오는 행복도 있겠지만

안에서 향기처럼 꽃 향기처럼 피어나는 것이

진정한 행복이다

그것은 많고 큰데서 오는 것도 아니고

지극히 사소하고 아주 작은 데서 찾아온다

조그마한 것에서 잔잔한 기쁨이나

고마움 같은 것을 누릴때

그것이 행복이다

문명의 이기에 의존하지 말고

때로는 밤에 텔레비전도 끄고

촛불이라도 한번 켜 보라

그러면 산중은 아니더라도

산중의 그윽함을 간접적으로라도 누릴수 있다

또한 가족끼리, 아니면 한두 사람이라도

조촐하게 녹차를 마시면서

잔잔한 이야기를 나눌 수 있다면

거기서 또한 삶의 향기가 피어날 수 있다

때로는 전화도 내려놓고 신문도 보지 말고

단 10분이든 30분이든 허리를 바짝 펴고

벽을 보고 앉아서

나는 누구인가 물어보라

이렇게 스스로 묻는 물음 속에서

근원적인 삶의 뿌리 같은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문명의 잡다한 이기로부터 벗어나

하루 한 순간만이라도

순수하게 홀로 있는 시간을 갖는다면

삶의 질이 달라질 것이다.

 

**모든 것은 지나간다**-6-

 

개울가에앉아 무심히 귀기울이고 있으면

물만이 아니라

모든 것은 멈추어 있지 않고 지나간다는 사실을 새삼스레 깨닫는다.

좋은일이든 궃은일이든 우리가 겪은 것은

모두가 한때일뿐

죽지않고 살아있는 것은

세월도 그렇고 인심도 그렇고

세상만사가 다 흘러가며 변한다.

인간사도 전 생애의 과정을 보면

기쁨과 노여움 슬픔과 즐거움이 지나가는

한 때의 감정이다.

이 세상에서 고정불변한 채 영원이 지속되는것은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다.

세상일이란 내 자신이 지금 당장 겪고 있을 때는

견디기 어려울 만큼 고통스런일도

지내 놓고 보면 그때 그곳에 그 나름의 이유와

의미가 있었음을 뒤늦게 알아 차린다.

이 세상일에 원인 없는 결과가 없듯이

그 누구도 아닌 우리들 자신이 파놓은 함정에

우리 스스로 빠지게 되는 것이다.

오늘 우리가 겪는 온갖 고통과

그 고통을 이겨 내기 위한 의지적인 노력은

다른 한편 이 다음에 새로운 열매가 될것이다.

이 어려움을 어떤 방법으로 극복하는가에 따라

미래의 우리 모습은 결정된다.

 

**기도**-7-

 

수행자는 기도로써 영혼의 양식을 삼는다

기도는 인간에게 주어진 마지막 자산이다

사람의 이성과 지성을 가지고도

어떻게 할 수 없을 때 기도가 우리를 도와준다

기도는 무엇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그져 간절한 소망이다

따라서 기도에는 목소리가 아니라

진실한 마음이 담겨야 한다

진실이 담기지 않은 말은 그 울림이 없기 때문이다

누구나 자기 존재의 근원을 찾고자 하는 사람은

먼저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를 해야 한다

진정한 기도는 종교적인 의식이나 형식이 필요 없다

오로지 간절한 마음만 있으면 된다

순간순간 간절한 소망을 담은 진지한

기도가 당신의 영혼을 다스려 줄 것이다

그리고 기도에 필요한 것은 침묵이다

말은 생각을 일으키고 정신을 흩뜨려 놓는다

우주의 언어인 거룩한

그 침묵은 안과 밖이 하나가 되게 한다

어느 인도의 스승은 말하고 있다

사람의 몸에 음식이 필요하듯이

우리의 영혼에는 기도가 필요하다

기도는 하루를 여는 아침의 열쇠이고

하루를 마감하는 저녘의 빗장이다

 

**하나의 씨앗이**-8-

 

당신의 마음에 어떤 믿음이 움터 나면

그것을 가슴속 깊은 곳에

은밀히 간직해 두고 하나의 씨앗이 되게 하라.

그 씨앗이 당신 마음의 토양에서 싹트게 하여

마침내 커다란 나무로 자라도록 기도하라.

묵묵히 기도하라.

사람은 신령스런 영혼을 지니고 잇다.

우리가 거칠고 험난한 세상에서 살지라도

맑고 환한 그 영성에 귀 기울일 줄 안다면

그릇된 길에 헛눈 팔지 않을 것이다.

아무리 소중하고 귀한것일지라도

입 벌려 쏟아 버리고 나면

빈 들녘처럼 허해질 뿐이다.

어떤 생각을 가슴속 깊은 곳에 은밀히 간직해 두면

그것이 씨앗이 되어 싹이 트고 잎이 펼쳐지다가

마침내는 꽃이 피고 열매를 맺게 될 것이다.

열매를 맺지 못하는 씨앗은 쭉정이로 그칠 뿐,

하나의 씨앗이 열매를 이룰 때

그 씨앗은 세월을 뛰어넘어 새로운 씨앗으로 거듭난다.

 

**인간이라는 고독한 존재** -9-

 

꽃이나 새는 자기 자신을

남과 비교하지 않는다.

저마다 자기 특성을 마음껏 드러내면서

우주적인 조화를 이루고 있다.

남과 비교하지 않고 자기 자신의 삶에 충실할 때

그런 자기 자신과 함께 순순하게 존재할 수 있다.

사람마다 자기 그릇이 있고 몫이 있다.

그 그릇에 그 몫을 채우는 것으로

만족해야한다.

그리고 자신을 안으로 살펴야 한다.

내가 지금 순간순간 살고 있는 이 일이

인간의 삶인가,

지금 나답게 살고 있는가,

스스로 점검해야 한다.

무엇이 되어야 하고 무엇을 이룰 것인가.

스스로 물으면서

자신의 삶을 만들어 가지 않으면 안 된다.

누가 내 삶을 만들어 주는가.

내가 내 삶을 만들어 갈 뿐이다.

그런 의미에서 인간은 고독한 존재이다.

저마다 자기 그림자를 거느리고

휘적휘적 지평선 위를 걸어가고 있지 않은가

 

**하늘같은 사람**-10-

 

사람이 하늘처럼 맑아 보일 때가 있다

그때 나는 그 사람에게서 하늘 냄새를 맡는다

사람한테서 하늘 냄새를 맡아 본 적이 있는가?

스스로 하늘 냄새를 지닌 사람만이

그런 냄새를 맡을 수 있을 것이다.

인간관계에서 권태는 시간적으로나 공간적으로

늘 함께 있으면서 부딪친다고 해서 생기는 것만은 아니다

창조적인 노력을 기울여 변화를 가져오지 않고,

그저 날마다 비슷비슷하게 되풀이되는

습관적인 일상의 반복에서 삶에 녹이 스는 것이다.

아름다움을 드러내기 위해 가꾸고 다듬는 일도

무시할 수 없지만 자신의 삶에 녹이 슬지 않도록

늘 깨어 있으면서 안으로 헤아리고 높이는 일에

근본적인 노력이 뒤따라야 한다.

사람은 저마다 홀로 자기 세계를 가꾸면서

공유하는 만남이 있어야 한다

어느 시인의 표현처럼

'한 가락에 떨면서도 따로따로 떨어져 있는

거문고 줄처럼' 그런 거리를 유지해야 한다.

거문고 줄은 서로 떨어져 있기 때문에 울리는 것이지,

함께 붙어 있으면 소리를 낼 수 없다

공유하는 영역이 너무 넓으면 다시 범속에 떨어진다.

행복은 절제에 뿌리를 두고 있다

생각이나 행동에 있어서 지나친 것은 행복을 침식한다

사람끼리 만나는 일에도 이런 절제가 있어야 된다.

행복이란 말 자체가 사랑이란 표현처럼

범속한 것으로 전락한 세상이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행복이란

가슴속에 사랑을 채움으로써 오고,

신뢰와 희망으로부터 오고,

따뜻한 마음을 나누는 데서 움이 튼다.

그러므로 따뜻한 마음이 고였을 때,

그리움이 가득 넘치려고 할 때,

영혼의 향기가 배어 있을 때 친구도 만나야 한다

습관적으로 만나면 우정도 행복도 쌓이지 않는다.

혹시 이런 경험은 없는가?

텃밭에서 이슬이 내려앉은 애호박을 보았을 때,

친구한테 따서 보내주고 싶은 그런 생각을 한 적이

또는, 들길이나 산길을 거닐다가

청초하게 피어 있는 들꽃과 마주쳤을 때,

그 아름다움의 설레임을 친구에게 전해 주고 싶었던

그런 경험은 없는가?

이런 마음을 지닌 사람은

멀리 떨어져 있어도 영혼의 그림자처럼

함께할 수 있어 좋은 친구이다

좋은 친구는 인생에서 가장 큰 보배이다

친구를 통해서 삶의 바탕을 가꾸라.

 

**유서를 쓰듯이** -11-

 

혼자서 살아온 사람은 평소에도 그렇지만

남은 세월이 다할 때까지 자기 관리에 철저해야 한다.

늙어서 자기 자신에 대한 관리가 소홀하면

그 인생이 초라하게 미련이다.

꽃처럼 새롭게 피어나는 것은 젊은만이 아니다.

나이를 먹을 수록 한결같이 자신의 삶을 가꾸고

관리한다면 날마다 새롭게 피어날 수 있다.

화사한 봄의 꽃도 좋지만

늦가을 서리가 내릴 무렵에 피는

국화의 향기는 그 어느 꽃보다도 귀하다.

자기 관리를 위해 내 삶이 새로워져야겠다는

생각을 요즘 들어 자주 하게 된다.

할 수만 있다면 유서를 남기는 듯한

그런 글을 쓰고 싶다.

언제 어디서 누구에게 읽히더라도

부끄럽지 않을 삶의 진실을 담고 싶다.

 

**가난한 탁발승** -12-

 

'나는 가난한 탁발승이오.

내가 가진 거라고는 물레와 교도소에서 쓰던 밥그릇과

염소 젖 한 깡통,허름한 숄 몇 장,수건

그리고 대단치도 않은 평판,이것뿐이오.'

마하트마 간디가 1931년 9월 런던에서 열린

제2차 원탁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가던 도중

마르세유 세관원에게 소지품을 펼쳐 보이며 한 말이다.

간디 어록을 읽다가 이 구절을 보고

나는 몹시 부끄러웠다.

내가 가진 것이 너무 많다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적어도 지금의 내 분수로는 그렇다.

이 세상에 처음 태어날 때

나는 아무것도 갖고 오지 않았었다.

살 만큼 살다가 이 지상의 호적에서

사라져 갈 때에도 빈손으로 갈 것이다.

그런데 살다 보니 이것저것 내 몫이 생기게 되었다.

물론 일상에 소용되는 물건들이라고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없어서는 안 될 정도로 꼭 필요한 것들만일까?

살펴볼수록 없어도 좋을 만한 것들이 적지 않다.

 

**안으로 충만해지는 일**-13-

 

안으로 충만해지는 일은

밖으로 부자가 되는 일에 못지않게

인생의 중요한 몫이다.

인간은 안으로 충만해 질 수 있어야 한다.

아무 잡념 없이 기도를 올릴 때

자연히 마음이 넉넉해지는 것을 느낀다.

그때는 삶의 고민 같은 것이 끼어들지 않는다.

마음이 넉넉하고 충만하기 때문이다.

겉으로는 번쩍거리고 잘사는 것 같아도

정신적으로는 초라하고 궁핍하다.

크고 많은 것만을 원하기 때문에

작은 것과 적은 것에서 오는

아름다움과 살뜰함과 고마움을 잃어버렸다.

행복의 조건은 무엇인가.

아름다움과 살뜰함과 고마움에 있다.

나는 향기로운 차 한 잔을 통해

행복을 느낄 때가 있다.

내 삶의 고마움을 느낄 때가 있다.

산길을 가다가 무심히 피어 있는

한 송이 제비꽃 앞에서도

얼마든지 나는 행복 할 수 있다.

그 꽃을 통해

하루의 일용할 양식을 얻을 수 있다.

또 다정한 친구로부터 들려오는 목소리

전화 한 통을 통해서도 나는 행복해진다.

행복은 이처럼 일상적이고 사소한데 있는 것이지

크고 많은데 있지 않다.

마음이 충만한 사람은 행복하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남보다 적게 갖고 있으면서도

그 단순함 속에서 아무 부족함 없이

소박한 기쁨을 잃지 않는 사람이야말로

충만의 화신이다.

또 진정으로 삶을 살 줄 아는 사람이다.

그 어떤 어려운 상황에서도

생의 소박한 기쁨을 잃지 않는 것

그것이 바로 삶을 살 줄 아는 것이다.

그것은 모자람이 아니고 가득 참이다

 

**지금 이 순간** -14-

 

지금 이 순간을 놓치지 말라.

'나는 지금 이렇게 살고 있다'고

순간순간 자각하라.

한눈 팔지 말고, 딴 생각하지 말고,

남의 말에 속지 말고,

스스로 살펴라.

이와 같이 하는 내 말에도 얽매이지 말고

그대의 길을 가라.

이 순간을 헛되이 보내지 말라.

이런 순간들이 쌓여 한 생애를 이룬다.

너무 긴장하지 말라.

너무 긴장하면 탄력을 잃게 되고

한결같이 꾸준히 나아가기도 어렵다.

사는 일이 즐거워야 한다.

날마다 새롭게 시작하라.

묵은 수렁에서 거듭거듭 털고 일어서라.

 

**무소유의 삶**-15-

 

무소유란 아무것도 갖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다.

궁색한 빈털털이가 되는 것이 아니다.

무소유란 아무것도 갖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라

불필요한 것을 갖지 않는다는 것이다.

무소유의 진정한 의미를 이해할 때

우리는 보다 홀가분한 삶을 이룰 수 있다.

우리가 선택한 맑은 가난은

부보다 훨씬 값지고 고귀한 것이다.

이것은 소극적인 생활 태도가 아니라

지혜로운 삶의 선택이다.

만족할 줄 모르고 마음이 불안하다면

그것은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과

조화를 지루지 못하기 때문이다.

내 마음이 불안하고 늘 갈등 상태에서 만족할 줄 모른다면

그것은 내가 살고 있는 이 세상과

조화를 이루지 못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우리 주위에 있는 모든 것의 한 부분이다.

저마다 독립된 개체가 아니다.

전체의 한 부분이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세상의 한 부분이다.

세상이란 말과 사회란 말은 추상적인 용어이다.

구체적으로 살고 있는 개개인이 구체적인 사회이고 현실이다.

우리는 보이든 보이지 않든,

혈연이든 혈연이 아니든,

관계속에서 서로 얽키고설켜 이루어진다.

그것이 우리의 존재이다

 

**외로움** -16-

 

혼자 사는 사람들만

외로움을 느끼는 것은 아니다

세상 사람 누구나

자기 그림자를 이끌고 살아가고 있으며

자기 그림자를 되돌아보면

다 외롭기 마련이다

오로움을 느끼지 못한다면

그건 무딘 사람이다

너무 외로움에 젖어 있어도 문제지만

때로는 엽구리께를 스쳐 가는

마른 바람 같은 것을 통해서

자기정화, 자기삶을

맑힐 수가 있다.

따라서 가끔은 시장기 같은

외로움을 느껴야 한다

 

**존재의 집** -17-

 

말은 생각을 담는 그릇이다.

생각이 맑고 고요하면

말도 맑고 고요하게 나온다.

생각이 야비하거나 거칠면

말도 또한 야비하고

걸치게 마련이다.

그러므로 그가 하는 말로써

그의 인품을 엿볼 수 있다.

그래서 말은

존재의 집이라고 한다.

