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심

[스크랩] “부처님오신날 모두 성불했으니 행불(行佛) 합시다”

병노 2012. 6. 24. 14:07

“부처님오신날 모두 성불했으니 행불(行佛) 합시다”

효심이 불심이니, 은혜 갚고 살면 본래성품 회복

선지식을 찾아서 _ 정무 스님(조계종 원로의원, 안성 석남사 회주)

 

 

황사와 비가 연달아 봄날 하늘을 찌푸둥하게 하더니, 2011년 4월 28일 아침은 유난히 화창하다. 바쁜 일상에서 탈출해 모처럼 고요한 산사에 주석하는 선지식을 찾아나선 탓일까. 경기도 안성시 금광면 상중리에 위치한 석남사 가는 길은 313번 지방도로 주변에 벚꽃이 유달리 환하게 피어 나그네를 반긴다. 이윽고 마둔호수를 지나 상촌마을 뒤에서 산사로 이어지는 길이 보인다. 길옆에는 맑은 물이 흐르는 계곡이 있고, 한껏 푸르름을 자랑하는 봄 풍경이 마음까지 저절로 맑히는듯 하다.

서운산(547m) 자락에 아늑하게 둥지를 튼 석남사는 어느 절 보다 편안함을 준다. 쌍둥이 처럼 귀엽게 서 있는 2기의 석탑(향토유적 제19호)과 무척 정감이 가는 보물 제823호 영산전을 지나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대웅전에 들어가 부처님을 참배한다. 대웅전에서 산세를 바라보니, 절이 주변 봉우리에 연꽃처럼 둘러싸여 아늑하게 앉아있는 형상이다.

조계종 원로의원이자 석남사 회주이신 정무 큰스님을 친견하기로 한 약속시간이 남아 있어 도량 곳곳을 카메라의 눈으로 들여다 본다. 가지가지 고운 빛깔의 꽃들과 나뭇잎, 연못으로 구성된 아기자기한 도량이 불사에 공들인 큰스님의 정성을 가늠케 한다. 특히 금광루(金光樓)에 쓰여진 한글 주련은 정무 스님이 이 도량에 주석한 포부를 드러내는 듯하다.

 

서운산 아래

금광루에서

부처님 광명

다시 빛내리.

 

종무소 건물의 주련 역시, 큰스님의 가풍을 단적으로 표현한 글귀다.

 

우주는 한 집안

중생은 한 가족

서로 원망 말고

은혜만 갚아라.

 

도량은 아담하지만 절 주인의 뜻은 광대하고 실천행은 깊이가 있음을 짐작하고도 남는다.

 

 

잠시, 약수터에 앉아 돌 웅덩이 안의 개구리 두 마리를 들여다 보며 ‘내가 저 우물 안의 개구리로구나’하고 생각하고 있으려니, 정무 스님이 공양간에서 주지스님의 부축을 받으며 거사 두 분과 함께 나오신다. 인사를 드리니, 큰스님은 영산전 옆에 우뚝 선 부모은중경탑으로 안내한 후 자랑삼아 설명을 하신다.

“이 탑은 세계에서 유일한 탑이여. 옛날에 없던 양식이라 문화재 당국에서 허가를 잘 내주지 않았지. 용주사에서도 그랬지만, 먼저 탑을 세우고 그 취지를 설명한 후 허가를 받았지.”

경로효친(敬老孝親) 사상의 실천이 절실한 말세 중생을 위해 세운 이 새로운 탑이 언젠가는 귀한 문화재가 될 날이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큰스님이 머무는 요사채는 소박하다. 손수 우전차(雨前茶)를 우려 주시며 노스님은 선다일미(禪茶一味: 선과 차가 한 맛이다)의 법문을 하신다.

“차는 향과 빛깔과 맛을 함께 음미해야 해. 차의 빛깔은 녹색-황색-적색 순으로 좋지. 차는 혈관에 때 낀 것을 씻어내는 작용을 해. 병은 혈관이 탁해지는 데서 오는데, 차는 혈관을 맑게 해서 중풍과 같은 병을 예방하지. 몸에 탁한 기운을 씻어내듯이 탁한 마음을 씻어내는 게 수행 아니겠나.”

부처님오신날을 눈앞에 두고 큰스님을 친견했으니, 부처님 오신 뜻을 묻지 않을 수 없다.

