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동글

[스크랩] 법정스님과 길상사와 시인백석과 김영한의 인연

병노 2012. 6. 27. 13: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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吉祥寺
 
'人生은 느끼면 비극이고, 생각하면 희극이다' 삼청각, 청운각과 더불어 한시대를 풍미했던 최고급 요정 대원각 이자리에 "길상사" 라는 사찰로 다시 태어난다. 대원각 안주인 김영한 여사의 뜻으로 대원각을
대한불교 조계종 송광사 분원으로 등록
1996년 5월 20일에 대원각은 기존 건물을 개보수,
새로운 사찰인 길상사로 자리잡는다. 특이한 점은 여느사찰의 일주문과는 다르게 사천왕이나
화려한 탱화가 보이지 않았다. 성북동 하면 부잣집 들이 연이어 있고 여러나라의 대사관저가 몰려있는곳 그곳의 중심이라 할수있는 곳에 푸름이 짙은 길상사가 있었다. 극락전의  전경 대원각일 때에는 "금실" 과  "은실" 이 있던자리 라고한다. 지장도량 이라서 아미타부처님을 중앙으로 왼쪽엔 관세음보살 오른쪽에 지장보살님이 계신다. 사찰의 코스모스는 또다른 아름다움을 가지고 있는듯 하다. 가련헌 자태가 한껏 단장한 옛여인의 모습 일까.... 아직 붉은 상사화가 몇송이 남아있다. 꽃무릇 이라고도 하고 석산 이라고도 하는 꽃... 서울에서도 이렇게 만나지다니 감개무량 하다.
철이 지나서인지 많이 시들어 대공만 남아 있는게 많다. 옛날 한여인이 스님을 사랑해 매일을 그리워 하였지만 결코 만날수
없는 인연 안타까운 마음으로 절 앞마당에 꽃을 심었는데 잎이 진다음에 꽃이피고, 꽃이 진다음에 잎이나니 꽃과 잎은 영원히 만날수 없는 인연 이 여인의 운명과 흡사하여 상사화라 부르지 않았을까... 종각이 있는 자리는 옛대원각 시절 경비실 이었던 것이라 한다.
 
吉祥寺의 역사는 매우 짧으면서도 그 설립 계기가 특이해 잘 알려져 있다 이 사찰은 1960년대와 80년대 말까지 삼청각,청운각과 함께 최고급 요정의 하나였던 대원각자리에 세워진 사찰이다 서울 성북동 三角山 깊숙한 산자락의 대원각 주인이었던
김영한(金英韓)여사가 7000여평의 대지와 건물 40여동 등 천억원대의 부동산을 송광사에 시주해 97년에 지금의 吉祥寺로 탈바꿈하게 되었다고 한다. 요정 대원각의 주인 김영한(金英韓) 할머니는 법정 스님께 대원각을 시주하려는 뜻을 밝힌다. 싯가 천억원 대 재산을 시주하겠다는 김영한 할머니 무소유를 말씀하시며 10년간 받지않겠다는 법정스님 결국 김영한 할머니가 굴복!
법정스님꽈는 무관하게(3/18 수정함)
대원각을 대한불교 조계종 송광사 분원으로 등록하여 길상사가 되었다. 이날 법정스님은 김영한 할머니에게 길상화 법명을 주고
108 염주를 할머니 목에 걸어주었다. 그후 길상화는 길상사 경내를 산책 하면서 "나 죽으면 화장해 눈 많이 내리는 날 길상사에 뿌려주세요. 유언하고 이튼날인 11월14일 108 염주 한 벌을 목에 건 채 83세에 세상을 떠난다. 그해 12월14일 흰눈이 많이 내리던 날, 그녀의 유언대로 길상사 경내에 스님들이 재를 뿌려주었다. 길상사는 쳔주교와도 연(緣)이 깊은데 개원 법회엔
김수한 추기경이 참석하였으며, 2000년엔 천주교신자인 최종태씨가 성모마리아상과 유사한 형태의 관세음보살 석상을 조각하여
봉안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연유로 길상사에선 수녀님과 천주교 신자의 모습을 종종 볼 수 있다.
 
 
 
 
천주교신자인 최종태씨가 기증한 성모마리아상과 유사한 형태의 관세음보살 석상 길상사를 기부한 김영한 할머니 길상화(吉祥華) 시인 백석(白石)과의 소설 같은 러브스토리.
청산학원 3학년 시절의 백석 18세 때의 김영한 (자야 김진향)

 

 

 

 
서울에서 태어난 김영한은 집안이 몰락하자 가난한 탓에 16살에 몸 약한 신랑에게 팔려갔다. 우물가에서 빨래하는 사이에 남편은 우물에 빠져 죽는다. 시어머니의 고된 시집살이 끝에 눈물을 머금고 집을 나온 그녀는 가족을 먹여 살리기 위해 스스로 한성 기생 ''眞香''이 되었다. 가무와 궁중무를 배워 서울의 권번가에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잡지에 수필을 발표할 정도로 미모와 시와 글, 글씨,