 

**영원한것은 없다**-18-

 

이 세상에서 영원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어떤 어려운 일도

어떤 즐거운 일도 영원 하지도 않다.

모두 한때이다.

한 생애를 통해 어려움만 지속된다면

누가 감내하겠는가.

다 도중에 하차하고 말 것이다.

좋은 일도 그렇다

좋은 일도 늘 지속되지 않는다

그러면 사람이 오만해진다

어려운 때일수록 낙천적인 인생관을 가져야 한다.

덜 갖고도 더 많이 존재할 수 있어야 한다

이전에는 무심히 관심같지 않던 인간관게도

더욱 살뜰이 챙겨야 한다

더 검소하고 작은 것으로써 기쁨을 느껴야 한다.

삶에서 참으로 소중 한것은

어떤 사회적인 지위나 신분, 소유물이 아니다.

우리들 자신이 누구인지 아는 일이다.

그 어느 때보다

힘든 시기를 당했을 때

"도대체 나는 누구지"?

자기 존재를 확인해야 한다.

자신이 지니고 있는 직위나 돈, 재능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어던 일을 하며 어떻게 살고 있는가에 따라

 

**내 자신이 부끄러울때**-19-

 

내 자신이 몹시 초라하고

부끄럽게 느껴질때가 있다

내가 가진것 보다 더 많은것을 갖고있는

사람 앞에 섰을때는 결코 아니다.

나 보다 훨씬 적게 가졌어도

그 단순과 간소함 속에서

삶의 기쁨과 순수성을 잃지 않는 사람 앞에

섰을 때이다.

그때 내 자신이 몹시 초라하고

가난하게 되돌아 보인다

내가 가진것 보다 더 많은것을

갖고있는 사람 앞에 섰을때

나는 기가 죽지 않는다.

내가 기가 죽을때는,

내 자신이 가난함을 느낄때는,

나 보다 훨씬 적게 갖고 있으면서도

그 단순과 간소함 속에서

여전히 당당함을 잃지않는 그런 사람을

만났을 때이다

 

**마음은하나**-20-

 

내 마음 따로 있고

네마음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마음은 하나이다

한 뿌리에서 파생된 가지가

곧 내 마음이고 당신의 마음이다

불우한 사람의 이야기을 들으면

우리가 눈물짓는 것도 그 때문이다

왜냐하면 같은 뿌리에서 나누어진

한쪽가지가 그렇게 아파하기 때문에

함께 아파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것이 마음의 울림이다

마음이 맑고 투명해야 평온과 안정을 갖는다

마음의 평화와 안정이야말로

행복과 자유에 이르는 지름길이다

 

**참된 앎**-21-

 

모든 이론은

공허하고 메마르다

그것은

참된 삶이 아니라

빌려온 지식이다

내 자신이 몸소 부딪쳐

체험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다른 무엇을 거쳐 아는 것은

모두 기억일 뿐이다

그것은 내것이 될 수 없다.

마주침일 뿐이다.

 

**친구** -22-

 

친구 사이의 만남에는 서로 영혼의 울림을

주고받을 수 있어야 한다.

너무자주 만나게 되면

어느 한 쪽이나 그 무게를 축적할

시간적 여유가 없다.

멀리 떨어져 있으면서도

마음의 그림자 처럼 함께 할 수 있는

그런 사이가 좋은 친구이다.

만남에는 그리움이 따라야 한다.

그리움이 따르지 않는 만남은

이내 시들해지기 마련이다.

진정한 친구란

두개의 육체에 깃든 하나의

영혼이라는 말이 있다.

그런 친구 사이는

공간적으로 멀리 떨어져 있을지라도

결코 멀리 있는 것이 아니다.

바로 지척에 살면서도 일체감을 함께

누릴 수 없다면

그건 진정한 친구일 수 없다

진정한 만남은 상호간의 눈뜸이다.

영혼의 진동이 없으면

그건 만남이 아니라 한 때의 마주침이다.

그런 만남을 위해서는

자기 자신을 끝없이 가꾸고 다스려야 한다.

좋은 친구를 만나려면 먼저나

자신이 좋은 친구감이 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친구란

내 부름에 대한 응답이기 때문이다

 

**녹은 그 쇠를 먹는다** -23-

 

법구경에는 이런 비유가 있다.

"녹은 쇠에서 생긴 것인데

점점 그 쇠를 먹는다."

이와 같이 마음이 그늘지면

그 사람 자신이 녹슬고 만다.

온전한 인간이 되려면

내 마음을 내가 쓸 줄 알아야 한다.

그것은 우연히 되는 것이 아니고

일상적인 인간관계를 통해서만 가능하다.

왜 우리가 서로 증오해야 한단 말인가.

우리는 같은 배를 타고 같은 방향으로

항해하는 여행자들이 아닌가.

 

**연잎의 지혜** -24-

 

빗방울이 연잎에 고이면

연잎은 한동안 물방울의 유동으로 일렁이다가

어느 만큼 고이면 수정처럼 투명한 물을

미련 없이 쏟아 버린다.

그 물이 아래 연잎에 떨어지면

거기에서 또 일렁이다가

도르르 연못으로 비워 버린다.

이런 광경을 무심히 지켜 보면서

"연잎은 자신이 감당할 만한 무게만큼 싣고 있다가

그 이상이 되면 비워 버리는구나" 하고

그 지혜에 감탄했었다.

그렇지 않고 욕심대로 받아들이면

마침내 잎이 찢기거나 줄기가 꺾이고 말 것이다.

세상 사는 이치도 이와 마찬가지이다.

 

**꽃에게서 배우라**-25-

 

풀과 나무들은

저마다 자기다운 꽃을 피우고 있다

그 누구도 닮으려고 하지 않는다

그 풀이 지닌 특성과

그 나무가 지닌 특성을 마음껏 드러내면서

눈부신 조화를 이루고 있다

풀과 나무들은

있는 그대로 그 모습을 드러내면서

생명의 신비를 꽃 피운다

자기 자신의 생각과 감정을

자신들의 분수에 맞도록 열어 보인다

진달래는 진달래답게 피면 되고

민들레는 민들레답게 피면 된다

남과 비교하면 불행해진다

이런 도리를 꽃에게서 배우라

억지로 꾸미려 하지 말라

아름다움이란 꾸며서 되는 것이 아니다

본래 모습 그대로가

그만이 지닌 특성의 아름다움이다

 

**먹의 세계**-26-

 

단순함이란 그림으로 치면

수묵화이 경지이다 .

먹으로 그린 수묵화 .

이 빛깔 저 빛깔 다 써 보다가

마지막에 가서는 먹으로 하지 않는가 .

그 먹은 한가지 빛이 아니다 .

그 속에는 모든 빛이 다 갖춰져 있다 .

또 다른 명상적인 표현으로 말하면

그것은 침묵의 세계이다

텅빈 공의 세계이다 .

법정스님이 쓰신 글이다 ..

세상도 먹의 세계 이다 ...

이것 저것 모두 색칠 해진 모습으로

우린 살아가고 있는지 도 모른다

그러나 모든 사람들은 하나의 색은 같으리라 생각한다 .

..결국 자연으로 돌아가는것은

거슬리지 못하기 떄문이다

내맘속에 있는 색을 한번 들여다 보라.

 

**삶에는 즐거움이 따라야 한다** 27-

 

삶에는 즐거움이 따라야 한다.

즐거움이 없으면 그곳에는 삶이 정착되지 않는다.

즐거움은 밖에서 누가 가져다주는 것이 아니라

긍정적인 인생관을 지니고

스스로 만들어 가야 한다.

일상적인 사소한 일을 거치면서

고마움과 기쁨을 누릴 줄 알아야 한다.

부분적인 자기가 아니라

전체적인 자기일 때,

순간순간 생기와 탄력과

삶의 건강함이 배어 나온다.

여기 비로소

홀로 사는 즐거움이 움튼다

 

**창을 바르며** 28-

 

어제는 창을 발랐다

바람기 없는 날 혼자서

창을 바르고 있으면

내마음 은 티 하나 없이 맑고 투명하다

무심의 경지가 어떻다는 것을 실감 할수있다

새로 바른 창에 맑은 햇살이 비취니

방안이 한결 정갈 하게 보인다

가을날 오후의 한때

빈방 에 홀로 앉아

새로 바른 창호에 비치는

맑고 포근한 햇살을 보고 있으면

내마음은 말할수 없이 넉넉 하다

이런 맑고 투명한 삶의 여백으로 인해 나는

새삼스레 행복해 지려고 한다

 

**스스로 행복한 사람**-29-

 

현대인의 불행은 모자람이 아니라

오히려 넘침에 있다

모자람이 채워지면

고마움과 만족함을 알지만

넘침에는 고마움과 만족이 따르지 않는다

우리가 불행한 것은

가진 것이 적어서가 아니라

따뜻한 가슴을 잃어가기 때문이다

따뜻한 가슴을 잃지 않으려면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

뿐만 아니라 동물이나 식물 등

살아 있는 생물과도 교감할 줄 알아야 한다

석창포와 자금우 화분을 햇빛을 따라 옮겨주고

물뿌리개로 물을 뿌려 주면서

그 잎과 열매에 눈길을 주고 있으면 내 가슴이 따뜻해진다

한밤중 이따금 기침을 하면서 깨어난다

창문에 달빛이 환하게 비치는 것을 보고

창문을 열었을 때

달도 희고 눈도 희고 온 천지가 흰 것을 보면 내 가슴 또한 따뜻해진다

우리가 죽지 않고 살아 있다는 사실에

고마워할 줄 알아야 한다

이 세상에 영원한 존재는 그 누구에게도,

그 어디에도 없다.

모두가 한때일 뿐이다

살아 있을 때 다른 존재들과 따뜻한 가슴을 나누어야 한다

자기 스스로 행복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행복하다

마찬가지로 자기 스스로

불행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불행하다

그러므로...

행복과 불행은 밖에서 주어진 것이 아니라

내 스스로 만들고 찾는 것이다

행복은 이웃과 함께 누려야 하고

불행은 딛고 일어서야 한다

우리는 마땅히 행복해야 한다

 

**인연과 만남** -30-

 

만남은 시절 인연이 와야 이루어진다고

선가에서는 말한다.

그 이전에 만날 수 있는

씨앗이나 요인은 다 갖추어져 있었지만

시절이 맞지 않으면 만나지 못한다.

만날 수 있는 잠재력이나 가능성을 지내고 있다가

시절 인연이 와서 비로소 만나게 된다는 것이다.

만남이란 일종의

자기 분신을 만나는 것이다.

종교적인 생각이나 빛깔을 넘어서

마음과 마음이 접촉될 때

하나의 만남이 이루어진다.

우주 자체가 하나의 마음이다.

마음이 열리면

사람과 세상과의

진정한 만남이 이루어진다.

 

**마음의 주인이 되라** -31-

 

바닷가의 조약돌을

그토록 둥글고 예쁘게 만드는 것은

무쇠로 된 정이 아니라

부드럽게 쓰다듬는 물결이다.

무엇인가를 갖는다는 것은

다른 한편 무엇인가에 얽매인다는 뜻이다.

크게 버리는 사람만이

크게 얻을 수 있다는 말이 있다.

아무것도 갖지 않을 때 비로소

온 세상을 갖게 된다는 것은

무소유의 또 다른 의미이다.

용서란

타인에게 베푸는 자비심이라기보다

흐트러지려는 나를

나 자신이 거두어 들이는 일이 아닐까 싶다.

우리들이 화를 내고 속상해 하는 것도

따지고 보면 외부의 자극에서라기보다

마음을 걷잡을 수 없는 데에

그 까닭이 있을 것이다.

정말 우리 마음이란 미묘하기 짝이 없다.

너그러울 때는 온 세상을 다 받아 들이다가

한 번 옹졸해지면 바늘 하나

꽂을 여유조차 없다.

그러한 마음을 돌이키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래서 마음에 따르지 말고

마음의 주인이 되라고

옛 사람들은 말한 것이다

 

**녹슨 삶을 두려워하라** -32-

 

이 육체라는 것은

마치 콩이 들어찬 콩깍지와 같다.

수만 가지로 겉모습은 바뀌지만

생명 그 자체는 소멸되지 않는다.

모습은 여러 가지로 바뀌나

생명 그 자체는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

생명은 우주의 영원한 진리이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근원적으로 죽음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변화하는 세계가 있을 뿐

이미 죽은 사람들은 어떻게 존재하는가.

그들은 다른 이름으로 어디선가 존재하고 있다.

따라서 원천적으로 사람을 죽일 수는 없다.

불멸의 영혼을 어떻게 죽이겠는가.

우리가 산다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기약할 수 없는 것이다.

내일 일을 누가 아는가.

이 다음 순간을 누가 아는가.

순간순간을 꽃처럼 새롭게 피어나는 습관을 들여야 한다.

매 순간을 자기 영혼을 가꾸는 일에,

자기 영혼을 맑히는 일에 쓸 수 있어야 한다.

우리 모두는 늙는다.

그리고 언젠가 자기 차례가 오면 죽는다.

그렇지만 우리가 두려워할 것은 늙음이나 죽음이 아니다.

녹슨 삶을 두려워해야 한다.

삶이 녹슬면 모든 것이 허물어진다.

 

**물 처럼 흐르라** 33-

 

사람은

언제 어디서

어떤 형태로 살든

그 속에서

물이 흐르고

꽃이

피어날 수 있어야 한다.

물이 흘러야

막히지 않고

팍팍하지 않으며,

침체되지 않는다.

물은 한 곳에 고이면,

그 생기를 잃고,

부패하기 마련이다.

강물처럼

어디에 갇히지 않고

영원히 흐를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삶의 종점에서** -34-

 

살 만큼 살다가 삶의 종점에 다다랐을 때

내게 남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

현재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은 원천적으로

내 것이 아니다

그것은 한때 맡아 가지고 있을 뿐이다

물질이든 명예든 본질적으로 내 차지일 수 없다.

내가 이곳에 잠시 머무는 동안 그림자처럼 따르는

부수적인 것들이다.

진정으로 내 것이 있다면 내가 이곳을 떠난 뒤에도

전과 다름없이 이곳에 남아 있는 것들이어야 한다.

그러니 내가 지금 가지고 있는 것은

내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한다.

내가 평소 타인에게 나눈 친절과

따듯한 마음씨로 쌓아 올린 덕행만이

시간과 장소의 벽을 넘어 오래도록

나를 이룰 것이다.

따라서 타인에게 베푼 것만이

진정으로 내 것이 될 수 있다.

옛말에 “아무 것도 가져 가지 못하고

자신이 지은 업만 따를 뿐이다’라고 한 뜻이 여기에 있다.

간디는 일찍이 이와 같이 말했다.

‘이 세상은 우리들의 필요를 위해서는 풍요롭지만

탐욕을 위해서는 궁핍한 곳이다.’

나누는 일을 이 다음으로 미루지 말라.

이 다음은 기약할 수 없는 시간이다.

 

**수행자** -35-

 

진정한 출가 수행자는

세속적인 명예나 지위에 연연하지 않는 사람이다.

그런 사람은 안으로도 얻을 것이 없고

밖으로도 구할 것이 없어,

마음은 진리에도 메이지 않는다.

밤에 꿈이 많은 사람은

그만큼 망상과 번뇌가 많다.

수행자는 가진 것이 적듯이

생각도 질박하고 단순해야 한다.

따라서 밤에 꿈이 없어야 한다.

또 수행자는 말이 없는 사람이다.

말이 많은 사람은 생각이 밖으로 흩어져

여물 기회가 없다.

침묵이 미덕이 몸에 배야 한다.

수행자는 말을 하려고 할 때

먼저 생각해 보아야 한다.

내가 하려는 이 말이

나 자신에게도 이롭고 듣는 쪽에도 이롭고,

이 말을 전해 들은 제삼자에게도

이로운 말인가를.