“부처님께서 이 땅에 출현한 까닭은 무엇입니까?”

“상실한 자아를 찾아주려고 오셨지. 잘 살고 못 사는 것 보다 어떻게 살아야 바르게 사는가. 자기를 찾아라. 이 자기가 뭐냐? 이 뭣고?”

정무 스님은 안으로는 ‘이 뭣고?’ 화두를 갖고 살되, 밖으로 그 무엇을 구하고 찾는 것은 틀렸다고 강조한다. 안으로 자성을 찾되 부모와 자녀, 백성을 위해 사는 것이 부처님께서 제시한 진리라는 것이다.

“자기 자신만을 위해 사는 놈은 나쁜 놈이여. 그래서 나는 ‘~을 위하여 살자’고 말하지. 이웃과 국가를 위해 살자는 거여. 취미와 오락, 욕망을 쫓아 자기 자신만을 위해 산다면 불자의 길과는 더욱 멀어지지.”

불교의 목적은 ‘나’를 찾는 길인 동시에, 모두를 위한 길이란 말씀이다. 그러나 우리는 어느 한 곳에 치우치기 마련이다. 수행과 보살행을 더불어 실천하는 것이 불교의 본뜻임을 알면서도 어느새 자기 합리화에 빠진다. 결국엔 불심(佛心)이 아닌 이기심(利己心)에 끄달린 삶 아닌가.

“부처님은 80년 세월, 그해 2월 보름까지 걷고 또 걸으셨어. 마지막엔 이렇게 말씀하셨지. ‘아난아, 수레가 낡았구나. 자리를 깔아라. 이 가짜 육신을 벗어야겠다.’ 이 육신을 짊어지고 사는 동안이 자기들이여.”

그렇다면 인생이란 과연 무엇일까? 정무 스님은 “모른다!” 이것이 정답으로 가는 길이라고 말한다. 모르는 것, 그래서 화두의심이 생기고 ‘이 뭣고?’하고 참구하는 것이 정답으로 가는 지름길이라는 말씀이다.

 

“오늘날 정신과학에서는 싯다르타 태자처럼 6년 만에 불생불멸(不生不滅)의 실상(實相)자리에 들어간 경지는 어떤 사람도 이루지 못한다고 해.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반드시 명심해야 할 게 있어. 싯다르타 태자처럼 그렇게 할 사람도 없고, 그렇게 할 필요도 없다는 말이지. 싯다르타 태자가 부처님 되는 그 순간, 일체중생이 다 성불했기 때문이야. 그러니까 행불(行佛)하자, 부처님 행한 대로 따라만 가면 된다는 것이지. 그래서 나는 ‘성불하세요’라는 인사 보다는 ‘행불하세요’라고 말해. 부처님께서 성불한 내용은 팔만대장경에 이미 다 말했잖아. 우리가 그대로 부처님 정법에 따라 살면 되는 거야.”

 

이 부분에서 오늘 법문은 끝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여기에 무엇을 또 첨언할 것인가. 화제를 돌려 큰스님의 공부과정을 여쭈어 본다.

“큰스님께 가장 큰 영향을 준 선지식은 어느 분이십니까?”

“그야 전강 큰스님이시지. 벌써 60년 전 이야기야. 고향인 군산 은적사에 전강 스님이 주석할 때 뵙게 되었지. 전강 스님은 판치생모(板齒生毛: ‘달마 대사가 서쪽에서 온 뜻’을 묻자, 조주 선사가 ‘앞 이빨에 털이 났다’고 답한 공안) 화두로 참 자아를 찾으라고 가르치셨어. 참선은 의식집중을 통해 5식(識)-6식-7식-8식을 차례로 투과(透過)할 수 있는 대단한 방법이야. 부처님도 죽음직전에서 우유죽을 드시고 살아나셨듯이, 의식의 죽음과도 같은 제8식인 아뢰야식(阿賴耶識)을 투과하는 것이지. 이런 점에서 참선은 ‘죽음 연습’이라고도 할 만하지.”

정무 스님은 전강 스님의 법제자로서 인천 용화사에 주석하는 송담 스님과는 절친(切親) 중의 절친이다. 두 분의 인연은 어떻게 시작되었을까.

