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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서재에서 활짝 웃고 있는 괴짜 시인 송현. | 5~6년 전 나는 잡지에서 흥미진진한 기사 하나를 읽었다. 그것은 매우 솔직하고 진지한 공개 구혼장이었다. “저의 이름은 송현입니다. 올해 쉰넷, 돼지띠의 몸과 마음이 건강한 남자입니다(키 173cm, 몸무게 80kg). 이날까지 어디 아파 약을 먹어본 적은 한 번도 없습니다.
… 고향은 부산이고, 스물네 살짜리 딸은 전문학원에서 강사를 하고, 대학에서 연극을 전공하던 스물두 살짜리 아들은 군대에 갔습니다. 저는 동아대학교 국문과를 졸업했고, 그 대학원에서 현대문학을 공부했습니다.
1975년 월간 <시문학> 잡지에서 정주 선생 추천으로 등단한 뒤 시인으로, 칼럼니스트로, 동화작가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재산은 부산에 있는 집(대지 240평)과 현재 딸과 둘이 살고 있는 서울 답십리 소재 아파트(31평형) 한 채, 제 연구실로 쓰는 장한평 오피스텔 1개(15평형), 그리고 고향에 땅이 쬐끔 있습니다. 의료보험료를 월 8만 원쯤 내는데 내년에는 더 많이 낼 형편입니다.
…제가 꿈꾸는 행복한 생활에 대해 조금 말씀드리겠습니다. 저의 큰 소망 하나는 풀을 빳빳하게 먹인 하얀 옥양목 홑청을 한 베개를 베고 잠을 자는 것입니다.
어릴 때 어머니가 풀을 빳빳하게 먹인 옥양목 베개 홑청을 갈아 끼웠을 때, 그날 밤 저는 볼에 느껴지던 그 까끌까끌한 감촉을 지금까지 잊을 수 없고, 그때 제 코에 스치던 어머니 젖 냄새 비슷한 그 풀 냄새를 생생하게 기억합니다. 이것이 바로 제가 꿈꾸는 행복의 작은 원천입니다.
이런 나의 소박한 꿈을 존중해 줄 여자를 만나기 원합니다. 아내가 1주일마다 풀 먹인 하얀 옥양목 베개 홑청을 갈아주면 좋겠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너무 번거롭고 힘들다면 2주일에 한 번 갈아주어도 고맙게 생각하겠습니다. 아니, 2주일도 힘들다면 3주일에 한 번 갈아주어도 고맙게 생각하겠습니다.
바바리 코트가 썩 잘 어울리는 부부
…외모는 남에게 호감을 주는 정도면 족합니다. 제가 바바리 코트를 참 좋아하는데, 바바리 코트 입기를 좋아하면 금상첨화겠습니다. 멸치 젓갈을 좋아하는 여자면 좋겠습니다. 제가 멸치 젓갈을 너무 좋아하기 때문입니다. 김치도 멸치 젓갈 진액을 넣고 담그고, 부추김치도 멸치 젓갈 듬뿍 넣은 것을 좋아하기 때문입니다.
제가 조용필 노래를 좋아하기 때문에 이왕이면 그녀도 조용필 노래를 좋아하면 좋겠습니다. 담배는 태워도 좋은데, 술은 못 마시는 여자면 좋겠습니다. 분위기 깨지 않으려고 한 모금 입에 댔다 마는 정도의 실력이면 좋겠습니다. 혹시 술꾼이라면 앞으로 시간을 두고 노력해서 술을 끊겠다고 약속하면 상관없습니다….”
단숨에 외모와 건강상태와 가족상황을 말하고 취향과 재산상태까지 명료하게 소개하면서 따라 나왔던 풀 먹인 베개 홑청에 관한 이야기를 왠지 잊을 수 없었다(지금 다시 읽어 보니 베개 홑청이지만 나는 그때 이불 홑청이라고 기억했다).
그 공개 구혼하던 시인은 풀 먹인 이불 홑청을 갈아주는 여자를 만났을까? 늘 궁금했다. 풀 먹인 홑청이라…. 실없는 호기심일 수도 있고, 인간에 대한 탐구라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나는 몇 과정을 거쳐 송현 선생의 전화번호를 알아냈다.