출가 수행자는 무엇보다 가난해야 한다.

자신의 분수와 가난의 의미를 알아야 한다.

가난 속에서 도의 마음이 우러난다.

가진 것이 많고 거느린 것이 많으면

출가의 뜻을 잃는다.

늘 깨어 있는 것이 출가 정신이라면

물질의 더미에서도 깨어나야 한다.

수행자에게 가난이란 맑음 그 자체이다.

출가 수행자는 세속의 자로 재어

가난할수록 부자다.

모자라고 텅 빈 그 속에서

넉넉한 충만감을 누릴 수 있어야 한다.

무릇 수행자는 풍부하게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풍성하게 존재하는 자이다.

수행자는 미루지 말고 그때 그때 행동해야 한다.

미루면 현재에 구멍이 뚫리고 말기 때문이다.

고독과 고립은 다르다.

수도자는 고독할 수는 있어도

고립되어서는 안 된다.

고립은 공동체와의 단절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고독에는 관계가 따르지만

고립에는 관계가 따르지 않는다.

모든 살아 있는 존재는 관계 속에서

매 순간 형성되어 간다.

절대 고독이란,

의지할 곳 없이 외로워서 흔들리는

그런 상태가 아니라

당당한 인간 실존의 모습이다.

수행자가 가는 길은

홀로 가는 길이라는 말도 있지만

홀로 있을수록 함께 있는

오묘한 도리를 체험할 수 있어야 한다.

수행자는 자기로부터 시작하라고 했지,

자기에게 그치라고 한 것이 아니다.

자기를 출발점으로 삼되

목표로 삼지는 말라는 뜻이다.

자기를 바로 알되

자기에게 사로잡히지 말라는 것이다.

우리가 산속으로 들어가 수도하는 것은

사람을 피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사람을 발견하는 방법을 배우기 위해서다.

우리가 사람들을 떠나는 것은

그들과 관계를 끊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들을 위해 최선을 다할 수 있는

그 길을 찾아내기 위해서다.

 

**말과 침묵** 36-

 

어떤 사람은

겉으로는 침묵을 지키지만

마음속으로는 남을 꾸짖는다.

그는 쉼없이 지껄이고 있는 것이나

다름이 없다.

또 어떤 사람은

아침부터 저녁까지 말을 하지만

침묵을 지킨다.

필요 없는 말은 한마디도

하지 않기 때문이다.

 

**소욕지족** -37-

 

이 세상에 태어날 때

빈손으로 왔으니

가난한들 무슨 손해가 있으며,

죽을 때 아무것도 가지고 갈 수 없으니

부유한들 무슨 이익이 되겠는가.

할 수 있으면 얻는 것보다

덜 써야 한다.

절약하지 않으면 가득 차 있어도

반드시 고갈되고,

절약하면 텅 비어 있어도

언젠가는 차게 된다.

덜 갖고도 우리는 얼마든지

행복하게 살 수 있다.

덜 갖고도 얼마든지 더 많이

존재할 수 있다.

소유와 소비 지향적인

삶의 방식에서

존재 지향적인 생활 태도로

바뀌어야 한다.

소유 지향적인 삶과 존재

지향적인 삶은 우리들 일상에

두루 깔려 있다.

거기에는 그 나름의 살아가는

기쁨이 있다.

그러나 어떤 상황에 이르렀을 때,

어느 쪽 삶이 우리가 기대어

살아갈 만한 삶이며,

가치를 부여할 수 있는 삶인가

뚜렷이 드러난다.

똑같은 조건을 두고 한쪽에서는

삶의 기쁨으로 받아들이고,

다른 한쪽에서는 근심 걱정의

원인으로 본다.

소욕지족(少欲知足)

작은 것과 적은 것으로

만족할 줄 알아야 한다.

우리가 누리는 행복은

크고 많은 것에서보다

작은 것과 적은 것 속에 있다.

크고 많은 것만을 원하면

그 욕망을 채울 길이 없다.

작은 것과 적은 것 속에

삶의 향기인 아름다움과

고마움이 스며 있다.

 

**묶이지 않은 들짐승처럼** -38-

 

수행자는 무릇 홀로이기를 원한다.

한 곳에 모여 공동체를 이루고 살면서도

저마다 은자처럼 살아간다.

서로 의지해 살면서도

거기에 매이거나 얽혀 들려고 하지 않는다.

무엇보다도 독립과 자유를 원한다.

묶여 있지 않은 들짐승이

먹이를 찾아 여기저기 숲 속을 다니듯.

독립과 자유를 찾아

혼자서 간다.

 

**수류화개** 39-

 

사람은 어떤 묵은 데 갇혀 있으면 안 된다.

꽃 처럼 늘 새롭게 피어날 수 있어야 한다.

살아 있는 꽃 이라면

어제 핀 꽃과 오늘 핀 꽃은 다르다.

새로운 향기와

새로운 빛을 발산 하기 때문이다.

일단 어딘가에 집착해

그것이 전부인 것처럼 안주하면

그 웅덩이에 갇히고 만다.

그러면 마치 고여 있는 물처럼 썩기 마련이다.

 

** 날마다 출가하라** -40-

 

나는 줄곧 혼자 살고 있다.

그러니 내가 나를 감시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수행이 가능하겠는가.

홀로 살면서도 나는 아침저녁 예불을 빼놓지 않는다.

하루를 거르면 한 달을 거르게 되게 때문이다.

그렇게 되면 삶 자체가 흐트러진다.

우리는 타성에서 벗어나야 한다.

그것은 생명이 요구하는

필수적인 과제이기 때문이다.

타성의 늪에서 떨치고 일어서는 결단이 필요하다.

저마다 자기의 일상생활이 있다.

자기의 세계가 있다.

그 일상의 삶으로부터 거듭거듭 떨쳐 버리는

출가의 정신이 필요하다.

머리를 깍고 산이나 절로 가라는 것이 아니라

비본질적인 것들을

버리고 떠나는 정신이 필요하다.

홀로 있으려면

최소한의 인내가 필요하다.

홀로 있으면 외롭다고 해서 뭔가

다른 탈출구를 칮으려는 버릇을 버려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모처럼 자기 영혼의 투명성이

고이다가 사라져 버린다.

홀로 있지 못하면 삶의 전체적인 리듬을 잃는다.

조용히 사유하는

마음을 텅 비우고 무심히 지켜보는 그런 시간이 없다면

전체적인 삶의 리듬 같은 것이 사라진다.

삶의 탄력을 잃게 된다.

 

**자신의 등뼈 외에는** -41-

 

내 소망은 단순하게 사는 일이다.

그리고 평범하게 사는 일이다.

느낌과 의지대로 자연스럽게 살고 싶다.

그 누구도, 내 삶을 대신해서 살아 줄 수 없기 때문에

나는 나답게 살고 싶다.

단순한 삶을 이루려면

더러는 홀로 있는 시간을 가져야 한다.

사람은 홀로 있을 때

단순해지고 순수해진다.

이때 명상의 문이 열린다.

사람은 본질적으로

홀로일 수밖에 없는 존재이다.

홀로 사는 사람들은 진흙에 더럽혀지지 않는

연꽃처럼 살려고 한다.

홀로 있다는 것은 어디에도 물들지 않고

순수하며 자유롭고,

부분이 아니라 전체로서 당당하게 있음이다.

인간은 누구나 어디에도 기대서는 안된다.

오로지 자신의 등뼈에 의지해야 한다.

자기 자신에, 진리에 의지해야 한다.

자신의 등뼈 외에는 어느 것에도 기대지 않는

중심 잡힌 마음이야말로

본래의 자기이다.

 

**현재의 당신** -42-

 

무슨 소리를 듣고

무엇을 먹었는가

그리고 무슨 말을 하고

어떤 생각을 했으며

한 일이 무엇인가

그것이 바로 현재의 당신이다

그리고 당신이 쌓은 업이다

이와 같이 순간 순간 당신 자신이

당신을 만들어간다.

명심하라

 

**회심** -43-

 

남을 미워하면

저쪽이 미워지는 게 아니라

내 마음이 미워진다.

부정적인 감정이나

미운 생각을 지니고 살아가면,

그 피해자는 누구도 아닌 바로 나 자신이다.

하루하루를 그렇게 살아가면

내 삶 자체가 얼룩지고 만다.

인간관계를 통해 우리는

삶을 배우고 나 자신을 닦는다.

회심(回心), 곧 마음을 돌이키는 일로써

내 삶의 의미를 심화 시켜야 한다

맺힌 것은 언젠가 풀리지 않으면 안 된다.

이번 생애에 풀리지 않으면

언제까지 지속될지 알 수 없다.

미워하는 것도 내 마음이고

좋아하는 것도 내 마음에 달린 것이다.

 

**사는것의 어려움** -44-

 

이 세상을 고해라고 한다.

고통의 바다라고. 사바 세계가 바로 그 뜻이다.

이 고해의 세상, 사바 세계를 살아가면서

모든 일이 순조롭게 풀리기만 바랄 수는 없다.

어려운 일이 생기기 마련이다.

어떤 집안을 들여다봐도 밝은 면이 있고, 어두운 면이 있다.

삶에 곤란이 없으면 자만심이 넘친다.

잘난 체하고 남의 어려운 사정을 모르게 된다.

마음이 사치해지는 것이다.

그래서 보왕삼매론은

'세상살이에 곤란이 없기를 바라지 말라'고 일깨우고 있다.

또한 '근심과 곤란이 없기를 바라지 말라고' 일깨우고 있다.

또한 '근심과 곤란으로써 세상을 살아가라'고 말한다.

자신의 근심과 걱정을 밖에서 오는 귀찮은 것으로

판단하지 말아야 한다.

그것을 삶의 과정으로 여겨야 한다.

숙제로 생각해야 한다.

자신에게 어떤 걱정과 근심거리가 있다면 회피해선 안 된다.

그걸 딛고 일어서야 한다.

어떤 의미가 있는가.

왜 이런 불행이 닥치는가.

이것을 안으로 살피고 딛고 일어서야 한다.

저마다 이 세상에 자기 짐을 지고 나온다.

그 짐마다 무게가 다르다.

누구든지 이 세상에 나온 사람은

남들이 넘겨볼 수 없는 짐을 지고 있다.

그것이 바로 그 인생이다.

세상살이에 어려움이 있다고 달아나서는 안 된다.

그 어려움을 통해 그걸 딛고 일어서라는

새로운 창의력, 의지력을 키우라는

우주의 소식을 받아들여야 한다.

 

**그리운 사람** -45-

 

살아있는 영혼끼리

시간과 공간을 함께 함으로써

서로가 생명의 환희를 누리는 일을

'만남' 이라고 한다면,

생명의 환희가 따르지 않는 접촉은

'마주침' 이지 만남이 될 수 없다.

우리가 진정으로 만나야 할 사람은

그리운 사람이다.

한 시인의 표현처럼

'그대가 곁에 있어도 그대가 그립다'는

그런 사람이다.

곁에 있으나 떨어져 있으나

그리움의 물결이 출렁거리는

그런 사람과는 때때로 만나야 한다.

그리워하면서도 만날 수 없으면

삶에 그늘이 진다.

그리움이 따르지 않는 만남은

지극히 사무적인 마주침이거나

일상적인 스치고 지나감이다.

마주침과 스치고 지나감에는

영혼의 메아리가 없다.

영혼의 메아리가 없으면

만나도 만난 것이 아니다.

 

**빈 마음** -46-

 

등잔에 기름을 가득 채웠더니

심지를 줄여도

자꾸만 불꽃이 올라와 펄럭거린다.

가득 찬 것은 덜 찬 것만 못하다는 교훈을

눈앞에서 배우고 있다.

빈 마음, 그것을 무심이라고 한다.

빈 마음이 곧

우리들의 본 마음이다.

무엇인가 채워져 있으면

본 마음이 아니다.

텅 비우고 있어야 거기 울림이 있다.

울림이 있어야 삶이 신선하고 활기차다.

 

**귀 기울여 듣는다는 것** -47-

 

귀 기울여 듣는다는 것은

침묵을 익힌다는 말이다.

침묵은

자기 내면의 바다이다.

진실한 말은

내면의 바다에서 자란다

자신만의 언어를 갖지 못하고

남의 말만 열심히 흉내 내는

오늘의 우리는 무엇인가.

듣는다는 것은

바깥 것을 매개로

자기 안에 자들어 있는 소리를

깨우는 일이다.

귀 기울여 들을 줄 아는 사람은

그 말에서 자기 존재를 발견한다.

그러나 자기 말만을 내세우는 사람은

자기 자신을 잊어버리기 일쑤다.

이런 구절이 있다.

'별들이 우리에게 들려준 이야기를 남한테 전하려면

그것에 필요한 말이 우리 안에서 먼저 자라야 한다.'

말이 되기까지는 우리들 안에서

씨앗처럼 자라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무엇인가를 듣는다는 것은

자기 것을 비우기 위해

침묵을 익히는 기간이다.

 

**나무 꺽이는 소리** -48-

 

산에 살다 보면 누구나 다 아는 일이지만

겨울철이면 나무들이 많이 꺽인다.

모진 비바람에도 끄떡 않던 아름드리 나무들이,

꿋꿋하게 고집스럽기만 하던 그 소나무들이

눈이 내려 덮이면 꺽이게 된다.

가지끝에 사뿐사뿐 내려 쌓이는

그 가볍고 하얀 눈에 꺽이고 마는 것이다.

깊은 밤, 이 골짝 저 골짝에서

나무들이 꺽이는 메아리가 울려올 때

나는 잠을 이룰 수 없다.

정정한 나무들이 부드러운 것 앞에서는 넘어지는

그 의미 때문일까.

산은 한겨울이 지나면

앓고 난 얼굴처럼 수척하다

 

**누구와 함께** -49-

 

나는 이 산중에서 누구와 함께 자리를

같이하는가 스스로 물어본다.

사람은 나 하나만으로도 충분하므로

사람과 자리를 같이할 일은 없다.

맑은 바람과 맑은 달과 흰 구름,

시냇물은 산을 이루고 있는 배경이므로

자리를 같이하고 안 하고의 문제가 아니다.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피부로 느끼고,

가슴으로 받아들이면 된다.

누구와 함께 자리를 같이할 것인가.

살아 있는 것들은 끼리끼리 어울린다.

그러니 자리를 같이하는 그 상대가

자신의 한 분심임을 알아야 한다.

그대는 누구와 함께 자리를 같이하는가

 

**다 행복하라** 50-

 

며칠동안 눈이펑펑쏟아져 길이막힐때

오도가도 못하고 혼자서 적막강산에서 갇혀있을때

나는 새삼스럽게 홀로살아 있음을 누리면서

순수한 내 자신이되어

둘레의 사물과 일체감을나눈다

그리고 눈이 멎어 달이 얼굴을 내보일때

월백설백천지백(月白雪白天地白)의 그 황홀경계에

나는 숨을 죽인다.

살아있는

모든 이웃들이 다

행복하라.

태평하라,

안락하라

 

** 소유한다는 것은 ** -51-

 

무엇인가를 소유한다는 것은

한편으로는 소유를 당하는 것이며

무엇인가에 얽매인다는 뜻이다

무엇인가를 가질 때

우리의 정신은 그만큼 부자유해지며

타인에게 시기심과 질투와 대립을 불러일으킨다

적게 가질수록 더욱 사랑할 수 있다

어느 날인가는 적게 가진 그것마저도

다 버리고 갈 우리 처지가 아닌가?

