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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공병우 박사님과 유언

병노 2012. 6. 19. 17:38

공병우박사의 미리 써둔 유서

 
`나는 내 식대로 살아왔다'에 공개

 "생명이 위독한 병으로 병원에 입원했을 때, 동거가족 또는 보호인은 다른 가족과 친척, 친구들에게 위독 사실을 일절 알리지 말고 의사의 지시에만 순종할 것"

 

“나의 죽음을 세상에 알리지 말라.”

 

 


“장례식도 치르지 말라.

쓸만한 장기와 시신은 모두 병원에 기증하라.

죽어서 한 평 땅을 차지하느니 그 자리에 콩을 심는 것이 낫다.

만약 그렇게 하지 못한다면,

 

가장 가까운 공동묘지에 매장하되 입었던

옷 그대로

값싼 널에 넣어

최소면적의 땅에 묻어달라 

 

유산은 맹인 복지를 위해 써라”는 말을 남기고 이승을 떠났습니다.

 

 


지난 7일 향년 90세를 일기로 타계한 국내 최초의 안과전문의이자 한글타자기 발명등 한글 기계화운동의 기수였던 공병우박사가 6년전 자신의 자서전 `나는 내 식대로 살아왔다'에서 미리 공개한 유서의 첫마디다.

공박사는 지난 53년 미국에 다녀와서 `유서는 젊고 건강한 때라 하더라도 미리 써 놓는 것이 현명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공박사는 미국영주권을 갖고 미국에 살면서 80세 되던 해에 한글로 쓴 유언장이 미국법의 보호를 받을 수 있도록 영문서식에 맞춰 뉴욕에 있는 정진우변호사에게 공증을 의뢰하는 동시에 간추린 내용을 자서전을 통해 미리 공개했던 것.

공박사의 유언장은 일반적인 유언장의 핵심적인 내용이 되는 재산분배를 거의 취급하지 않고 죽음을 맞는 시간부터 장례절차에 이르는 문제를 핵심사안으로 다룬 게 특징.

공박사는 장례 절차에 대해 만일 죽더라도 누구에게도 알리지 말고, 장례식이나 추도식 같은 것을 하지 말되 세가지 지침에 따라 가능한 방법을 택해 시체를 처리하도록 후손들에게 못을 박아놨었다.
공박사는 이 지침에서

 

시체 중 조직 또는 장기가 다른 환자의 치료에 사용가능할 경우, 이를 적출해 기증하고, 나머지 시체는 병리학 또는 시체해부학 교실에서 실습용으로 이용할 수 있도록 의과대학에 제공할 것

 

▲ 이같이 할 수 없을 경우, 死後 24시간 이내에 화장 또는 수장을 하고 법적으로 이것이 불가능할 때는 가장 가까운 공동묘지에 매장할 것.단, 매장시에는 새옷으로 갈아 입히지 말고, 입던 옷 그대로 값싼 널에 넣어 최소 면적의 땅에 매장할 것. 시체는 현장에서 1백㎞ 밖으로 운반하지 마라. 현 거주지로부터 1백㎞ 밖에서 사망했을 때는 가급적 현지에서 위의 방법으로 처리한다. 여행 도중 바다나 강물에 익사했을 때는 수장을 하고 시체를 찾지 말 것등을 지시했다.

또 죽은 지 1개월이 지난 후 가족, 친척, 친구에게 사망 사실을 알리되 만일 매장을 했더라도 화장한 것처럼 아무에게도 묘지의 소재지를 알리지 말고 화장을 했다면 남은 재를 몽땅 버리고 조금이라도 어떤 곳에 남겨 두지 말 것을 당부했던 것.

재산분배 문제와 관련, 공박사는 유형 무형의 재산이 있을 경우는 신체장애자들, 특히 앞 못보는 장님들의 복지 사업을 위해 쓸 수 있도록 가족과 자신이 법적으로 지명한 집행인과의 협의에 따라 처분토록 했다.


공박사의 시신은 이같은 그의 생전에 남긴 유언에 따라 사망직후 연세대 신촌 세브란스 병원 해부학 교실에 기증됐던 것이다.

 

ㆍ세벌식 타자기 발명한 안과의사

요즘은 쓰이지 않지만 한때 널리 이용되던 한글 세벌식 타자기의 이름은 ‘공병우 타자기’다. 타자기를 발명한 공병우 박사는 서울 광화문 공안과의 초대 원장이었다. 아마추어 사진가 겸 자동차 연구가이기도 했던 그는 해방 이후의 대표적 기인(奇人)이었다.

공 박사는 1906년 평안북도 벽동에서 태어났다. 평양의학교습소를 거쳐 일본 나고야대학에서 의학박사 학위를 받은 그는 36년 우리나라 첫 안과의사가 돼 돌아온다. 공안과를 개원해 환자들을 보던 38년 어느날, 독일 베를린대에서 조선어를 가르치던 한글학자 이극로가 찾아왔다. 눈병을 치료하러 왔던 그는 한글의 과학적 우수성에 대해 열변을 토해냈고, 공 박사는 큰 감화를 받는다. 마침 일본어로 쓴 자신의 저서를 한글로 번역하던 그는 한글 타자기 개발에 뛰어든다. 10여년 뒤인 49년 첫 ‘공병우 타자기’가 세상에 나오게 된다.

 

공병우 타자기는 ‘자음-모음-받침’을 차례로 찍는 세벌식이다. 초성-중성-종성이라는 한글 창제 원리를 따른 것이다. 요즘 우리가 쓰는 자판은 ‘자음-모음’의 두벌식으로, 자음을 한 번 더 찍어 받침을 완성한다. 세벌식은 자판 오른쪽에 자음, 왼쪽에 모음, 왼쪽 끝에 받침을 배치한 형태다. 자음-모음-받침을 모아 찍을 수 있어 속도가 빠르다. 받침이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 글자 크기가 다르다. 요즘의 ‘안상수체’와 비슷한 모양이었다.

한국전쟁을 계기로 빠르게 보급됐던 공병우 타자기는 60년대 말 박정희 정권이 네벌식을 표준으로 채택하면서 밀리기 시작했다. 80년대 전두환 정권이 ‘네모 반듯한 모양이 좋다’며 두벌식을 컴퓨터 표준 자판으로 채택하자 세벌식은 조금씩 사라져갔다. 20여년간 한글학회 이사를 지내기도 한 공 박사는 정사각형 모양의 글자가 한글 창제 원리와 맞지 않는다며 반대 운동을 펼쳤다. 88년에는 팔순의 고령이었음에도 한글문화원을 설립해 한글 글자꼴을 연구했다. 공 박사의 지원을 받은 젊은 연구자 박흥호, 이찬진 등은 훗날 한글 타자 입력 소프트웨어 ‘아래아 한글’을 만든다. 공 박사는 겉치레를 파괴한 생활 태도로도 유명했다. “옷 치장에 시간을 낭비해서는 안 된다”며 한복을 입지 않았고, 폐백 인사를 하러 온 며느리에게 “절은 그만두고 악수나 하자”고 한 이야기는 유명하다. 당시로서는 파격적으로 매장 대신 화장(火葬)을 주장했으며, 자신의 시신은 죽은 뒤 해부학 교실에 기증하라고 유언했다. ‘조선 몇 대 고집쟁이’에 빠지지 않고 들어가던 그는 95년 3월7일 90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출처 : 장례문화시민연대
글쓴이 : 이동수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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