그림에도 재능이 뛰어난 기생이였다. 스물 세살때 흥사단과 조선어학회에서 활동했던 스승 신윤국의 도움으로 일본 도쿄로 유학을 떠나게 된다. 하지만 스승이 투옥됐다는 소식을 듣고 귀국해 함흥감옥을 찾아가지만 면회를 거절당하게 된다. 그리하여 신지식 여성에서 다시 기생의 길을 택한 그녀 함흥기생이 되면 지역유지의 도움으로 스승의 모습을

볼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이 때 시인 백석과 운명적인 만남을 갖게된다. 김영한 보다 네 살 더 많았던 백석은 일본 유학을 마치고 함흥 영생여고 영어교사로 있다가 우연히 만난 기생 김영한과 첫만남에서 그녀의 손을 잡고 다짐한다 “죽음이 우리를 갈라놓을 때까지 이별은 없을 것” 하지만 백석 집안에서 아들이 기생에게 빠져있다는 소식을 듣고 서둘러 다른 여자와 결혼을 시키게 된다. 그러나 결혼식날 밤 집을 빠져 나온 백석은 영한에게 달려와 만주로 달아나자고 설득하지만 영한이 거절하자 백석은 1939년 만주로 떠나게 된다 이것이 두 사람 사이에 영원한 이별이 되었다. 백석은 만주를 유랑한 뒤에 광복을 맞아 고향으로 돌아왔지만, 이미 그녀가 떠난 후 그녀가 서울로 돌아간 뒤였기에 만날 수 없었고 그것이 영영 이별이 된다. 평생 백석을 그리워한 김영한은 1996년 2억원을 들여 자신의 연인 백석을 기리는 "백석문학상"을 재정하고 같은해에 대원각을 시주[송관사에 공유/법정스님과는 무관] 하게 된다. 침묵의 집 맞은편 다리를 건너면 무소유를 몸소 실천한 김영한 할머니의 공덕비가 세워져있다. 金英韓여사의 일화 한가지.. 어느날 백석은 진향이 사들고 온 ‘당시선집’을 뒤적이다가 이백의 시 ‘자야오가(子夜吳歌)’를 발견하고는 그에게 ‘자야(子夜)’라는 아호를 지어준다. ‘자야오가’는 장안(長安)에서 서역(西域) 지방으로 오랑캐를 물리치러 나간 낭군을 기다리는 여인 자야의 애절한 심정을 노래한 곡이다. 한때 고등학교 교과서에는 이백의 춘하추동 오언율시 중에서 가을 편이 ‘장안 달 밝은 밤에’로 소개된 적이 있다. 진나라 때부터 민간에서 불려진 노래로 이백 외에도 중국의 여러 시인들이 ‘자야가’를 썼다. 백석이 하늘에 맺어준 여인에게 ‘자야’라는 아호를 붙여준 것은 자신에게 닥칠 운명을 알고 있었던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김영한은 ‘내 사랑 백석’에서 이렇게 회상하고 있다. ‘아마도 당신은 두 사람의 처절한 숙명이 정해질 어떤 예감에서, 혹은 그 어떤 영감에서 이 ‘자야’라는 이름을 지어주셨던 것은 아닐까.’ 함흥에서 서울로 먼저 올라온 사람은 자야였다. 백석이 당시로는 최고의 직장인 고보 영어교사 자리를

그만두게 된 것도 자야 때문이었다. 이런 일도 있었다. 백석은 조선축구학생연맹전 대표선수 인솔 교사로 서울에 올라와서는 학생들만 여관에 투숙시켜놓고 자신은 정작 청진동 자야의 집에서 사랑을 불태웠다. 이 사실이 밝혀져 함흥여고보는 발칵 뒤집혔고 백석은 미련없이 자야의 곁에 있기 위해 사표를 던진다. 백석은 그 녀를 子夜라 불렀는데 子夜가 죽기 열흘전 기운없이 누워있는 노령의 김영한여사에게 젊은기자가 이렇게 물었다 - 천억원대의 재산을 내놓고 후회되지 않으세요? 무슨후회? - 그 사람 생각을 언제 많이 하나요? 사랑하는 사람을 생각하는데 때가 있나.. 기자가 어리둥절 ??? - 천억을 내 놨으니 만복을 받으셔야죠 그게 무슨소용 있어.. - 다시 태어 난다면 어디서.. 다시 한국에서? 나.. 한국에서 태어나기 싫어.. 영국쯤에서 태어나서 文學 할꺼야.. - 그 사람 어디가 그렇게 좋았어요? 천억이 그 사람 詩 한줄만도 못해.. 다시 태어나면 나도 詩를 쓸거야.. 김영한 여사의 또 다른 일화 80평생 보통사람과는 다른 인생을 살다가신 분 서울 대원각 부지에 길상사를 지어 기부하신 분으로도 잘 알려진 그 분. 1999년 12월 어느 날 KAIST에 김 영한 여사의 유언장이 전달되었다. 국가과학기술 영재양성에 써달라는 유언과 함께 100억원이 넘는 김영한 여사 소유 부동산을