소유한 것을 버리고

모든 속박에서 그대 자신을 해방시키라

그리고 존재하라

인간의 목표는

풍부하게 소유하는 것이 아니고

풍성하게 존재하는 것이다

크게 버리는 사람만이

크게 얻을 수 있다는 말이다

아무것도 갖지 않을 때

비로소 온 세상을 갖게 된다는 것은

무소유의 또 다른 의미이다

소유물은 우리가 그것을 소유하는 이상으로

우리 자신을 소유해 버린다

그러므로 필요에 따라 살아야지

욕망에 따라 살지 말아야 한다

욕망과 필요의 차이를 구별할 수 있어야 한다

 

**바람은 왜 부는가** -52-

 

바람은 왜 부는가.

어디서 와서 또 어디로 가는가.

기압의 변화로 인해서 일어나는 대기의 흐름인 바람은

움직임으로써 살아 있는 기능을 한다.

움직임이 없으면 그건 바람일 수 없다.

움직이는 것이 어디 바람뿐이겠는가.

살아 있는 모든 것은 그 나름으로 움직이고 흐른다.

강물이 흐르고 바다가 출렁이는 것도

살아 있기 때문이다.

묵묵히 서 있는 나무들도 움직이면서

안으로 끊임없이 수액을 돌게 한다.

해가 뜨고 지는 거나 달이 찼다가 기우는 것도,

해와 달이 살아 있어 그런 작용을 한다.

우주의 호홉과 같은 이런 움직임과 흐름이 없다면

인간 또한 살아갈 수 없다.

멈춤과 고정됨은 곧 죽음을 뜻한다.

그러므로 살아 있고자 한다면

그 움직임과 흐름을 거부하지 말고

받아들여야 한다.

모든 것은 변화를 거치면서 살아 움직인다.

하나의 극에서 다른 극으로 움직이면서 변화한다.

이런 변화와 움직임을 통해

새롭고 신선한 삶을 이룰 수 있다.

 

**인간의 봄** -53-

 

산에서 살아 보면 누구나 아는 일이지만

겨울철이면 나무들이 많이 꺽이고 만다.

모진 비바람에도 끄덕 않던 아름드리 나무들이

꿋꿋하게 고집스럽기만 하던 그 소나무들이

눈이 내려 덮이면 꺽이게 된다.

깊은 밤 이 골짜기 저 골짜기에서

나무들이 꺽이는 메아리가 울려올 때

우리들은 잠을 이룰 수가 없다.

정정한 나무들이

부드러운 것에 넘어지는 그 의미 때문일까

산은 한겨울이 지나면 앓고 난 얼굴처럼 수척하다.

자연의 질서는 어김 없이 찾아 온다.

얼어붙은 대지에 다시 봄이 움트고 있다.

겨울 동안 죽은 듯 잠잠하던 숲이

새소리에 실려 조금씩 깨어나고 있다.

우리들 안에서도 새로운 봄이 움틀 수 있어야 한다.

다음으로 미루는 버릇과

일상의 늪에서 허우적거리는 그 타성에서 벗어나

새로운 시작이 있어야 한다.

인간의 봄은 어디서 오는가?

묵은 버릇을 떨쳐버리고

새로운 시작에서 새 움이 트는 것이다.

 

**마음의 바탕** -54-

 

사람 마음의 바탕은 선도 악도 아니다

선과 악은 인연에 따라 일어날 뿐

선한 인연을 만나면 마음이 선해지고

나쁜 인연을 만나면 마음이 약해진다

안개 속에 있으면

자신도 모르게 옷이 젖듯이...

 

**흙 가까이** -55-

 

서산에 해 기울어 산그늘이 내릴 무렵

훨훨 벗어부치고 맨발로 채소밭에 들어가

김 매는 일이 요즘 오두막의 해질녘 일과이다.

맨발로 밭 흙을 밟는 그 감촉을 무엇에 비기랴.

흙을 가까이 하는 것은

살아 있는 우주의 기운을 받아들이는 일이다.

흙을 가까이 하라.

흙에서 생명의 싹이 움튼다.

흙을 가까이 하라.

나약하고 관념적인 도시의 사막에서 벗어날 수 있다.

흙을 가까이 해야

삶의 뿌리를 든든한 대지에 내릴 수 있다.

우리에게 대지는 영원한 모성,

흙에서 음식물을 길러내고

그 위에다 집을 짓는다.

그 위를 직립보행하면서 살다가

마침내는 그 흙에 누워 삭아지고 마는 것이

우리들 삶의 방식이다.

흙은 우리들 생명의 젖줄일 뿐 아니라

우리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 준다.

씨앗을 뿌리면 움이 트고

잎과 가지가 펼쳐져 거기 꽃과 열매가 맺힌다.

생명의 발아 현상을 통해

불가시적인 영역에도 눈을 뜨게 한다.

그렇기 때문에 흙을 가까이 하면

흙의 덕을 배워 순박하고 겸허해지며,

믿고 기다릴 줄을 안다.

흙에는 거짓이 없고,

추월과 무질서도 없다.

시멘트와 철근과 아스팔트에서는

생명이 움틀 수 없다.

비가 내리는 자연의 소리마저

도시는 거부한다.

그러나 흙은 비를, 그 소리를 받아들인다.

흙에 내리는 빗소리를 듣고 있으면

인간의 마음은 고향에 돌아온 것처럼

정결해지고 평온해진다.

어디 그뿐인가.

구두와 양말을 벗어버리고

일구어 놓은 밭 흙을 맨발로 감촉해보라.

그리고 흙냄새를 맡아보라.

그것은 순수한 생의 기쁨이 될 것이다.

 

**긍정으로 향하는 부정** 56-

 

인정이 많으면 도심(道心)이 성글다는

옛 선사들의 말을 빌릴 것도 없이

집착은 우리를 부자유하게 만든다.

해탈이란 온갖 얽힘으로부터 벗어난

자유자재의 경지를 말한다.

그런데 그 얽힘의 원인은 다른 데 있지 않고

집착에 있다.

물건에 대한 집착보다도 인정에 의한 집착은

몇 곱절 더 질기다.

출가는 그러한 집착의 집에서 떠남을 뜻한다.

그렇기 때문에 출가한 수행자들은

어느 면으로 보면 비정하리만큼 금속성에 가깝다.

그러나 그러한 냉기는 어디까지나

긍정의 열기로 향하는 부정의 단계이다.

긍정의 지평에 선 보살의 자비는

봄볕처럼 따사롭다.

 

**산** 57-

 

산을 건성으로 바라보고 있으면

산은 그저 산일 뿐이다,

그러나 마음을 활짝 열고

산을 진정으로 바라보면

우리 자신도 문득 산이 된다,

내가 정신없이 분주하게 살 때에는

저만치서 산이 나를 보고 있지만

내 마음이 그윽하고 한가할 때는

내가 산을 바라본다.

 

** 다시 길 떠나며** -58-

 

이 봄에 나는 또 길을 찾아 나서야겠다.

이곳에 옮겨와 살 만큼 살았으니

이제는 새로운 자리로 옮겨 볼 생각이다.

수행자가 한 곳에 오래 머물면

안일과 타성의 늪에 갇혀 시들게 된다.

다시 또 서툴게 처음부터 시작하는 것이다.

영원한 아마추어로서 새 길을 가고 싶다.

묵은 것을 버리지 않고는

새것을 받아들일 수 없다.

이미 알려진 것들에서 자유로워져야

새로운 것을 찾아낼 수 있다.

내 자신만이 내 삶을 만들어 가는 것이지

그 누구도 내 삶을 만들어 주지 않는다.

나는 보다 더 단순하고 소박하게,

그리고 없는 듯이 살고 싶다.

나는 아무것도,

그 어떤 사람도 되고 싶지 않다.

그저 나 자신이고 싶다.

나는 내 삶을

그 누구의 간섭도 받지 않고,

그 누구도 닮지 않으면서

내 식대로 살고자 한다.

자기 식대로 살려면

투철한 개인의 질서가 전제되어야 한다.

그 질서에는 게으르지 않음과

검소한 단순함과

이웃에게 해를 끼치지 않음도 포함된다.

그리고 때로는 높이높이 솟아오르고

때로는 깊이깊이 잠기는

그 같은 삶의 리듬도 뒤따라야 한다.

 

**존재 지향적인 삶** -59-

 

삶을 마치 소유물처럼 생각하기 때문에

우리는 그 소멸을 두려워한다.

삶은 소유물이 아니라

순간순간의 있음이다.

영원한 것이 이 세상에 어디 있는가.

모두가 한때일 뿐,

그러나 그 한때를 최선을 다해

최대한으로 살 수 있어야 한다.

삶은 놀라운 신비요, 아름다움이다.

내일을 걱정하고 불안해하는 것은

이미 오늘을 제대로 살고 있지 않다는 증거이다.

오늘을 마음껏 살고 있다면

내일의 걱정 근심을

가불해 쓸 이유가 어디 있는가.

죽음을 두려워하고 무서워하는 것은

생에 집착하고 삶을 소유로 여기기 때문이다.

생에 대한 집착과 소유의 관념에서 놓여날 수 있다면

엄연한 우주 질서 앞에 조금도 두려워할 것이 없다.

새롭게 시작하기 위해 묵은 허물을 벗어 버리는 것이므로.

물소리에 귀를 모으라.

그것은 우주의 맥박이고 세월이 흘러가는 소리다.

우리가 살 만큼 살다가

갈 곳이 어디인가를 깨우쳐 주는

소리 없는 소리다.

 

**가을은 이상한 계절** -60-

 

가을은 참 이상한 계절이다.

조금 차분해진 마음으로 오던 길을 되돌아볼 때,

푸른 하늘 아래서

시름시름 앓고 있는 나무들을 바라볼 때,

산다는 게 뭘까 하고 문득 혼자서 중얼거릴 때,

나는 새삼스레 착해지려고 한다.

나뭇잎처럼 우리들의 마음도 엷은 우수에 물들어 간다.

가을은 그런 계절인 모양이다.

그래서 집으로 돌아가는 버스 안의 대중가요에도,

속이 빤히 들여다보이는 그런 가사 하나에도

곧잘 귀를 모은다.

지금은 어느 하늘 아래서 무슨 일을 하고 있을까.

멀리 떠나 있는 사람의 안부가 궁금해진다.

깊은 밤 등불 아래서 주소록을 펼쳐 들고

친구들의 눈매를, 그 음성을 기억해 낸다.

가을은 그런 계절인 모양이다.

한낮에는 아무리 의젓하고 뻣뻣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해가 기운 다음에는 가랑잎 구르는 소리 하나에,

귀뚜라미 우는 소리 하나에도 마음을 여는

연약한 존재임을 세삼스레 알아차린다.

만나는 사람마다 따뜻한 눈길을 보내 주고 싶다.

한 사람 한 사람 그 얼굴을 익혀 두고 싶다.

이 다음 세상 어느 길목에선가 우연히 서로 마주칠 때,

오, 아무개 아닌가 하고

정답게 손을 마주 잡을 수 있도록

지금 이 자리에서 익혀 두고 싶다.

이 가을에 나는 모든 이웃들을 사랑해 주고 싶다.

단 한사람이라도 서운하게 해서는 안 될 것 같다.

가을은 정말 이상한 계절이다.

 

**나무처럼** -61-

 

새싹을 틔우고

잎을 펼치고

열매를 맺고

그러다가 때가 오면 훨훨 벗어 버리고

빈 몸으로 겨울 하늘 아래

당당하게 서 있는 나무.

새들이 날아와 팔이나 품에 안겨도

그저 무심할 수 있고,

폭풍우가 휘몰아쳐 가지 하나쯤 꺾여도

끄떡없는 요지부동.

곁에서 꽃을 피우는 꽃나무가 있어

나비와 벌들이 찾아가는 것을 볼지라도

시샘할 줄 모르는 의연하고 담담한 나무.

한여름이면 발치에 서늘한 그늘을 드리워

지나가는 나그네들을 쉬어 가게 하면서도

아무런 대가도 바라지 않는

덕을 지닌 나무...

나무처럼 살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이것저것 복잡한 분별없이

단순하고 담백하고 무심히

살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산에 사는 산사람** -62-

1.

우리가 산을 찾는 것은

산이

거기 그렇게

있기 때문이 아니다.

그 산에

푸른 젊음이 있어

우리에게 손짓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때 묻지 않은 사람과

때 묻지 않은 자연이

커다란 조화를 이루면서

끝없는 생명의 빛을

발산하고 있기 때문이다.

살고 싶다.

그런 산에 돌아가

살고 싶다.

2.

우리처럼 한평생 산을 의지하고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산은 단순한 자연이 아니다.

산은 곧 커다란 생명체요,

시들지 않는 영원한 품속이다.

산에는 꽃이 피고 지는 일만이 아니라

거기에는 시가 있고,

음악이 있고, 사상이 있고, 종교가 있다.

인류의 위대한 사상이나 종교가

벽돌과 시멘트로 된 교실에서가 아니라,

때 묻지 않은 자연의 숲 속에서 움텄다는 사실을

우리는 상기할 필요가 있다.

3.

산에서 사는 사람들이

산에 대한 향수를 지니고 있다면

속 모르는 남들은 웃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산승들은 누구보다도

산으로 내닫는 진한 향수를 지닌다.

산에는 높이 솟은 봉우리만이 아니라

깊은 골짜기도 있다.

나무와 바위와 시냇물과

온갖 새들이며 짐승, 안개, 구름, 바람, 산울림.

이 밖에도 무수한 것들이 한데 어울려

하나의 산을 이루고 있는 것이다.

산은 사계절을 두고 늘 새롭다.

그 중에도 여름이 지나간 가을철 산은

영원한 나그네인 우리들을

설레게 한다.

4.

인적이 미치지 않는 심산에서는

거울이 필요 없다.

둘레의 모든 것이 내 얼굴이요,

모습일 테니까.

달력도 필요 없다.

시간 밖에서 살 테니까.

혼자이기 때문에 아무도 나를 얽어매지 못할 것이다.

홀로 있다는 것은 순수한 내가 있는 것.

자유는 홀로 있음을 뜻한다

 

**큰 거울** -63-

 

평등한 성품에는 나와 남이 없고

큰 거울에는

멀고 가까움이 없다.

그 평등한 성품과

큰 거울은 어디에서 찾아야 할 것인가.

남의 말에 귀 기울이거나

밖으로 헛눈 팔지 않고,

자기 자신을 투철히 관찰할 때

평등한 성품과

그 큰 거울은 저절로 드러난다.

 

**무학** -64-

 

인간의 탈을 쓴 인형은 많아도

인간다운 인간이 적은 현실 앞에서

지식인이 할 일은 무엇인가,

무기력하고 나약하기만 한 그 인형의 집에서 나오지 않고서는

어떤 일도 할 수 없다.

무학無學이란 말이 있다.

전혀 배움이 없거나 배우지 않았다는 뜻이 아니다.

많이 배웠으면서도 배운 자취가 없음을 가리킴이다.

학문이나 지식을 코에 걸지 말고

지식 과잉에서 오는 관념을 경계하라는 뜻이다.

지식이나 정보에 얽매이지 않은

자유롭고 생기 넘치는 삶이 소중하다는 말이다.

지식이 인격과 단절될 때

그 지식인은 가짜요, 위선자이다.

우리는 인형이 아니라

살아 움직이는 인간이다.

우리는 끌려가는 짐승이 아니라

신념을 가지고 당당하게 살아야 할 인간이다

 

**명상에 이르는 길** -65-

1

사람의 마음은 그 어디에도 얽매임 없이

순수하게 집중하고 몰입할 때

저절로 평온해지고 맑고 투명해진다.

먹고, 마시고, 놀고, 자고, 배우고, 익히는 것과 마찬가지로

명상은 우리들 삶의 일부분이다.

명상은 안팎으로 지켜보는 일이다.

자신 안에서 일어나는 감정의 변화와 언어와 동작,

생활 습관들을 낱낱이 지켜보는 일이다.

흘러가는 강물을

강둑 위에서 묵묵히 바라보듯이

그저 지켜볼 뿐이다.