전화 안에서 초등학생처럼 또박또박 “송현입니다”라고 말하는 그와 드디어 만날 약속을 했다. 당장 장한평 그의 작업실로 찾아갔다. 소문 듣기로 그 구혼장에 응모(?)한 사람이 600명이 넘었으며, 그 중 서류심사(?)를 한 뒤 마침내 한 사람을 택했다는 것이었다.
과연 어떤 사람이 ‘송현의 부인’으로 낙점되었을지 몹시 궁금했다. 의문은 금방 풀렸다. 벽면에 대형 브로마이드로 송현·최정원 부부의 활짝 웃는 사진이 걸려 있었기 때문이다.
아닌게아니라 두 사람은 바바리 코트(한 사람은 더플 코트)가 썩 잘 어울렸다. 둘의 파안대소는 하도 잘 어울려 오히려 눈물겨웠다. 뒤늦게 잘 맞는 짝을 만난 안심 어린 표정은 보는 사람을 괜히 감상에 젖게 하는 면이 있었다.
사진을 들여다보는 내게 송현은 “우리 최정원 선생 멋있는 사람입니다”라고 했다. 아내를 꼭 ‘최정원 선생’이라고 불렀고, ‘멋있는’이라는 수식어를 애용했다.
이사도라 던컨과 함석헌 선생과 모델 윤정의 사진이 섞여 놓인 그의 서가에서 그 셋의 거리만큼을 포괄하는 다채로운 이야기가 송현의 입에서 줄줄이 흘러 나왔고, 그 사이 사이 ‘멋있는’이라는 말은 별처럼 박혀 반짝거렸다. 어째서 공개 구혼장이라는 것을 쓰게 됐는지 먼저 물었다.
“인연이 깊었던 잡지 <샘이깊은물>에서 재미있는 글을 하나 써 달라는 청탁이 왔습니다. 나는 첫 번째 혼인에 실패한 후 10년 가깝게 아이들 키우면서 혼자 살고 있었어요. 아이들 도시락 반찬 만들어 주러 시장이란 시장은 다 돌아다니면서 살았습니다. 중앙시장·잠실새마을시장·영동시장·낙원시장 등 안 가본 데 없이 돌아다녔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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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현의 사무실 간판에는 ‘한글문화원’이라고 쓰여 있다. ‘한글기계화박물관’ 건립이 그의 목표이기도 하다. | 자고로 부부는 함께 성장해야 하나니…
왜 그렇게 돌아다녔느냐 하면, 그때 TV 방송에 얼굴을 자주 비치던 때여서 알아보는 이가 더러 있었고, 혼자 가끔 시장에 가면 자상한 아빠나 가정적인 남편이 되지만 자주 가면 혼자 사는 홀아비라고 수군댈 것이 마음에 걸렸기 때문이었다. 그는 그만큼 섬세하고 예민한 사람이었다.
그렇게 일상의 불편이 있었어도 재혼은 꿈도 꾸지 않았는데 문득 문득 ‘내게 딱 맞는 사람’을 만날 수만 있다면 굳이 혼자 살 이유가 없지 않은가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 ‘내게 딱 맞는 사람’은 어떤 사람일지 우선 짚어봤다. 이런 저런 조건이 짚어졌다. 가까운 데서 찾느니 이왕이면 전국을 뒤져 넓은 범위에서 찾으면 좋지 않을까 하는 데도 생각이 미쳤다.