KAIST에 기부하고 빈 몸으로 떠나신 분. 그 분은 힘든 젊은 시절을 보내면서 가난한 나라의 설움을 뼈저리게 느끼셨습니다. 우리나라가 부디 부강한 국가로 발전하기를 기원하면서 생을 마치시는 순간에도 국가과학기술발전을 위해

잔여재산을 기부하신 아름다운 분 -모셔온 글과 사진-

 

 

 

[3/18 추가한 내용]

 

 法頂스님이 입적한 吉祥寺

前요정 대원각 주인 子夜(김영한) 여사가 기부(시주)/싯가 1000억원

국어

입적1[入寂]

[명사] [불교] 중이 죽음.

영어

입적   1. entering nirvana 2. the death of a Buddhist priest
 
이 타이틀에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대원각 주인 子夜가 무소유 法頂스님에게 직접 기부한
것으로 알고 있다.
그것은 인터넷상에 올라온 글들이 거의 옮겨 오면서 명확한 사실 관계를 파악하지
못한데에 기인한다고 본다. 
 
法頂스님이 거절하다가 吉祥寺 창건
이 타이틀에서는 무소유 法頂스님께서 처음 몇번 거절하다가 기부를 받아 드린 것으로
알게 된다.
 
法頂스님이 10년동안 거절하다가 吉祥寺 창건
이 타이틀에서는 무소유 法頂스님께서 10년 동안이나 거절하다가 마침내 기부를 받아
드린 것으로 알게 된다.
子夜여자의 끈질긴 "받으세요?""받지 않겠다"의 10년간의 공방을 법정스님께서 마침내
기부를 받아 드린 것으로 표현되고 있다.
법정스님이 입적하시고 나서 지난 3월12일부터 거의 모든 인터넷상의 게시글에 의하면,
법정스님께서 싯가 1000원 상당의 대원각 건물을 주인인 자야여사로 부터 기부받은
것으로 알고 있었다.
그래서 무소유를 실천한 사람이 子夜 여사라고 칭송하게 되었다.
 
이번에 법정 스님의 입적으로 길상사(吉祥寺)가 크게 부각되었다. 그에 더하여 대원각
이나 김영한이라는 이름도 떠올랐다. 길상사는 법정 스님이 세운 사찰이나 그것을
세우는 데 지대한 공을 세운 이는 김영한이었다
 
법정스님의 입적으로 길상사가 관심의 대상이 된다.
 
그러나 최근에서야 법보신문에서 아주 중요한 자료 하나를 발견했다.
 
이 자료에 의하면 법조스님이 길상사 기부와는 무관하다는 내용을 밝히고 있다.

 

 

 

 

아랫 글은 다움넷 인터넷상에서 [홍매 보며 짓던 미소 그립니다]

또는 [맑고향기롭게 본보장]이라 검색하면 [웹문서]에서 열람이 가능하다

 

홍매 보며 짓던 미소 그립습니다 /맑고향기롭게 본부장 윤청광

법보신문 1040호 [2010년 03월 13일 15:07]

http://www.beopbo.com/article/view.php?Hid=65487&Hcate1=1&Hcate2=7&Hcmode=view

 

 

 

 

홍매 보며 짓던 미소 그립습니다
‘곁에서 본 법정 스님’ 맑고향기롭게 본부장 윤청광
기사등록일 [2010년 03월 13일 15:07 토요일]
 

 

“나의 전재산을 스님께 시주할테니 받아주세요.”
“나는 받을 수 없으니 다른 분한테 기증하십시오.”
한국 2대 요정 중 하나였던 서울 ‘대원각’의 주인 김영한 여사가 『무소유』라는 법정 스님의 책을 읽고 감동, 싯가 “천억 원을 홋가한다”는 성북동의 땅과 건물을 생면부지의 스님께 “조건 없이 시주할테니 절로 만들어 달라”고 간청했다.

 

이렇게 해서 “받으세요” “못받겠다”하는 희한한 실랑이가 무려 10년 간 계속되었고 결국 스님의 무소유 고집에 김영한 여사가 굴복,

전 재산을 송광사에 기증함으로써 스님은 스님대로 ‘무소유’고집을 지키시고, 김 여사는 김 여사대로 요정을 절로 만드는 소원을 이루어 1997년 마침내 ‘맑고 향기롭게’ 근본도량 길상사가 탄생하게 되었다.

 

동서고금의 역사상 전무후무할 이 전설같은 10년 실랑이를 지켜보면서 나는 참으로 법정 스님을 가까이 모실 수 있는 것만으로도 행복한 사람이었다.

[이하 생략]

 

 

출처 : 생활불교
글쓴이 : 하얀마음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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