명상은 소리 없는 음악과 같다.

그것은 관찰자가 사라진 커다란 침묵이다.

그리고 명상은 늘 새롭다.

명상은 연속성을 갖지 않기 때문에

지나가 버린 세월이 끼어들 수 없다.

같은 초이면서도 새로 켠 촛불은

그 전의 촛불이 아닌 것처럼

어제 했던 명상은 오늘의 명상과 같지 않다.

명상은 흐르는 강물처럼 늘 새롭다.

나는 어떤 존재인가?

침묵 속에 묻고 또 물어야 한다.

해답은 그 물음 속에 있다.

때때로 자기 자신을 들여다보는 일이 없다면

마음은 황무지가 되고 말 것이다.

명상하라, 그 힘으로 삶을 다지라.

2

명상은 마음을 열고

귀 기울이고 바라봄이다.

이 생각 저 생각으로 들끓는 번뇌를 내려놓고,

빛과 소리에 무심히 마음을 열고 있으면

잔잔한 평안과 기쁨이 그 안에 있다.

깨달음은 어디서 오는가.

그것은 밖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안에서 꽃피어남이다.

지적 호기심의 차원에서 벗어나

영적 탐구의 차원으로 심화됨이 없다면

깨달음은 결코 꽃피어나지 않는다.

진정한 앎은 말 이전의 침묵에서

그 움이 튼다.

밖에서 찾으려고 하지 말라.

만물이 살아서 움트는 이 봄철에

저마다 자기 내면의 소리에 귀 기울일 일이다.

그 귀 기울임에서 새로운 삶을 열어야 한다.

 

**있을 자리** -66-

 

산중에 있는 어떤 절에 갔더니

한 스님 방에 이름 있는 화가의

산수화가 걸려 있었다.

아주 뛰어난 그림이었다.

그러나 주인과 벽을 잘못 만나

그 그림은 빛을 발하지 못하고 있었다.

천연 산수가 있는 산중이기 때문에

그 산수를 모방한 그림이 기를 펴지

못한 것이다.

그런 산수화는

자연과 떨어진 도시에 있어야 어울리고

그런 곳에서만 빛을 발할 수 있다.

모든 것은

있을 자리에 있어야

살아서 숨쉰다.

 

**살때와 죽을때** -67-

 

살 때는 그 삶에 철저해

그 전부를 살아야 하고,

죽을 때는 그 죽음에 철저해

그 전부를 죽어야 한다.

삶에 철저할 때는 털끝만치도

죽음을 생각할 필요가 없다.

또한 일단 죽게 되면 조금도

삶에 미련을 두어서는 안 된다.

사는 것도 내 자신의 일이고

죽는 것도 내 자신의 일이니,

살 때는 철저히 살고

죽을 때는 철저히 죽을 수 있어야 한다.

꽃은 필때도 이름다워야 하지만

질 때도 아름다워야 한다.

모란처럼 뚝뚝 떨어져 내릴 수 있는 것이

얼마나 산뜻한 낙화인가!

새잎이 파랗게 돋아나도록

질줄 모르고 매달려 있는 꽃은

필때 만큼 아름답지 않다.

생과 사를 물을 것 없이

그때그때 자기의 삶에 최선을 다하는 것,

그것이 인생의 생사관이다.

우리가 순간순간 산다는 것은

한편으로는 순간순간 죽어가는 것이다.

현자는 삶에 대하여 생각하고,

죽음에 대하여는 생각하지 않는다.

 

**어디에도 물들지 않는 ** -68-

 

지켜보라

허리를 꼿꼿이 펴고 조용히 앉아

끝없이 움직이는 생각을.

그 생각을 없애려고 하지도 말라.

그것은 또 다른 생각이고 망상일 뿐.

그저 지켜보기만 하라.

지켜보는 사람은

언덕 위에서 골짜기를 내려다보듯

그 대상으로부터 초월해 있다.

지켜보는 동안은

이렇다 저렇다 조금도 판단하지 말라.

강물이 흘러가듯 그렇게 지켜보라.

그리고 받아들이라.

어느 것 하나 거역하지 말고 모든 것을 받아들이라.

그 받아들임 안에서 어디에도 물들지 않는

본래의 자기 자신과 마주하라.

 

**그는 누구인가** -69-

 

내 뒤에서

언제나 나를 지켜보는 눈이 있다.

시작도 끝도 없는 아득한 세월을 두고

밤이나 낮이나 나를 낱낱이 지켜보는

눈이 있다.

그는 누구인가?

언어의 틀에 갇히지 말고,

그가 누구인지 깊이깊이 살펴보라.

나를 지켜보는 그와 떨어져 있지 말고

그와 하나가 되라.

그러면 삶이 매 순간 새로워질 것이다.

무심코 하는 말이든 뜻을 담은 말이든

듣는 귀가 바로 곁에 있다.

그것을 신이라 이름 부를 수도 있고

영혼이라 부를 수도 있고

불성이라 할 수도 있다.

그 사람이 하는 말은 곧

그 사람의 속 뜰을 열어 보임이다.

일상에 때 묻고 닮은 자기 자신을

그 어느 때 그 무엇으로 회복할 것인가.

입 다물고 귀 기울이는 습관을 익히라.

 

**단 한 번 만나는 인연** -70-

 

차의 세계에 일기일회(一期一會)란 말이 있다.

일생에 단 한 번 만나는 인연이라는 뜻이다.

개인의 생애로 볼 때도

이 사람과 이 한 때를 갖는 이것이

생애에서 단 한 번의 기회라고 여긴다면

순간순간을 뜻 깊게 보내지 않을 수 없다.

앞으로 몇 번이고 만날 수 있다면

범속해지기 쉽지만,

이것이 처음이면서 마지막이라고 생각할 때

아무렇게나 스치고 지나칠 수 없다.

기회란 늘 있는 것이 아니다.

한 번 놓치면 다시 돌이키기 어렵다.

 

**용서** -71-

 

용서는 가장 큰 수행이다

남을 용서함으로써

나 자신이 용서 받는다

날마다 새로운 날이다

묵은 수렁에 갇혀

새날을 등지면 안 된다

맺힌 것을 풀고

자유로워지면

세상 문도 활짝 열린다

 

**원한의 칼** -72-

 

우주 자체가

하나의 커다란 생명체이다

우리는 서로서로 때문에 존재한다,

서로가 서로의 한 부분이다

증오라는 원한의 칼로 남을 해치려고 한다면

그 칼이 자기 자신을 먼저 찌르지 않고는

맞은편에 닿을 수 없다

 

** 개체와 전체 ** -73-

 

생명을 존중하는 마음은

하나의 느낌이나 자세가 아니다.

그것은 온전한 삶의 방식이고,

우리 자신과 우리 둘레의 수많은 생명체들에 대한

인간의 신성한 의무이다.

삶의 기본적인 원리는

남을 해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에는 나쁜 사람뿐 아니라

온갖 생명이 포함된다.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존재는

그 자신의 방법으로

그 자신의 삶을 살아갈 권리가 있다.

그렇기 때문에 나만의 편의나 이익을 위해

남을 간섭하고 통제하고 지배해서는 안 된다.

개체와 전체의 관계는

조화와 균형으로 이루어질 때 가장 바람직하다.

이 조화와 균형이 깨지면 이변이 생긴다.

인간과 자연 사이에 조화와 균형이 무너져

오늘날의 지구는 온갖 환경 재난에 시달리고 있다.

 

**오해 ** -74-

 

세상에서 대인관계처럼

복잡하고 미묘한 일이 또 있을까.

까딱 잘못하면 남의 입살에 오르내려야 하고,

때로는 이쪽 생각과는 엉뚱하게 다른 오해도 받아야 한다.

그러면서도 이웃에게 자신을 이해시키고자

일상의 우리는 한가롭지 못하다.

이해란 정말 가능한 걸까.

사랑하는 사람들은 서로가 상대방을 이해하노라고

입술에 침을 바른다.

그리고 그러한 순간에서 영원을 살고 싶어 한다.

그러나 그 이해가 진실한 것이라면 항상 불변해야 할 텐데

번번이 오해의 구렁으로 떨어진다.

나는 당신을 이해합니다라는 말은

어디까지나 언론 자유에 속한다.

남이 나를, 또한 내가 남을

어떻게 온전히 이해할 수 있단 말인가.

그저 이해하고 싶을 뿐이지.

그래서 우리는 모두가 타인이다.

사람은 저마다

자기중심적인 고정 관념을 지니고 살게 마련이다.

그러기 때문에 어떤 사물에 대한 이해도

따지고 보면 그 관념의 신축 작용에 지나지 않는다.

하나의 현상을 가지고

이러쿵저러쿵 말이 많은 걸 봐도

저마다 자기 나름의 이해를 하고 있기 때문이다.

'자기 나름의 이해'란 곧 오해의 발판이다.

우리는 하나의 색맹에 불과한 존재다.

그런데 세상에는 그 색맹이

또 다른 색맹을 향해 이해해 주지 않는다고 안달이다.

연인들은 자기만이 상대방을 속속들이 이해하려는 열기로 하여

오해의 안개 속을 헤매게 된다.

그러고 보면 사랑한다는 것은 이해가 아니라

상상의 날개에 편승한 찬란한 오해다.

"나는 당신을 죽도록 사랑합니다"라는 말의 정체는

"나는 당신을 죽도록 오해합니다"일지도 모른다.

언젠가 이런 일이 있었다.

불교 종단 기관지에 무슨 글을 썼더니

한 사무승이 내 안면 신경이 간지럽도록

할렐루야를 연발하는 것이었다.

그때 나는 속으로 이렇게 뇌고 있었다.

‘자네는 날 오해하고 있군.

자네가 날 어떻게 안단 말인가.

만약 자네 비위에 거슬리는 일이라도 있게 되면,

지금 칭찬하던 바로바로 그 입으로 나를 또 헐뜯을 텐데.

그만 두게 그만 둬.’

아니나 다를까,

바로 그 다음 호에 실린 글을 보고서는

입에 게거품을 물어 가며 죽일 놈 살릴 놈 이빨을 드러냈다.

속으로 웃을 수밖에 없었다.

‘거보라고, 내가 뭐랬어.

그게 오해라고 하지 않았어.

그건 말짱 오해였다니까.’

누가 나를 추켜세운다고 해서 우쭐댈 것도 없고

헐뜯는다고 해서 화를 낼 일도 못된다.

그건 모두가 한쪽만을 보고 성급하게 판단한

오해이기 때문이다.

오해란 이해 이전의 상태 아닌가.

문제는 내가 지금 어떻게 살고 있느냐에 달린 것이다.

실상은 말밖에 있는 것이고

진리는 누가 뭐라 하건 흔들리지 않는다.

온전한 이해는 그 어떤 관념에서가 아니라

지혜의 눈을 통해서만 가능할 것이다.

그 이전에는 모두가 오해일 뿐이다.

나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무슨 말씀, 그건 말짱 오해라니까

 

**묵은해와 새해 ** -75

 

누가 물었다.

스님은 다가올 미래에 대해서

어떤 기대를 가지고 있느냐고.

나는 대답했다.

나는 오늘을 살고 있을 뿐

미래에는 관심이 없다.'

우리는 바로 지금 이 자리에서

이렇게 살고 있다.

바로 지금이지

그때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이 다음 순간을, 내일 일을

누가 알 수 있는가.

학명 선사는 읊었다.

묵은해니 새해니 분별하지 말라.

겨울 가고 봄이 오니 해 바뀐 듯하지만

보라, 저 하늘이 달라졌는가

우리가 어리석어 꿈속에 사네

 

**빈 들녘처럼** -76-

 

겨울은 우리 모두를 뿌리로 돌아가게 하는 계절.

시끄럽고 소란스럽던 날들을 잠재우고

침묵의 의미를 되새기게 하는 계절.

그동안 걸쳤던 얼마쯤의 허세와 위선의 탈을 벗어 버리고

자신의 분수와 속얼굴을 들여다보는 계절이다.

이제는 침묵에 귀를 기울일 때이다.

소리에 찌든 우리들의 의식을

소리의 뒤안길을 거닐게 함으로써

오염에서 헤어나게 해야 한다.

저 수목들의 빈가지처럼

허공에 귀를 열어 소리 없는 소리를 들어야 한다.

겨울의 빈들녘처럼

우리들의 의식을 텅 비울 필요가 있다.

 

**최초의 한생각** -77-

 

명상은 조용히 지켜보는 일이다.

사물의 실상을 지켜보고 내면의 흐름을

생각의 실상을 고요히 지켜보는 일이다.

보리 달마는 "마음을 살피는 한가지 일이 모든 현상을

거두어 들인다" 고 했다.

지식은 기억으로 부터 온다.

그러나 지혜는 명상으로 부터 온다.

지식은 밖에서 오지만 지혜는 안에서 움튼다.

안으로 마음의 흐름을 살피는 일

이것을 일과 삼아야 한다.

모든것이 최초의 한 생각에서 싹튼다.

 

**깨달음의 길 ** -78-

 

깨달음에 이르는 데는 오직

두 길이 있다.

하나는 지혜의 길이고

다른 하나는 자비의 길이다.

하나는 자기 자신을 속속들이 지켜보면서

삶을 매 순간 개선하고 심화시켜 가는 명상의 길이고,

다른 하나는 이웃에 대한 사랑의 실천이다.

이 지혜와 자비의 길을 통해 우리가

이 세상에 태어날 때부터 지녀 온

불성과 영성의 씨앗이

맑고 향기롭게 꽃피어난다.

본래 청정한 우리 마음을

명상과 나눔으로 맑혀야 한다.

사랑이 우리 가슴속에 싹트는 순간

우리는 다시 태어난다.

이것이 진정한 탄생이고 부활이다.

세상이란 무엇인가.

바로 우리의 얼굴이고, 우리 삶의 터전이다.

우리가 마음의 수양을 하고 개인의 수행을 한다는 것은 결국

자기로부터 시작해서 세상에 도달하라는 것이다.

자기 자신에만 멈추라는 것이 아니다.

 

**참고 견딜만한 세상** -79-

 

저마다 자기 나름대로의 꽃이 있다.

다 꽃씨를 지니고 있다.

그러나 옛 성인이 말했듯이,

역경을 이겨 내지 못하면

그 꽃을 피워 낼 수 없다.

하나의 씨앗이 움트기 위해서는

흙 속에 묻혀서 참고 견뎌 내는

인내가 필요하다.

그래서 사바 세계,

참고 견디는 세계라는 것이다.

여기에 감추어진 삶의 묘미가 있다.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이

사바 세계라는 사실을

다시 한 번 기억해야 한다.

극락도 지옥도 아닌 사바 세계,

참고 견딜 만한 세상,

여기에 삶의 묘미가 있다.

 

** 얼마나 사랑했는가 ** -80-

 

알베르 카뮈는 말했다.

'우리들 생애의 저녁에 이르면,

우리는 얼마나 타인을 사랑했는가를 놓고

심판 받을 것이다.'

타인을 기쁘게 해줄 때

내 자신이 기쁘고,

타인을 괴롭게 하면

나 자신도 괴롭다.

타인에 대해 따뜻한 마음을 가지고 있으면

그 타인을 행복하게 할 뿐 아니라

내 자신의 내적인 평화도 함께 따라온다.

감정은 소유되지만 사랑은 우러난다.

감정은 인간 안에 깃들지만

인간은 사랑 안에서 자란다.

 

**자기를 배우는 일** -81-

 

불교를 배운다는 것은

곧 자기를 배움이다.

자기를 배운다는 것은

곧 자기를 잊어버림이다.

자기를 잊어버림은

자기를 텅 비우는 일.

자기를 텅 비울 때

비로소 체험의 세계와 하나가 되어

그 어떤 것과도 대립하지 않고

해탈된 자기를 알게 된다.