“제가 출판한 책이 잘 팔리면 일간신문에 전면구혼광고를 내볼까 생각하던 차였는데 마침 재미있는 글을 써 달라는 청탁을 받고는 공개 구혼장을 써주겠다고 했지요. 스무여 통 편지가 오면 많이 올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뜻밖에 국내 최대의 재혼전문회사가 제게 재혼광고 모델을 제의하기에 못 이기는 척하고 수락했지요. 그 재혼전문회사가 제 웃는 사진과 공개 구혼장을 <조선일보>에 광고로 내는 바람에 650여 통의 편지가 왔어요. 어느 날 다른 사람들의 편지와는 전혀 다른, 내가 내 속을 전부 털어 보였듯 자신의 속을 다 털어내 보이는 멋있는 최정원 선생의 편지를 받게 됐습니다”
편지에서부터 강렬하게 이끌렸다. 만나 보니 과연 이 사람이 내 인연이구나 싶었다. 인연이란 이렇듯 싱거운 것이다. 공개 구혼장을 내서 수백 명 중에서 고르든, 부모가 정해준 단 한 사람을 택하든 알 수 없는 이끌림이 두 사람을 비끄러맨다.
공개 구혼장에 고백한 그의 이력을 자신의 말로 좀 더 훑어볼 필요가 있겠다.
“…저는 서라벌고등학교 국어교사 노릇을 할 무렵이던 1976년 결혼한 적이 있습니다. 저의 결혼 이야기를 <샘이깊은물>에 16년 만에 털어놓는 ‘내 혼인의 비밀’(1992년)이라는 제목으로 발표한 적이 있습니다. 그래서 공개 구혼장도 나와 인연이 깊은 이 잡지에 발표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저의 결혼은 그때만 해도 좀 특이한 결혼이었습니다. 결혼에 한 번 실패하고 네 살짜리 딸아이가 하나 딸린 여자와 결혼했기 때문입니다. 그때만 해도 총각이 처녀와 결혼하지 않고, 한 번 결혼에 실패하고 애까지 딸린 여자와 결혼하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은 아니었습니다.
그런 결혼을 하여 딸 하나, 아들 하나를 낳고 주위 사람들에게 아무 말 않고 살다 16년 만에 그 사실을 공개했더니 적지 않은 사람이 놀랐습니다. 그녀와 16년을 살다 1992년 정식 협의이혼했습니다.
그녀와 이혼한 이유를 한마디로 설명하기란 제 직업을 한마디로 설명하는 것보다 더 어렵습니다. 결혼할 때 제가 아내에게 제시한 조건이 딱 한 가지 있었습니다. 그것은 ‘매일 책을 30쪽씩 읽읍시다!’였습니다.
저는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성장이라고 생각했거든요. 여기서 말하는 성장은 정신적·영적 성장을 말합니다. 일생을 함께 살 부부는 함께 성장해야 합니다. 함께 성장해야 눈높이가 비슷해지기 때문입니다.
아파트 1층에서 보는 것과 21층에서 보는 것은 전혀 다릅니다. 이 비유가 꼭 맞지는 않지만, 부부가 함께 성장하지 않으면 이처럼 전혀 다른 시야로 세상을 바라볼 것입니다. 부부가 서로 눈높이가 달라 전혀 엉뚱한 시야로 세상을 다르게 보고 산다는 것은 참 불행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눈높이가 같거나 비슷하지 않으면 거기에 따르는 부작용이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우리는 손가락을 걸면서 이 약속을 했습니다. 그런데 이 약속을 제 아내는 한 달을 못 지켰습니다. 그러자 한쪽은 날로 성장하는 데 반해 한쪽은 제 자리에 머물러 있는 것이나 다름 없었습니다. 그러니 우리 부부의 사이가 마치 ‘옛날 울릉도 전화’처럼 됐습니다.
선로 사정이 나빠 서로 ‘여보세요! 여보세요!’ 하고 고함만 지르다 끊어지고 마는 전화 말입니다. 이렇게 서로 교신이 제대로 되지 않으니 의사소통이 원활히 되지 않고, 그러니 오해할 일이 생기고, 오해가 불신을 낳고, 불신이 둘 사이를 가로막는 두꺼운 벽이 됐습니다.
불신의 벽은 날로 그 두께와 높이를 더해갔습니다. 그러니 한 집에 살면서도 결국 남처럼 됐고, 마침내 여러 가지 부작용과 문제가 생겨 이혼하고 말았습니다.”