“은적사에서 전강 스님을 처음 뵈었을 때 나는 군산의 야간고등학교에서 국어교사 생활을 하고 있었는데, 그때 막 송담 스님이 10년 묵언(黙言)을 마칠 때 였어. 나만 보면 ‘아~ 이 선생이 빨리 머리를 깍아야 할텐데…’ 하시는 거야. 송담 스님, 능파 스님과는 그 때 한창 어울려서 경치 구경도 하고 수행도 하며 지냈지. 그뒤 출가를 하게 된 과정도 전생에 하던 일 계속 하는 것이라 절로 절로 이어진 것 같애.”

강산이 여섯 번 바뀌는 세월이 흐른 뒤 송담 스님은 한국의 간화선을 대표하는 선지식이 되었고, 정무 스님은 원로의원이자 대종사로서 조계종의 포교방향을 제시하는 지남(指南)이 되었다. ‘왕대 밭에서 왕대 난다’는 속담 처럼, 근현대의 대표적인 선승(禪僧)인 전강 스님 문하에서 걸출한 고승들이 배출된 것이 어찌 우연이겠는가.

석가모니부처님이 깨달은 날 일체중생이 함께 성불했으니 ‘날마다 부처님오신날’이건만, 모양과 개념에 집착하는 중생에게는 4월 초파일이란 기념일이 소중하지 않을 수 없다. 불자들에게 당부하실 말씀을 여쭈었다..

“스님은 스님 노릇, 신도는 신도 노릇, 부모는 부모 노릇, 자식은 자식 노릇 잘하면 돼. 그러려면 종교가 타락해 성인의 본뜻을 등지고 형식적으로 신앙 하는 것을 자각하고 개선해야 되겠지. 예를 들어, 사람에 따라 등값을 따로 매긴다면 등장사나 다름 없자나. 시주돈이나 천도재 비용도 마찬가지야. 나는 중이 되고 난 뒤 ‘시주 하라’ 한 적도 없고, 등값을 매긴 적도 없어. 내가 용주사와 신륵사를 비롯해 다섯 군데의 주지를 했지만 불사금으로 힘든 적이 없었어. 돈이 있다면 쓰고 남은 돈으로 불사도 하고 이웃도 도우면 힘들 일이 없지.”

정무 스님은 우리가 이 세상에 와서 인생을 사는 이유를 ‘빚 갚으러 왔다’고 하신다. 빚은 은혜와 원수 두 가지다. 그런데 살다 보면 이 둘이 따로 있는 게 아니다. 마치 손바닥을 뒤집는 것처럼 하나이자 둘이다. 늘 정신 바짝 차리고 살 수 밖에 없는 이유다. 정무 스님이 선물로 주신 <인생 졸업장>이란 저서 뒷표지의 글귀가 더욱 사무친다.

“이 세상 어떤 사람이 가장 거룩합니까? 없다. 단, 거룩한 삶만 있을 뿐이다. 이 세상에서 누가 행복한 사람입니까? 남들을 행복하게 만들어 주는 사람이 행복한 사람이다.”

큰스님 친견이 봄나들이처럼 흥겨운 하루다. 남쪽에서 저절로 훈풍이 불어오는구나.

 

 

정무 스님은

1931년 전북 군산에서 출생했으며, 전북대 수의학과 졸업 후 고등학교 국어교사를 했다. 1958년 은적사에서 전강 스님을 계사로 사미계를, 1965년 범어사에서 동산 스님을 계사로 비구계를 수지했다. 김제 부흥사 등 제방선원에서 정진했으며, 조계종 중앙종회의원, 용주사ㆍ신륵사ㆍ영월암 주지, 한국대학생불교연합회 지도법사를 역임했다. 포교 활성화에 기여한 공로로 1977년 종정 표창을 받은 데 이어 2007년 포교대상을 받았다. 2007년 조계종 원로의원에 선출됐으며, 이듬해 조계종 최고 품계인 대종사를 품수했다. 현재 석남사 회주로 주석하며 출ㆍ재가 교육에 심혈을 쏟고 있다.

 

글ㆍ사진=김성우(비움과소통 대표ㆍ현대불교신문 논설위원)

이 글은 현대불교신문(www.buddhanews.com)에 기고한 글입니다.

출처 : 결가부좌 명상도량 자비선원
글쓴이 : 부민스님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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