해탈된 자기란 본래적인 자기.

부분이 아닌 전체인 자기를 가리킴이다.

 

**너는 네 세상 어디에 있는가 ** -82-

 

너에게 주어진 몇몇 해가 지나고 몇몇 날이 지났는데

너는 네 세상 어디쯤에 와 있는가?'

마르틴 부버가 「인간의 길」에서 한 말이다.

이 글을 눈으로만 스치고 지나치지 말고

나직한 자신의 목소리로

또박또박 자신을 향해 소리내어 읽어 보라.

자기 자신에게 되묻는 이 물음을 통해

우리 각자 지나온 세월의 무게와 빛깔을

얼마쯤은 가늠할 수 있을 것이다.

때때로 이런 물음으로 자신의 삶을 들여다보아야 한다.

지난 한 해를 어떻게 지나왔는지,

무슨 일을 하면서 어떻게 살았는지,

어떤 이웃을 만나 우리 마음을 얼마만큼 주고받았는지.

자식들에게 기울인 정성이 참으로 자식을 위한 것이었는지

혹은 내 자신을 위한 것이었는지도 살펴볼 수 있어야 한다.

안으로 살피는 일에 소홀하면

기계적인 무표정한 인간으로 굳어지기 쉽고,

동물적인 속성만 쌓여 가면서

삶의 전체적인 리듬을 잃어버린다.

우리가 같은 생물이면서도 사람일 수 있는 것은

자신의 삶을 스스로 되돌아보면서

반성할 수 있는 그런 기능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다시 한 번 나직한 목소리로 물어보라.

'너는 네 세상 어디에 있는가?'

이와 같은 물음으로 인해

우리는 저마다 마음속 깊은 곳에서 울려오는

진정한 자신의 소리를 듣게 될 것이다.

그리고 삶의 가치와 무게를 어디에 두고 살아야 할 것인가도

함께 헤아리게 될 것이다.

 

**자신의 눈을 가진 사람** -83-

 

진실한 믿음을 갖고 삶을 신뢰하는 사람은

어떤 상황을 만나더라도 흔들림이 없다.

그는 자신의 눈으로 확인하지 않고는

근거 없이 떠도는 말에 좌우됨이 없다.

가짜에 속지 않을 뿐더러

진짜를 만나더라도

거기에 얽매이거나 현혹되지 않는다,

그는 오로지 자신의 눈을 맑히고

자신의 눈으로 보고 판단한다.

그는 비본질적인 일에 한눈을 팔지 않는다.

무엇 때문에 세상을 사는지,

삶의 가치를 어디에 둘 것인지

때때로 헤아려 본다.

자기 삶의 질서를 지니고 사는 자주적인 인간은 남의 말에 팔리지 않는다.

누가 귀에 거슬리는 비난을 하든 달콤한 칭찬을 하든,

그것은 그와는 상관이 없다.

그에게는 모든 것이 지나가는 한때의 바람이다.

그는 일시적인 바람에 속거나 흔들리지 않는다.

바람을 향해서 화내고 즐거워한다면

그건 사람이 아니라 허수아비나 인형이기 때문이다.

자기를 지킨다는 것은 무엇인가.

타율에 의해 억지로 참는 일이 아니다.

자기를 지키는 것은 곧 자신의 질서이다.

그리고 자기 삶의 양식이다.

자신의 질서요. 삶의 양식이기 때문에

남에게 폐를 끼치거나 남을 괴롭힐 수 없으며,

또한 남한테서 괴로움을 받을 일도 없다.

눈을 뜨라.

누가 내 눈을 감겼는가.

사물을 내 스스로 보지 못하고

남의 눈으로 보아 온 그릇된 버릇에서 벗어나야 한다.

활짝 열린 눈에는 티끌 하나도 묻을 수 없다.

내 눈이 열려야 열린 세상을 받아들일 수 있다.

 

** 눈꽃 (雪花)** -84-

 

잎이 저버린

빈 가지에 피어난

설화를 보고 있으면

텅 빈 충만감이 차 오른다

아무 것도 지닌 것 없는

빈 가지이기에

거기에

아름다운 눈꽃이 피어난 것이다

잎이 달린 상록수에서는

그런 아름다움을 찾아내기 어렵다.

 

**만남** -85-

 

사람은 엄마에게서 태어난 것만으로 인간이 되는 것은 아니다.

거기에는 동물적 나이만 있을 뿐 인간으로서 정신 연령은 부재다.

반드시 어떤 만남에 의해서만 인간이 성장하고 또 형성된다.

그것이 사람이든 책이든 혹은 사상이든 간에

만남에 의해서 거듭 거듭 형성해 나간다.

만난다는 것은 곧 개안(開眼)을 의미한다.

지금까지 보이지 않던 세계가 새롭게 열리고

생명의 줄기가 파랗게 용솟음친다.

산다는 것은 무엇인가를 비로소 인식하는 것이다.

험한 눈길을 헤치고 스승을 찾아간 사나이가 있었다.

스승을 만나기 위해 밤새 내려 쌓이는 눈 속에 묻히면서

물러가지 않는 꿋꿋한 사내.

그는 다음날 스승 앞에 팔을 끊어 信을 보인다.

법을 위해 신명(身命)을 버린 것이다.

이렇게 해서 신광(神光)은 달마대사를 만났다.

그는 일단 자기를 내던짐으로써 거듭 태어나게 되었다.

만남에는 그러한 자기 방기(放棄)의 아픔을 치러야 한다.

산문(散文)스런 시정(市井)의 거리에는

저마다 누구를 만나러 감인지 바쁘게 돌아가고 있다.

그러나 생명의 환희와 감사의 염(念)이 따르지 않는 것은

마주치는 것이요 사교일 따름이다.

만나는 데는 구도적인 엄숙한 자세가 있어야 한다.

"나는 누구인가 ?"

"나는 어떻게 살 것인가?"

이러한 문제를 지니고 찾아 헤멜 때에만 만남은 이루어진다.

나 하나를 어쩌지 못해 몇 밤이고

뜬 눈으로 밝히는 그러한 사람만이 만날 수 있다.

만난 사람은 그 때부터 혼자가 아니다.

그는 단수(單數)의 고독에서 벗어나 복수(複數)의 환희에 설레면서

맑게 맑게 그리고 깊게 깊게 승화된다.

사람은 혼자의 힘으로 인간이 될 수 없다.

만남에 의해서만 인간이 형성되는 것이다.

이 봄에는 우리는 무엇인가 만나야겠다.

새로운 눈을 떠야 한다.

**중심에서 사는 사람** -86-

거죽은 언젠가 늙고 허물어진다.

그러나 중심은 늘 새롭다.

영혼에는 나이가 없다.

영혼은 시작도 없고 끝도 없는 그런 빛이다.

어떻게 늙는가가 중요하다.

자기 인생을 어떻게 보내는가가 중요하다.

거죽은 신경 쓸 필요가 없다.

중심은 늘 새롭다.

거죽에서 살지 않고

중심에서 사는 사람은 어떤 세월 속에서도

시들거나 허물어지지 않는다

 

**살아 있는 모든 것은** -87-

 

우주에 살아 있는 모든 것은 한 곳에 머물러 있지 않고

움직이고 흐르면서 변화한다.

한 곳에 정지된 것은 살아 있는 것이 아니다.

해와 달이 그렇고 별자리도 늘 변한다.

우리가 기대고 있는 이 지구도 우주 공간에서

늘 살아 움직이고 있다.

무상하다는 말은 허망하다는 것이 아니라

'항상하지 않다', '영원하지 않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고정되어 있지 않고 변화한다는 뜻이다.

그것이 우주의 실상이다.

변화의 과정 속에 생명이 깃들고,

변화의 과정을 통해 우주의 신비와 삶의 묘미가 전개된다.

만일 변함이 없이 한 자리에 고정되어 있다면

그것은 곧 숨이 멎은 죽음이다.

살아 있는 것은 끝없이 변하면서

거듭거듭 형성되어 간다.

봄이 가고 여름과 가을과 겨울이 그와 같이 순환한다.

그것은 살아 있는 우주의 호흡이며 율동이다.

그러므로 지나가는 세월을 아쉬워할 게 아니라,

오는 세월을 잘 쓸 줄 아는 삶의 지혜를 터득해야 한다.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것** -88-

 

채우려고만 하는 생각을

일단 놓아 버리고 텅 비울 때

새로운 눈이 뜨이고

밝은 귀가 열릴 수 있다.

눈에 보이고 귀에 들리고 손으로 만질 수 있는 영역은

전체에서 볼 때 한 부분에 지나지 않는다.

존재의 실상을 인식하려면

눈에 보이는 부분과 눈에 보이지 않는 부분을

두루 살필 수 있어야 한다.

육지를 바로 보려면

바다도 함께 보아야 하고

밝은 것을 보려면

어두운 것도 동시에 볼 줄 알아야 한다.

 

**텅빈 고요** -89-

 

아무것도 없는

텅 빈 방에 들어가 본 사람은 알 것이다

그 텅빈 공간 속에서

순수한 현재를 발견할 수 있음을

성당과 모스크와 절간에

어떤 성스러움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이 텅빈 현재 때문이다

아무것도 없는 이 텅빈 고요

이런 텅빈 현재와 고요 속에서 인간은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자신을

들여다볼 수 있다

 

**귓속의 귀에 대고** -90-

 

미국의 철학자 마르쿠제는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를풍요로운 감옥에 비유했다.

감옥 속에 냉장고와 세탁기가 갖춰져있고

텔레비젼 수상기와 오디오가 놓여 있다.

그 속에서 살고 있는 우리들은 자신이

그 감옥에 갇혀 있다는 사실조차 모르고 있다.

이런 풍요로운 감옥에서 벗어나려면

어떤 것이 진정한 인간이고,

사람은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하며,

또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지

근원적이 물음 앞에 마주서야 한다.

그런 물음과 대면하지 않으면

진정한 인간의 삶이라고 할 수 없다.

항상 자신의 삶이 어디로 가고

있는가를 물을 수 있어야 한다.

나는 누구인가,스스로 물으라.

나는 누구인가,

자신의 속얼굴이 드러날 때까지묻고 또 물어야 한다.

건성으로 묻지 말고 목소리 속의 목소리로

귓속의 귀에 대고 간절하게 물어야 한다.

해답은 그 물음 속에 있다.

그러나 묻지 않고는 그 해답을 이끌어 낼 수 없다.

나는 누구인가.

거듭거듭 물어야 한다.

 

**글자없는 책** -91-

 

책을 대할 때는

한 장 한 장 책장을 넘길 때마다

자신을 읽는 일로 이어져야 하고,

잠든 영혼을 일깨워

보다 가치 있는 삶으로 눈을 떠야 한다.

그때 비로소,

펼쳐 보아도 한 글자 없지만

항상 환한 빛을 발하고 있는

그런 책까지도 읽을 수 있다.

책 속에 길이 있다고 말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나의 꿈** -92-

 

나는 아직도 이런 꿈을

버리지 않고 있다.

이 다음 어딘가 물 좋고

산 좋은 곳에 집을 한 채 짓고 싶다.

사람이 살기에 최소한의

공간이면 족하다.

흙과 나무와 풀과 돌,그리고

종이만으로 집의 자재를 삼을 것이다.

흙벽돌을 찍어 토담집을 짓고,

방 한 칸,마루 한 칸, 부엌 한 칸이면

더 바랄 게 없다.

아,

나는 이렇게 꿈을 지니고 있다.

이런 내 꿈이 금생에 이루어질지

아니면 내생에나 가서 이루어질지

알 수 없는 일이지만

이런 꿈이 설사 희망 사항에

그친다 할지라도

지금 나는 풋풋하게 행복하다.

 

**뒷모습** -93-

 

늘 가까이 있어도

눈속의 눈으로 보이는,

눈을 감을수록 더욱 뚜렷이 나타나는 모습이

뒷 모 습 이다

이 모습이 아름다워야 한다.

그리고 이 뒷모습을 볼 줄 아는

눈을 길러야 한다.

앞모습은 허상이고

뒷모습이야말로 실상이기 때문이다.

 

**살아 있는 선** 94-

 

선(禪)이란

밖에서 얻어들은 지식이나

이론으로써가 아니라

자신의 구체적인 체험을 통해

스스로 깨닫는 일이다.

객관적으로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직관적으로 파악하는 것,

철저한 자기 응시를 통해

자기 안에 잠들어 있는

무한한 창조력을 일깨우는 작업이다.

그래서 선을 가리켜

지식이 아니라 체험이라고 했다.

이 무한한 창조력이

사랑이라는 온도와 지혜라는 빛으로써

타인을 향해 발휘될 때

선은 일상 속에서 살아 움직인다.

선방 안에서만 통하는 선이라면

뒤주 속에 갇힌 것이나 다름없다.

뒤주 속에서 살아 나갈 길을 찾아

인간의 거리로 뛰쳐 나와야만

비로소 창조적인 기능을 할 수 있다.

창백한 좌불은 많아도

살아 움직이는

활불(活佛)이 아쉬운 오늘이다.

 

** 산에 오르면 ** -95-

 

산에 오르면

사람들로부터 해방되어야 한다.

무의미한 말의 장난에서 벗어나

입 다물고 자연의 일부로 돌아갈 수 있어야 한다.

지금까지 밖으로만 향하던 눈과 귀와 생각을

안으로 거두어들여야 한다.

그저 열린 마음으로 무심히

둘레를 바라보면서 쉬어야 한다.

복잡한 생각은 내려놓고

가장 편안한 마음으로 자연의 숨결에

귀를 귀울여야한다.

인간의 언어로 인해서

지금까지 우리가 얼마나 눈멀어 왔고 귀먹어 왔는지

냉정하게 되돌아볼 줄 알아야 한다.

남의 얼굴만을 쳐다보다가

자신의 얼굴을 까맣게 잊어버리지 않았는지

돌이켜 보아야 한다.

남의 말에 팔리지 말고

자기 눈으로 보고 자신의 귀로 들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자신의 삶을 이룰 수 없다.

자연은 때 묻고 지친 사람들을 맑혀 주고

쉬도록 받아 들인다.

우리는 그 품안에 가까이 다가가

안기기만 하면 된다

 

**함께 있다는 것** -96-

 

함께 있고 싶다는 것은

어디까지나 희망사항일 뿐,

인간은 본질적으로

혼자일 수 밖에 없는 존재이다

사람은 누구나 홀로 태어난다

그리고 죽을 때도 혼자서 죽어간다

뿐만 아니라 우리들이 살아가는 데도

혼자서 살 수 밖에 없다.

숲을 이루고 있는 나무들도

저마다 홀로 서 있듯이

인간 역시 무한 고독의 존재이다.

사람은 저마다 업이 다르기 때문에

생각을 따로 해야 되고

행동도 같이할 수 없다.

인연에 따라 모였다가

그 인연이 다하면 흩어지게 마련이다

물론 인연의 주제자는

그 누구도 아닌 자기 자신이다.

이것은 어떤 종교의 도그마이기에 앞서

무량겁을 두고 되풀이될

우주 질서 같은 것이다.

모든 현상은 고정되어 있지 않고

항상 변하기 때문이다.

늘 함께있고 싶은 희망 사항이 지속되려면

서로를 들여다 보려고 하는 시선을

같은 방향으로 돌려야할 것이다.

서로 얽어매기보다는

혼자있게 할 일이다

현악기의 줄들이 한 곡조를 울리면서도

그 줄은 따로이듯이

그런 떨어짐이 있어야 한다.

 

**속뜰에서 피는 꽃** -97-

 

나무 그늘 아래 앉아

산마루를 바라보고 있으면,

내 속뜰에서는 맑은 수액이 흐르고

향기로운 꽃이 피어난다.

혼자서 묵묵히 숲을 내다보고 있을 때

내 자신도 한 그루 정정한 나무가 된다.