살다 헤어지는 사람이 늘어나는 세상이 됐고, 자연히 재혼도 흔해졌다. 송현 선생의 경우를 보면서 우리는 인생을 간접체험할 수 있을 것 같다. 송현·최정원 커플은 결혼 이후 재혼에 관한 카운슬러가 됐다. 재혼이라는 어감이 달갑지 않아 새로 혼인한다고 ‘새혼’이라는 말을 그가 만들었고, 이 말은 벌써 네이버 국어사전에 보통명사로 올랐을 정도로 널리 쓰인다.
‘송현새혼학교’라는 것도 차렸다. 제대로 새혼하려면 미리 짚어봐야 할 것이 있고, 반드시 알아둬야 할 것이 있다는 게 그의 지론이다. ‘새혼학교’에서는 그런 것을 가르친다. 경기대 사회교육원에 결혼정보관리사 과정을 개설하고(2004년) 주임교수가 된 것도 그의 특별한 경험 때문이다.
<인간극장> 소개, 눈물로 치른 ‘새혼식’
둘은 새혼 1주년 기념으로 송현은 최정원을 ‘새혼회사’ 사장으로 임명했고, 최정원은 송현을 ‘새혼학교’ 교장으로 임명했다. 혼인정보회사와 혼인준비학교를 시작했던 것인데, 기질상 사업을 성공적으로 이끌지는 못했지만 새혼을 하기 전에 반드시 교육을 받아야 한다는 강한 메시지 하나는 우리 사회에 던졌다.
산소호흡기를 꽂고 병석에 있던 장인이 돌아가시기 전에 서둘러 혼례식부터 올렸고, 송현은 시인답게 그 과정을 시로 썼다. 그게 또 눈물겹다. 양쪽 자녀가 모두 참석해 뒤늦은 부모의 행복을 축복해 줬음은 물론이다.
그들의 혼인 이야기는 KBS TV <인간극장>에서 5부작으로 방영되기도 했다. 그날의 장면을 절절하게 보여주는 시가 ‘눈물의 새혼식’(2003)이다.
삼 년째 병석에 계셨던 팔순 장인어른께서 응급차에 실려 원주의료원 중환자실에 입원을 하셨다는 기별이 왔다. / 우리가 문병갔을 때 경주 최씨 고집과 깐깐한 성격으로 동네 무례한 젊은 것들이나 경우에 맞지 않는 일을 보면 문막 골짜기가 쩌렁쩌렁하게 호령하고 면사무소로 읍내로 펄펄 날아다녔던 기개는 흔적이 없고 산소호흡기를 꽂고 이승의 마지막 남은 몇 가닥 숨조차 힘겹게 쉬고 있었다./ 무거운 발길로 병동 복도를 나오면서 장인어른 돌아가시기 전에 마지막 효도하는 셈치고 서둘러 혼례식을 올리자고 내가 말하자 아내는 대답을 못하고 내 가슴에 얼굴을 묻고 흐느꼈다./ 누구의 눈물인가 탄식인가 비탄인가 통곡인가 전날 밤에 비가 쏟아졌는데 혼례식 날은 거짓말처럼 짜고 치는 고스톱처럼 얄밉게 하늘이 맑았다. 신랑측 하객으로 부산 큰누나, 수지 작은누나, 딸 하예진, 아들 하슬린이 왔고, 신부측 하객은 원주 오빠와 큰언니, 신광당 둘째언니 경우 바른 청주 셋째언니, 수원 남동생, 서울 여동생, 고종사촌 내외와 큰딸 호임이, 둘째딸 호정이가 왔다. 사회를 맡은 청주 언니가 신랑 신부더러 부모님께 인사를 하라고 하자 우리는 안방에서 산소호흡기를 꽂고 상체를 절반으로 접은 채 있는 대로 다 고꾸라뜨리고 가쁜 숨을 몰아쉬면서 금방이라도 넘어질 듯한 장인과 그 옆에 앉은 장모 앞에 큰절을 올렸다. 딸에게 유언처럼 뭐라고 말을 하려는 제 아버지 손을 잡고 말하지 않아도 다 안다고 하면서 신부가 그 동안 깨물고 있던 눈물 항아리를 쏟고 좁은 어깨를 들먹이며 서럽게 울었다. 