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수래 공수거
80세의 그녀는 젊은 시절 여창가곡(女唱歌曲), 궁중무(宮中舞)의 명인으로 이름을 떨쳤다.
그녀는 서울 성북동에 있는 대원각 건물과 대지. 임야 7천평 (시가 1천억)을 한 스님(法頂)
에게 시주했다. 대원각은 국내 최대 요정의 하나로 "요정정치" 대명사로 불리기도 한 곳이다.
80년대 중반 이후 대원각은 대중음식점으로 탈바꿈 했다.
그녀가 법정스님에게 전재산을 기증하겠다고 한 것은19년전(87년)일이다. 그녀의 마음을
움직이게 한 것은 법정스님의 수상집 " 무소유(無所有)" 그녀는 독실한 불교 신자이자
절친한 사이인 김대도행(金大道行)씨를 통해 LA 고려사에서 처음 법정스님을 만났다.
그녀는 스님에게 아무런 조건 없이 대원각을 시주할테니 절로 만들어 몸소 관리 운영해
줄 것을 당부한다.
하지만 평생 수도승임을 굳게 지켜온 법정스님은 완강히 거절했다. 법정스님은 90년
"맑고 향기롭게 살아가기 운동" 을 주장 수행못지않게 불교의 사회적 책임에 무게를 두게
되면서 생각이 달라졌다.
대원각을 시대를 이끌어 갈 정신운동의 도량으로 발전시켜 나가는게 좋겠다는 주변의
의견이 빗발치자 법정스님은 그녀의 소중한 정성을 받아 들였다. 모든걸 아낌 없이
바친 그녀는 이렇게 말한다. "없는 것을 만들어 드려야 큰 일을 한 것이 되는데 있는
것을 드린 것이니 아무에게도 내세울 일 이 아니다" 고 그녀의 한마디 말은 우리를
감동케 한다. 스님은 그녀에게 작은 감사의 뜻으로 "길상화(吉祥華)"라는 불명(佛名)을
지어 주었다.
사람들은 "공수래 공수거(空手來 空手去) 인간원래 무일물(人間元來 無一物)의
평범한 진리를 알면서도 실천을 못한다. 1천억의 재산을 바친 그녀는 누구인가,
김영한(金英韓)여사다. 1930년대의 천재시인 백석의 연인이었다. 조선일보(월간여성)
의 기자이기도 했던 백석은 일본 청산학원 영문과를 나왔다. 해방무렵 북한에 있던
백석의 행방은 아직 밝혀지지 않고 있다. 전공과는 달리 백석은 토속성 짙은 시어(詩語)
를 고루 옮겨 심었다. 그는 자기가 머물고 있는 마을에 이어 오는 자연과 인간을 대상으로
시를 썼다.
"옛 성(城)의 돌담에 달이 올랐다/ 묵은 초가지붕에 박이/.
또 하나의 달같이 하이얗게 빛난다/
언젠가 마을에서 수절과부 하나가 목을 메어 죽은 밤도
이러한 밤이었지" (흰 밤) " 어느 사이에 나는 아내도 없고
또 / 아내와 같이 살던 집도 없어지고 /
그리고 살뜰한 부모요 동생들과도 멀리 떨어져서/
그 어느 바람에 쓸쓸한 거리 끝에 헤메이었다" (줄임)
사랑도 가고 인생도 가고 모든 건 쉼없이 변전하는가,
1월의 셋째주가 열리는 날입니다.
추운날씨지만 움크리지 마시고
언제나 즐거우시고 행복하시길 ~~~~~~~~~~
청산거사
'법정스님 글모음' 카테고리의 다른 글
[스크랩] 공간과 여백 (0) | 2010.09.27 |
---|---|
[스크랩] 미련없이 자신을 떨치고 때가 되면 푸른 잎을 틔우는 나무를 보라 - 법정 스님 (0) | 2010.09.27 |
[스크랩] 마음의 향기 (0) | 2010.09.27 |
[스크랩] 시인 백석과 기생 김영한의 사랑 이야기 (0) | 2010.09.27 |
[스크랩] ♧ 으뜸가는 행복 (0) | 2010.09.2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