아무 생각 없이 빈 마음으로

자연을 대하고 있으면

그저 넉넉하고 충만할 뿐

결코 무료하지 않다.

이런 시간에 나는 무엇엔가

그지없이 감사드리고 싶어진다.

하루 스물네 시간 중 맑고 잔잔한

이런 여백이 없다면

내 삶은 탄력을 잃고 이내

시들고 말 것이다.

 

**생의 밀도** -98-

 

지식이 지혜로 깊어지려면

순수한 집중을 통해

생의 밀도를 의식해야 한다

철저하게 자기 자신을 응시함으로써

자기 존재에 대해 자각해야 한다

나는 어디서 왔는가

왜 사는가

어떻게 살것인가

자기 자신에 대해

근원적인 물음을 던져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홀로 있는 시간이 필요하다

외부의 정보에서 벗어나

자기 마음속 소리를 들어야 한다

홀로 있는 시간은

본래의 자기로 돌아 올수 있는 기회이다

벌거벗은 자신과 마주할 수 있는

유일한 계기이다

하루하루 내가 어떻게 살고 싶은지

비춰 보는 거울이다

그리고 내 영혼의 무게가

얼마쯤 나가는지 달아 볼수 있는

그런 시간이기도 하다.

 

**간소하게 더 간소하게** -99-

 

단순한 간소는 다른 말로 하면

침묵의 세계이다.

또한 텅 빈 공의 세계이다.

텅빈 충만의 경지이다.

여백과 공간의 아름다움이 이 단순과 간소에 있다.

인간은 흔히 무엇이든 넘치도록

가득 채우려고만 하지 텅 비우려고는

하지 않는다.

텅 비어야 그 안에 영혼의 메아리가 울린다.

우리는 비울 줄을 모르고 가진 것에 집착한다.

텅 비어야 새로운 것이 들어찬다.

모든 것을 포기할 때

한 생각을 버리고 모든 것을 포기할 때

진정으로 거기서 영혼의 메아리가 울린다.

텅 비었을 때

모든 집착에서 벗어나 어디에도

집착하지 않고 비었을 때, 그 단순한 충만감

그것이 바로 극락이다.

 

** 이 자리에 살아 있음 ** -100-

 

우리가 산다는 것은 무엇인가?

지금 바로 이 자리에서 이렇게

살아 있음이다.

어제나 내일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오늘 지금 이 자리에 있음이다.

우리가 사람답게 산다는 것은

순간마다 새롭게 태어남을 뜻한다.

우리가 어떻게 살 것인가를 알아차릴 때

죽음은 결코 삶과 낯설지 않다.

우리는 죽음 없이는 살 수 없다.

순간순간 심리적으로 죽지 않는다면

우리는 새로운 삶을 이룰 수 없다.

오늘이 어제의 연속이 아니라 새날이요.

새 아침인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다.

 

** 도반 ** -101-

 

진정한 도반은

내 영혼의 얼굴이다.

내 마음의 소망이 응답한 것.

도반을 위해 나직이 기도할 때

두 영혼은 하나가 된다.

맑고 투명하게

서로 비추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도반 사이에는 말이 없어도

모든 생각과 소원과 기대가

소리 없는 기쁨으로 교류된다

이때 비로소 눈과 마음은

시간과 공간을 넘어 하나가 된다

 

** 가장 큰 악덕 ** -102-

 

사람이 항상

나물 뿌리를 씹어 먹을 수 있다면

백 가지 일을 이룰 수 있다"

기름지게 먹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이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

죽을 때까지 알 수 없겠지만,

담백하게 먹는 사람들은

이 말뜻을 이내 알아차릴 것이다.

우리가 먹는 음식은

우리 몸에 들어가 살이 되고

피가 되고 뼈가 된다.

뿐만 아니라 보통 사람들의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그 음식들이 지닌 업까지도 함께 먹어

그 사람의 체질과 성격을 형성한다.

살아 있는 생명을 괴롭히거나

살해하는 것은

악덕 중에서도

가장 큰 악덕이다.

언제 어디서나 이 우주에 가득 차 있는

진리의 영혼을 보려면

가장 하잘 것없는 미물일지라도

내 몸처럼 아끼고 사랑할 수 있어야 한다.

 

**깨어 있는 사람** -103-

 

행복은 단순한 데 있다.

가을날 창호지를 바르면서 아무 방해 받지 않고

창에 오후의 햇살이 비쳐들 때 얼마나 아늑하고 좋은가.

이것이 행복의 조건이다.

그 행복의 조건을 도배사에게 맡겨 버리면

스스로 즐거움을 포기하는 것이다.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은 자기가 해야 한다.

도배가 되었든 청소가 되었든 집 고치는 일이 되었든

내 손으로 할 때 행복을 경험한다.

그것을 남에게 맡겨 버리면

내게 주어진 행복의 소재가 소멸된다.

행복하려면 조촐한 삶과

드높은 영혼을 지닐 수 있어야 한다.

몸에 대해서는 얼마나 애지중지하는가.

얼굴에 기미가 끼었는가 안 끼었는가.

체중이 얼마나 불었는가 줄었는가에 최대 관심을 기울인다.

그러나 자신의 정신의 무게가,

정신의 투명도가 어떤가에는 거의 무관심하다.

내 정신이 깨어 있어야 한다.

깨어 있는 사람만이 자기 몫의 삶을 제대로 살 수 있다.

자기 분수를 헤아려 삶의 질을 높여 갈 수 있다.

**가뭄으로 잦아드는 논물 같은** -104-

죽음은 과일 속에 들어 있는 씨앗처럼 삶과 함께 살아간다,

죽음이라는 한계 상황을 잊어버리지 않는다면,

생애 대한 깊은 존경과 성실성도 잃지 않는다,

생명이 지닌 밝고 아름답고 선한 가능성을 일깨우지 않고

자기 한 몸만을 위해 살아간다면

풀을 뜯다가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소와 다르지 않다,

‘오늘의 나는 무엇인가,?를 되돌아볼 수 있어야 한다,

과연 나는 하루하루를 사람답게 살고 있는가?

내가 지니고 있는 기능을 충분히 발휘하면서 나답게 살고 있는가,

내가 허락받은 목숨은 가뭄으로 잦아드는 논물과 같다,

 

** 인연 ** -105-

 

인연이란

마음밭에

씨 뿌리는 것과 같아서

그 씨앗에서

새로운 움이트고

잎이 펼쳐진다.

인연이란

이렇듯 미묘한 얽힘이다.

 

** 강물처럼 흐르는 존재 ** -106-

 

인간은 강물처럼 흐르는 존재이다

우리는 지금 이렇게 이 자리에 앉아 있지만

순간마다 끊임없이 흘러가고 있다

늘 변하고 있는 것이다

날마다 똑같은 사람일 수가 없다

그렇기 때문에 함부로 남을 판단할수 없고

심판할 수 가 없다

우리가 누군가에 대해

비난을 하고 판단을 한다는 것은

한 달 전이나 두 달 전 또는 몇 년 전의 낡은 자로써

현재의 그 사람을 재려고 하는 것과 같다

그 사람의 내부에서 어떤 변화가 일어나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렇기 때문에 타인에 대한 비난은

늘 잘못된 것이기 일쑤다

우리가 어떤 판단을 내렸을 때

그는 이미 딴사람이 되어 있을 수 있다

말로 비난하는 버릇을 버려야

우리 안에서 사랑의 능력이 자란다

이 사랑의 능력을 통해

생명과 행복의 싹이 움튼다

 

** 직선과 곡선 ** -107-

 

사람의 손이 빚어낸 문명은 직선이다

그러나 본래 자연은 곡선이다.

인생의 길도 곡선이다

끝이 빤히 내다보인다면 무슨 살맛이 나겠는가

모르기 때문에 살맛이 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곡선의 묘미이다.

직선은 조급, 냉혹, 비정함이 특징이지만

곡선은 여유, 인정, 운치가 속성이다.

주어진 상황 안에서 포기하지 않고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찾는 것

그것 역시 곡선의 묘미이다.

때로는 천천히 돌아가기도 하고

어정거리고 길 잃고 헤매면서

목적이 아니라 과정을 충실히 깨닫고 사는

삶의 기술이 필요하다.

 

**부드러움이 단단함을 이긴다** -108-

 

임종을 앞둔 늙은 스승이

마지막 가르침을 주기 위해 제자를 불렀다.

스승은 자신의 입을 벌려

제자에게 보여 주며 물었다.

'내 입 안에 무엇이 보이느냐?'

'혀가 보입니다.'

'이는 보이지 않느냐?'

'스승님의 치아는 다 빠지고 하나도 남아 있지 않습니다.'

'이는 다 빠지고 없는데 혀는 남아 있는 이유를 알겠느냐?'

'이는 단단하기 때문에 빠져 버리고

혀는 부드러운 덕분에 오래 남아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스승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렇다, 부드러움이 단단함을 이긴다는 것,

이것이 세상 사는 지혜의 전부이다.

이제 더 이상 너에게 가르쳐 줄 것이 없다.

그것을 명심하라

 

** 빈 그릇에서 배운다 ** -109-

 

이 가을 들어 나는

빈 그릇으로 명상을 하고 있다.

서쪽 창문 아래 조그만 항아리와

과반을 두고 벽에 기대어

이만치서 바라본다.

며칠 전에 항아리에 들꽃을 꽂아 보았더니

항아리가 싫어하는 내색을 보였다.

빈 항아리라야 무한한 충만감을 느낄 수 있다.

텅 빈 항아리와

아무것도 올려 있지 않은

빈 과반을 바라보고 있으면

내 마음도 어느새 텅 비게 된다.

무념 무상, 무엇인가를 채웠을 때보다

비웠을 때의 이 충만감을

진공묘유(眞空妙有)라고 하던가.

텅 빈 충만의 경지이다.

빈 그릇에서 배운다.

 

** 꽃과의 대화 ** -110-

 

서로의 향기로써 대화를 나누는 꽃에 비해

인간은 말이나 숨결로써

서로의 존재를 확인한다.

꽃이 휠씬 우아한 방법으로

서로를 느낀다.

어느 해 가을,

개울가에 다른 꽃은 다 지고 없는데

용담이 한 그루 홀로 남아 있었다.

나는 그 꽃 속이 어떻게 생겼는지

몹시 궁금했다.

입 다물고 있는 용담의 꽃봉오리에 다가가

낮은 목소리로

"나는 네 방 안이 어떻게 생겼는지 궁금한데

한 번 보여주지 않을래?' 하고 청을 했다.

다음 날 무심코 개울가에 나갔다가

그 용담을 보았더니

놀랍게도 꽃잎을 활짝 열고

그 안을 보여 주었다.

어떤 대상을 바르게 이해하려면

먼저 그 대상을 사랑해야 한다.

이쪽에서 따뜻한 마음을 열어 보여야

저쪽 마음도 열린다.

모든 살아 있는 존재는

서로 이어져 있기 때문이다

 

** 인간의 배경 ** -111-

 

인간은 누구나

숲이나 그늘에 들면 착해지려고 한다.

콘크리트 벽 속이나

아스팔트 위에서는 곧잘 하던 거짓말도,

선하디 선하게 서있는 나무 아래서는 차마 할 수가 없다.

차분해진 목소리로 영원한 기쁨을 이야기하고,

무엇이 선이고 진리인가를 헤아리게 된다.

소리의 틈바구니에서 분주히 뛰어다니고 있는

일상의 자신이 훤히 드러나 보인다.

인간의 배경은 소음과 먼지에 쌓여 피곤하기만 한

도시의 문명일 수 없다.

나무와 새와 물과 구름, 그리고 별들이 수놓인

의연한 자연임을 알 수 있다.

사람은 자연으로부터

그 질서와 겸허와 미덕을 배워야 한다.

 

** 눈 속에 꽃을 찾아가는 사람 ** -112-

 

눈 속에 꽃을 찾아가는 사람의 마음이란

얼마나 꽃다운 것인가.

꽃을 가꿀 만한 뜰을 갖지 못한

현대의 도시인들은

때로는 꽃시장에라도 가서

싱그럽게 피어나는 꽃을 볼 일이다.

맑고 향기롭게 피어 있는

꽃의 아름다움을 즐길 뿐 아니라.

자신의 삶에도

이런 맑음과 향기와 운치가 있는지

되돌아볼 수 있어야 한다.

 

**끝없는 탈출** -113-

 

자기를 가둔 감옥에서 탈출하려면

무엇보다 의식이 깨어 있어야 한다

자기 인생에 대한 각성 없이는

벗어날 기약이 없다

깨어 있는 사람만이

자기 몫의 삶을 제대로 살 수 있고

깨어 있는 사람만이

삶의 질을 높이기 위해

끝없는 탈출을 시도한다

참다운 삶이란 무엇인가

욕구를 충족시키는 생활이 아니라

의미를 채우는 삶이어야 한다

의미를 채우지 않으면

삶은 빈껍질이다

 

** 그냥 바라보는 기쁨 ** -114-

 

만일 이 산이 내 소유라면

그 소유 관념으로 인해

잔잔한 기쁨과 충만한 여유를

즉각 반납하게 될 것이다.

등기부에 기재해 관리해야 할 걱정,

세금을 물어야 하는 부담감

또는 어느 골짜기에 병충해는 없을까,

나무를 몰래 베어가는 사람은 없을까 해서

한시도 마음이 놓이지 않을 것이다.

다행히도 이 산은 내 개인의 소유가 아니기 때문에

마음 놓고 바라볼 수 있고

내 뜰처럼 즐길 수 있다.

차지하는 것과

보고 즐기는 것은

이처럼 그 틀이 다르다.

 

** 알몸이 되라 ** -115-

 

옛 스승은, 아무것도 걸치지 말고

훨훨 벗어 던져 알몸이 되라고 한다.

알몸이 되라고 하면 우리들은 또

'알몸' 이라는 옷을 걸치려고 한다.

진정한 알몸은 어떤 옷이든

마음대로 입었다 벗었다 할 수 있는 사람이다.

어떤 연장이든 자유자재로 쓸 수 있는 사람이다.

그 옛 스승은 이것을 '경계를 타는 사람'이라고 했다.

어떤 결함도 없는 완전한 인간이란

완전이라고 하는 데에도 머물지 않는 사람이다.

완전이란 이미 이루어진 상태가 아니라

시시각각 새로운 창조이기 때문이다.

 

** 소유로부터의 자유 ** -116-

 

사랑은

내 마음이 따뜻해지고 풋풋해지고

더 자비스러워지고

상대방이 좋아할 게 무엇인가를 생각하는 것이다.

사람이든 물건이든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한데

소유하려고 하기 때문에 고통이 따른다.

누구나 자기 집에

도자기 한두 점 놓아두고 싶고

좋은 그림 걸어 두고 싶어하지만

일주일 정도 지나면

거기 그림이 있는지도 잊어버린다.

소유란 그런 것이다.

손안에 넣는 순간

흥미가 사라져 버린다.

하지만 단지 바라보는 것은

아무 부담없이 보면서

오래도록 즐길 수 있다.

소유로부터 자유로워야 한다.

사랑도 인간관계도 마찬가지다.

 

** 자신을 창조하는 일 ** -117-

 

산다는 것은 끊임없이

자기 자신을 창조하는 일,

그 누구도 아닌

자신이 자신을 만들어 간다.

이 창조의 노력이 멎을 때

나무든 사람이든

늙음과 질병과 죽음이 온다.

겉으로 보기에 나무들은

표정을 잃은 채 덤덤히 서 있는 것 같지만

안으로는 잠시도

창조의 손을 멈추지 않는다.

땅의 은밀한 말슴에 귀 기울이면서

새봄의 싹을 마련하고 있는 것이다.