그 순간 나는 이태 동안 치매로 고생하다 돌아가신 우리 어머니와 농약중독으로 돌아가신 우리 아버지를 보는 것 같아서 내 불효와 내 설움에 더 목이 메고 서러워 울컥 눈물을 쏟았다. 나는 신부 손가락에 실반지 하나 끼워주고 신부는 내 손목에 내가 죽어도 멎지 않을 튼튼한 시계를 채워주고 신부 큰딸 호임이가 나에게 좋은 글 많이 쓰라고 파카 만년필을 둘째딸 호정이는 원고료 많이 받아 제 엄마 고생시키지 말고 행복하게 살라고 지갑을 선물하고, 내 딸 하예진은 해외 신혼여행 경비 하라고 신부에게 예금통장을, 내 아들 하슬린은 신부에게 국화향기처럼 늘 아름다움과 매력을 잃지 말라고 신부가 좋아하는 국화꽃을 선물했다. 그때 난데없이 KBS 이동훈 피디가 청주 언니 귀에 뭐라고 한 마디 하자 사회자는 내 딸 하예진에게 편지를 읽게 했다. 여럿 앞에서는 더더욱 읽을 준비가 전혀 안 된 하예진은 차마 거절을 못하고 쭈뼛쭈볏하다가 마지못해 자리에서 일어섰다. 첫 줄도 읽기 전에 목이 메어 첫 줄은커녕 첫 단어 첫 음절 운도 떼지 못하고 스물여섯 다 큰 처녀가 바보처럼 서서 한참을 울먹이자 분위기가 숙연해졌다. 연신 코를 훌쩍이던 나는 눈앞이 캄캄해졌고 하객들도 숨을 죽였다. 제 애비 에미가 이혼하여 외롭고 슬플 때 애비를 원망한 수많은 힘겨웠던 날들을 말할 때 내 눈에는 뜨거운 눈물이 쏟아졌고 어느덧 철이 들어 애비를 이해하게 되었다는 대목에서는 베테랑 최춘석 촬영감독의 카메라도 흔들렸고 양 어깨 들썩이며 들짐승처럼 울던 나보다 신부와 하객들이 더 많은 눈물을 닦았다고 했다. 그렇다, 그날 여나문명 하객과 KBS 8밀리 카메라만 없었다면 강원도 원주 문막 촌구석 그 오두막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이웃도 모르고 옆집 강아지도 알 리가 없다.(2003)
혼례식을 올린 후에도 살림을 합치지는 않고, 남편은 서울에서 아내는 수원에서 살고 있다. 나흘은 따로, 사흘은 함께 사는 방식이다. 이것을 그는 ‘나따사함’이라는 신조어로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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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현 뒤편의 대형 걸개 사진에는 ‘새혼’의 모토가 쓰여 있다. 오른쪽은 그의 부인 최정원 씨. | ‘나따사함’하여도 琴瑟은 좋아…
‘나흘은 각자 살고, 사흘은 함께 사는’ 나따사함 방식은 각자 직업을 가진 부부의 독립성을 보장하고, 관계의 긴장을 유지하는 데도 좋고, 서로 이해하고 양가의 문화적 간극을 좁히고 조율하는 데도 썩 좋은 방식이 된다는 것이다. 바로 그것, 베개 홑청에 관해 물어보지 않을 수 없다.
“하하. 그거요? 처음 한두 번 해주고는 안 해줘요. 아내도 자기 일로 바쁜데 그것을 요구할 수 없어요. 사람들은 이상하게 베개 홑청 이야기를 많이 하더라고요. 그게 자신 없어 신청을 포기했다는 사람도 있어요. 잘 읽어 보시면 매주가 아니고 6개월에 한 번도 좋다고 말했던 건데…. 그러나 그게 대수입니까? 다른 것 좋은 것이 있는데 그딴 것 한 가지쯤 포기하면 어떻습니까….”
송현 선생의 홈페이지에 들어갔더니 지난 달에 일본으로 공부하러 떠난 최정원 선생의 딸에게 써준 기도문이 있다. 함께 읽어도 좋을 듯해 여기에 베껴 둔다. 출국하기 이틀 전 밤새워 써서 딸의 짐에 끼워줬다고 한다. 아침마다 이렇게 기도하며 하루를 시작하라는 당부다.
“이 아침에도 건강하게 눈을 뜬 것에 감사하며, 오늘 하루를 내 생애에서 처음이자 마지막 날처럼 생각하고 온 몸으로 하루를 치열하게 살겠습니다. 오늘도 내게 새로운 파도가 밀려와 내가 새로운 경험을 하고 새로운 도전을 하게 해주십시오. 나는 파도에 지쳐 쓰러지는 한이 있어도 절대로 무릎 꿇지 않고 다시 일어설 것입니다.
내 꿈을 이루는 날까지 매일 공부할 것이며, 사치하지 않을 것이며, 교만하지 않을 것이며, 게으르지 않을 것이며, 내 분수에 넘치는 어떤 것도 하지 않을 것이며 부러워하지도 않을 것입니다. 매일 누구에게서나 어떤 상황에서나 작은 것이라도 배울 점을 찾아 배우며, 직장과 이웃을 내 성장의 도장으로 생각하고 배우면서 실력을 기르겠습니다.
나는 우물 안에서 살지 않을 것입니다. 드넓은 세상으로 나가 내 재능과 꿈을 마음껏 펼치는 진정한 자유인으로 살 것입니다. 비록 일본에서 일본어를 더 배우고 일본을 더 배우면서도 결코 나의 정체성을 잃지 않을 것이며, 내 조국과 우리 말과 글의 소중함을 잊지 않을 것입니다. 나는 항상 새로운 도전을 할 것입니다.
나는 어떤 실패도 두려워하지 않을 것입니다. 어떤 실패라도 내 성장의 계기와 도약의 발판으로 삼겠습니다. 다만 같은 실패를 되풀이하지 않게 항상 내 자신을 경계하겠습니다.
오늘도 부모님의 고마움과 내 가족과 조국의 소중함을 기억하겠습니다. 온종일 소처럼 중노동(?)을 20여 년째 하면서 내 동생 호정이와 나를 이만큼 키워준 우리 어머니의 땀과 눈물과 한숨을 한순간도 잊지 않을 것이며, 그 은혜의 만분의 일이라도 갚기 위해 어떤 열악한 식사도, 어떤 불편한 환경도, 어떤 어려운 상황도 원망하거나 불평하지 않고 감사하게 생각하겠습니다.
내가 한 분야의 전문가가 되는 것은 물론 한 인간으로서 홀로 설 수 있는 멋진 자유인이 되어 내 조국 대한민국으로 돌아갈 때까지 나는 일본의 실정법을 어기는 어떤 생각이나 행동을 하지 않을 것이며, 나의 집안과 부모님께 누를 끼치는 어떤 행동도 하지 않을 것입니다.
내 생애의 처음이자 마지막 날인 오늘 아침 나는 멋진 하루를 시작할 것입니다. 하호임, 파이팅!”
송현은 짧은 말로 도무지 규정할 수 없는, 희한하고 난해한 사람이다. 여기서는 일부러 혼인과 관련한 이야기만 했지만, 그가 시도하고 기획한 일은 스무 가지도 썩 넘는다.
공병우타자기주식회사 대표이사에 취임하던 1978년 이후 매일 생애 마지막 날처럼 치열하게 살기 위해 유서를 써서 몸에 지니고 다녔고, 책을 구입하는 어린이가 주인공이 되는 그림동화 <도깨비학교 문고>를 써서 400만 권 이상이 팔린 밀리언셀러 동화작가이고, 전문서적 집필을 위한 송현 신발장 이론을 창안해 지도하고 있다.
그림동화에서부터 전문서적까지 60여 종 써…
이라크민병대에 지원하려고 ‘한국민간참전지원단’이라는 것을 만들기도 했으며(2004), 치매를 앓다 돌아가신 어머니 유골상자를 10여 년째 머리맡에 모시고 산다.