시절 인연이 오면

안으로 다스리던 생명력을

대지 위에 활짝 펼쳐 보일 것이다.

 

**자연 앞에서 ** -118-

1.

고요하고 적적한 것은 자연의 본래 모습이다.

달빛이 산방에 들어와 잠든 나를 깨운 것도,

소리 없는 소리에 귀 기울이며

달의 숨소리를 듣고자 하는 것도

이 모두가 무심이다.

바람이 불고, 꽃이 피었다가 지고,

구름이 일고, 안개가 피어 오르고,

강물이 얼었다가 풀리는 것도 또한

자연의 무심이다.

이런 일을 누가 참견할 수 있겠는가.

우리는 다만 자연 앞에

무심히 귀를 기울일 뿐.

자연의 신비와 아름다움을 받아들이려면

입 다물고 그저

무심히 귀를 기울이면 된다.

무심히 귀를 기울이라.

2.

자연은 우리 인간에게 영원한 어머니일 뿐 아니라

위대한 교사이다.

자연에는 그 나름의 뚜렷한 질서가 있다.

자연은 말없이 우리에게 많은 깨우침을 준다.

자연 앞에서는

우리가 알고 있는 얄팍한 지식 같은 것은

접어 두어야 한다.

그래야 침묵 속에서 우주의 언어를 들을 수 있다.

침묵이야 말로

자연의 말이고

우주의 언어이다.

자연 앞에서 인간은

침묵의 의미를 배워야 한다.

그리하여 인간도 자연의 일부임을

깨달아야 한다.

 

** 종교적인 삶 ** -119-

 

종교적인 삶을 유지하고자 하는 사람은

무엇보다 먼저 말을 절제해야 한다

말하고자 하는 욕망을 억제해야 한다

말이 많은 사람은

안으로 생각하는 기능이 약하다는 증거이다

말이 많은 사람에게 신뢰감이 가지 않는 것은

그의 내면이 허술하기 때문이고

또한 행동보다 말을 앞세우기 때문이다

말하기 전에 주의 깊게 생각하는

습관부터 길러야 한다

말하는 것보다는

귀 기울여 듣는 데 익숙해야 한다

말의 충동에 놀아나지 않고

안으로 돌이켜 생각하면,

그 안에 지혜와 평안이 있음을

그때마다 알아차릴 것이다.

말을 아끼려면 가능한 한

타인의 말에 참견하지 말아야 한다

어떤 일을 두고 아무 생각없이

무책임하게 타인에 대해서

험담을 늘어놓는 것은

나쁜 버릇이고 악덕이다

 

** 수행의 이유 ** -120-

 

우리가 수행을 하는 것은

새삼스럽게 깨닫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 깨달음을 드러내기 위해서다

닦지 않으면 때 묻기 때문이다.

마치 거울처럼.

닦아야 본래부터 지니고 있는 그 빛을 발할 수 있다.

사람은 누구든 자기 자신안에

하나의 세계를 가지고 있다.

사람은 누구나 그 마음 밑바닥에서는 고독한 존재이다.

그 고독과 신비로운 세계가 하나가 되도록

안으로 살피라.

무엇이든 많이 알려고 하지 마라.

책에 너무 의존하지 말라.

성인의 가르침이라 할지라도

종교적인 이론은 공허한 것이다.

진정한 앎이란 내가 직접 체험한 것,

이것만이 내 것이 될 수 있고 나를 형성한다.

 

** 생활의 규칙 ** -120-

 

“하루 한 시간은 조용히 앉아 있는 습관을 들이라.

푹신한 침대가 아닌 딱딱한 바닥에서 잠을 자라.

이런저런 생각 끝에 잠들지 말고

조용히 명상을 하다가 잠들도록 하라.

간소하게 먹고 간편하게 입으라.

사람들하고는 될 수 있는 한 일찍 헤어지고

자연과 가까이 하라.

텔레비전과 신문을 무조건 멀리하라.

무슨 일에나 최선을 다하라.

그러나 그 결과에는 집착하지 말라.

풀과 벌레들처럼 언젠가는 우리도 죽을 것이다.

삶다운 삶을 살아야

죽음다운 죽음을 맞이할 수 있음을 명심하라.”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은

누구에게나 똑같이 하루 24시간이다.

이 24시간을 어떻게 나누어 쓰는가에 따라

그 인생은 얼마든지 달라진다.

바쁘고 고단한 일상이지만

하루 한 시간만이라도

조용히 앉아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는 습관을 들인다면

하루하루의 삶에 탄력이 생길 것이다.

몸은 길들이기 나름이다.

너무 편하고 안락하면 게으름에 빠지기 쉽다.

잠들 때는 복잡한 생각에서 벗어나

숙면이 되도록 무심해져야 한다.

당신은 어떤 생활의 규칙을 세워 지키고 있는가?

당신을 만드는 것은 바로 당신 자신의 생활 습관이다.

 

**허虛의 여유** -122-

 

문으로 들어온 것은

집안의 보배라 생각지 말라'는 말이 있다.

바깥 소리에 팔리다 보면

내면의 소리를 들을 수 없다.

바깥의 지식과 정보에 의존하면

인간 그 자체가 시들어 간다.

오늘 우리들은

어디서나 과밀 속에서 과식하고 있다.

생활의 여백이 없다.

실實로써 가득 채우려고만 하지,

허虛의 여유를 두려고 하지 않는다.

삶은 놀라움이요, 신비이다.

인생만이 삶이 아니라

새와 꽃들, 나무와 강물,

별과 바람, 흙과 돌, 이 모두가 삶이다.

우주 전체의 조화가 곧 삶이요,

생명의 신비이다.

삶은 참으로 기막히게 아름다운 것.

누가 이런 삶을 가로막을 수 있겠는가.

그 어떤 제도가

이 생명의 신비를 억압할 수 있단 말인가.

하루해가 자기의 할 일을 다하고 넘어가듯이

우리도 언젠가는 이 지상에서 사라질 것이다.

맑게 갠 날만이 아름다운 노을을 남기듯이

자기 몫의 삶을 다했을 때

그 자취는 선하고 곱게 비칠 것이다.

남은 날이라도 내 자신답게 살면서,

내 저녁 노을을 장엄하게 물들이고 싶다

 

** 빈 방에 홀로 ** -123-

 

빈 방에 홀로 앉아 있으면

모든 것이 넉넉하고 충만하다.

텅 비어 있기 때문에

가득 찻을 때보다도

오히려

더 충만하다.

 

** 어느 길을 갈 것인가 ** -124-

 

우리 앞에는 항상 오르막길과 내리막길이 놓여 있다.

이중에서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

각자의 삶의 양식에 따라서

오르막길을 오르는 사람도 있고

내리막길을 내려가는 사람도 있다.

오르막길은 어렵고 힘들지만

그 길은 인간의 정상에 오르는 길이다.

내리막길은 쉽고 편하지만 짐승의 길이고

수렁으로 떨어지는 길이다.

만일 우리가 평탄한 길만 걷는다고 생각해 보라,

십 년 이십 년 한 생애를

늘 평탄한 길만 간다고 생각해 보라,

그 생이 얼마나 지루하겠는가?

그것은 사는 것이라고 할 수 없다.

오르막길을 통해 뭔가 뻐근한

삶의 저항 같은 것도 느끼고

창조의 의욕도 생겨나고

새로운 삶의 의지도 지닐 수 있다.

오르막길을 통해 우리는 거듭 태어날 수 있다.

어려움을 겪지 않고는 거듭 태어날 수 없다

 

                                                         **침 묵** -125-

인간의 혼을 울릴 수 있는 말이라면

무거운 침묵이 배경이 되어야 한다.

침묵은 모든 삼라만상의 기본 적인 존재 양식이다.

나무든 짐승이든 사람이든

그 배경엔 늘 침묵이 있다.

침묵을 바탕으로 해서

거기서 움이 트고 잎이 피고 꽃과 열매가 맺는다.

우리는 안에 있는 것을 늘 밖에서 찾으려고 한다.

침묵은 밖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어떤 특정한 시간이나 공간에 고여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늘 내 안에 들어 있다.

따라서 밖으로 쳐다보려고만 해서는 안 된다.

안으로 들여다보는 데서 침묵을 캐낼 수가 있다.

침묵은 자기 정화의 지름길이다.

온갖 소음으로부터 우리 영혼을 지키려면

침묵의 의미를 몸에 익혀야 한다.

 

** 달 빛 ** -126-

 

요즘 자다가 몇 차례씩 깬다.

달빛이 방 안까지 훤히 스며들어

자주 눈을 뜬다.

내 방 안에 들어온 손님을 모른 체할 수 없어

자리에서 일어나 마주 앉는다.

한낮의 좌정보다

자다가 깬 한밤중의 좌정을

나는 즐기고자 한다.

살아온 날보다

앞으로 살아갈 날이 많지 않으니

잠들지 말고 깨어 있으라는

소식으로 받아들이면

맑은 정신이 든다.

중천에 떠 있는 달처럼

내 둘레를 두루두루 비춰 주고 싶다.

 

**좋은 말** -127-

 

우리는 좋은 말을 듣기 위해

바쁜 일상을 쪼개어 여기저기 찾아다닌다.

그러나 기대와는 달리 번번이 실망한다.

그 좋은 말이란 무엇인가?

또 어디에 좋은 말이 있는가?

그리고 무엇 때문에 그 좋은 말을 듣고자 하는가?

아무리 좋은 말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고 할지라도

내 자신이 들을 준비가 되어 있지 않으면

그 어떤 좋은 말도 내게는 무의미하고 무익하다.

좋은 말 좋은 가르침은

사람의 입을 거쳐서만 나오는 것이 아니다.

우주 만물이 매 순간 그때 그곳에서

좋은 가르침을 펼쳐 보이고 있다.

우리는 어려서부터 얼마나 많은 좋은 말을 들어 왔는가.

지금까지 들은 좋은 말만 가지고도

누구나 성인이 되고도 남을 것이다.

말이란 그렇게 살기 위한 하나의 방편에 지나지 않는다.

실제의 삶에 이어지지 않으면 말이란 공허하다.

자기 체험이 없는 말에 울림이 없듯이

그 어떤 가르침도 삶으로 구체화되지 않으면 무의미하다.

깨어 있고자 하는 사람은 바로 그 순간을 살아야 한다.

좋은 말은 어디에 있는가?

그대가 서 있는 바로 지금 그곳에서

자기 자신답게 살고 있다면

그 자리에 좋은 말이 살아 숨쉰다.

 

** 하루 한 생각 ** -128-

 

사람들은 하나같이

얻는 것을 좋아하고 잃는 것을 싫어한다.

그러나 전 생애의 과정을 통해

어떤 것이 참으로 얻는 것이고

잃는 것인지 내다볼 수 있어야 한다.

때로는 잃지 않고는 얻을 수가 없다.

전체가 되기 위해서는

일단 무(無)가 되어야 한다.

자기중심적인 개체의 삶에서,

자타를 넘어선 전체의 삶으로

탈바꿈이 되지 않고서는

거듭나기 어렵다.

 

 

<서문일부>

한여인이 있었다.

온통 검은 옷을 입고서 그녀는 간신히 울음을 삼키며 우리와 함께 밥상머리에 앉아 있었다. 이제 막 그녀는 죽은 아들을 위한 49제를 마쳤다. 그리고 절 주지의 안내로 방으로 들어와 우리와 합석을 했다. 그녀의 존재 전체가 슬픔으로 일렁이고 있었다. 아들은 외국 유학을 마치고 군 입대를 준비하던 중, 어느 날 친구들과 저녁을 먹고 돌아와서는 돌연 심장 마비로 세상을 떠났다. 하나밖에 없는 사랑하는 아들을 잃은 고통은 그녀의 가슴을 눈물로 가득 채웠다. 그 눈물은 차마 밖으로 흘러나오지는 않고 있었지만, 그녀가 하는 이야기, 음식을 입에 넣고 우물거리는 것까지도 울음 그 자체였다. 슬픔이 깊으면 모든 동작이 울음이 된다.

밥을 먹다 말고 내가 법정 스님을 돌아보았다. 나는 이제쯤 스님이 여인에게 어떤 위로의 말을 할 때가 되었다고 생각했다. 아들은 그 인연만으로 그녀에게 왔다가 간 것이다. 이 우주가 잠시 그녀에게 아들을 맡겼다가 데리고 간 것일 뿐이다. 그러니 너무 슬퍼하지 말라..... 스님이 그렇게 여인을 위로하리라고 나는 짐작했다.

그러나 스님은 아무 말씀이 없으셨다. 그냥 묵묵히 식사를 하면서 그녀 앞으로 반찬을 끌어다 주기도 하고 어서 먹으라고 권할 뿐이었다. 여인은 계속해서 아들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스님은 귀를 기울여 그 모든 이야기를 들어주었다. 그리고 또 연신 다른 반찬을 그녀 앞으로 옮겨다 놓았다.

식사가 끝날 무렵, 나는 두 사람 사이에 어떤 화학 작용이 일어나는 걸 느낄 수 있었다. 겉으로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고 어떤 위로의 말도 건네지지 않았지만, 분명 여인의 얼굴 어딘가에 안정과 평화의 분위기가 감돌기 시작했다. 그것은 마치 눈물로 일렁이던 바다에 한 줄기 평화로운 빛이 스며들어 물결이 그 빛을 반사하기 시작하는 것과 같았다.

그것이 어떤 힘인지는 알 수 없었다. 법정 스님이 가진 현존의 힘이라고 해야 할까. 하지만 좀 더 현실적인 차원에서 말하면, 그때 스님은 단 한순간도 그 여인을 소홀히 하지 않았다. 사실 그 자리에는 모처럼 산을 내려온 그를 만나기 위해 여러 사람이 자리를 함께 하고 있었다. 그러나 투명한 오라가 두 사람을 감싸고 있는 것처럼 그는 한순간도 그 여인에게서 눈과 귀를 떼지 않았다. 바로 옆에 앉은 나조차도 그곳에 끼어들거나 방해할 수가 없었다. 그 강렬한 집중이 아마도 그녀의 슬픔을 위로하고, 나아가 그것을 삶의 한계에 대한 이해로 승화시켰는지도 모른다. 그때의 그의 모습은 마치 고통받는 환자를 치료하는 의사의 그것과도 같았다. 그 분위기의 신성함이 서서히 그녀를 슬픔 밖으로 인도했을 것이다.

마침내 우리가 점심식사를 마치고 방 밖으로 나와 초봄의 햇빛 가득한 절마당을 걸어가고 있을 때, 여전히 법정 스님 옆에서 걷고 있는 그녀의 얼굴은 약간 상기된 채로 밝은 기색이 역력했다. 죽어가던 영혼은 그렇게 다시 소생의 순간을 맞이했따. 눈에는 눈물이 어려있었지만, 그것은 슬픔의 눈물이라고 하기 어려웠다. 상처를 위로 받은 이의 인도와 감사의 눈물이 섞여 있었다.

많은 사람들과의 만남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보게 하는 글이었습니다. 아파하는 친구들, 이웃들 앞에서 그들에게 얼마나 집중하였는가? 스스로에게 물어보았습니다. 혹여 그들 앞에서 잘난 척하지는 않았는지, 섣부른 충고와 위로를 하지는 않았는지?

...인간의 역사는 자신의 몫을 늘리기 위해 끊임없이 싸우는 과정이며, 소유욕을 채우기 위해 물건뿐만 아니라 사람까지도 소유하려고 한다는 것이 그의 진단이다. 전 세계적으로 소비 지향적인 단일 문화를 이루고 있는 이 새다는 행복과는 거리가 멀다. 행복하기 위해서는 소유와 소비로부터 그 정신이 깨어 있아여 한다. '생각하는 대로 살지 못하면, 사는 대로 생각하기 된다.' 는 것은 진리이다. ... '

- 서문에서, 류시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