그에게는 네 분의 스승이 있다. 함석헌·공병우·라즈니시와 한창기(<뿌리깊은나무> 사장)가 그들인데 그 네 분의 기일이면 스승을 기리는 의미에서 해마다 4일씩 단식한다.
그 동안 출간한 책만 해도 60여 종이다. 앞으로 100여 권을 더 쓸 요량이라고 한다. 그는 ‘하자형’ 글은 쓰지 않고 ‘했다형’ 글만 쓴다. 행동하지 않고 실천하지 않은 것을 말만 하고 글만 쓰는 것은 가치 없다는 생각에 철저하기 때문이다. 송현에 관한 글이라면 어줍잖은 내 말보다 그의 말을 그대로 옮기는 것이 낫다고 여겨 그의 글을 잔뜩 인용한 이유이기도 하다.
시 낭송법에 관한 이론적 체계를 수립한 <시 낭송 잘하는 법>, 신문에 1년간 연재해 팬클럽이 생기고 수 만 명의 팬을 확보한 새로운 성 이론인 SS이론(송현의 성인 Song의 S와 sex의 S를 딴 명칭으로, 아무려나 그는 이름도 잘 짓는다)을 담은 <여성중심의 사랑>, 2시간 연습으로 20m 헤엄치는 <송현식 수영 비법> 같은 책은 송현식 사고법이 아니라면 시도할 수 없었을 독창적 역작들이다.
그는 한글타자기를 발명한 공병우 박사와 함께 한글 자판 통일을 위해 수십 년 싸웠고, 그 싸움은 현재도 진행 중이다. 박정희 정권 때 자판투쟁 7년전쟁에 뛰어들어 자판투쟁의 불씨를 살렸고, 과학적인 3벌식 자판 통일을 위해 상공부 장관을 상대로 행정소송을 벌였다.
뿐만 아니라 그는 청와대에 표준 자판 폐지를 건의한 후 과학기술처와 공식 대담한 자리에서 결국 3벌식이 더 우월하다는 승복을 받아냈고, <한글기계화 개론>을 썼으며, <한글자형학>을 집필해 ‘한글자형학’이라는 새로운 학문을 만들었다. 이런 공으로 한글학회에서는 그를 ‘한글문화인물’로 선정하기도 했다.
지금 그가 가장 큰 관심을 보이는 것은 두 가지다. 첫 번째는 ‘한글 기계화의 아버지’ 공병우 박사 기념관을 포함한 한글기계화박물관을 건립하는 일이고, 두 번째는 자신이 창안한 ‘생활실천선’인 무향선(無向禪)을 세상에 펼쳐 행복을 전하고 아름다운 세상을 만드는 것이다.
그는 라즈니시 입문서를 썼고, 라즈니시 예술론을 쓴 명상 쪽 전문가다. 장한평 그의 연구실에는 무향선원(無向禪園)이라는 팻말이 붙어있다. 지난해에는 강원도 원주 치악산 자락에 정신세계의 유목민을 교육하는 무향자연학교를 설립할 터전을 마련했다. 그러나 아직 길은 멀다. 사무실을 나서면서 장난스레 묻는다. “송현 선생은 지금 행복하십니까?”
그러나 돌아오는 대답은 더없이 진지하다.
“행복할 때도 있고 불행할 때도 있습니다.”
송현, 올해 환갑이 됐지만 그는 아직 어떤 틀로도 가둘 수 없다. “지금 여기, 처음 만난 것처럼! 다시는 못 만날 것처럼!”이라는 모토로 시간과 공간과 인간을 치열하게 만나는 것, 그것이 그의 명상과 시(詩)의 요체라고 생각한다.
필자 김서령 psyche325@hanmail.net
* 경북대 국문과를 졸업하고 대구 중앙중학교 교사와 매일경제신문,샘이 깊은 물 객원기자로 활동했다. 1988년 동서문학상 신인상을 수상했다. 저서로 '김서령의 家''여자전'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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