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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이 위독한 병으로 병원에 입원했을 때, 동거가족 또는 보호인은 다른 가족과 친척, 친구들에게 위독 사실을 일절 알리지 말고 의사의 지시에만 순종할 것"
“나의 죽음을 세상에 알리지 말라.”
“장례식도 치르지 말라.
쓸만한 장기와 시신은 모두 병원에 기증하라.
죽어서 한 평 땅을 차지하느니 그 자리에 콩을 심는 것이 낫다.
만약 그렇게 하지 못한다면,
가장 가까운 공동묘지에 매장하되 입었던
옷 그대로
값싼 널에 넣어
최소면적의 땅에 묻어달라
유산은 맹인 복지를 위해 써라”는 말을 남기고 이승을 떠났습니다.
지난 7일 향년 90세를 일기로 타계한 국내 최초의 안과전문의이자 한글타자기 발명등 한글 기계화운동의 기수였던 공병우박사가 6년전 자신의 자서전 `나는 내 식대로 살아왔다'에서 미리 공개한 유서의 첫마디다.
공박사는 지난 53년 미국에 다녀와서 `유서는 젊고 건강한 때라 하더라도 미리 써 놓는 것이 현명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공박사는 미국영주권을 갖고 미국에 살면서 80세 되던 해에 한글로 쓴 유언장이 미국법의 보호를 받을 수 있도록 영문서식에 맞춰 뉴욕에 있는 정진우변호사에게 공증을 의뢰하는 동시에 간추린 내용을 자서전을 통해 미리 공개했던 것.
공박사의 유언장은 일반적인 유언장의 핵심적인 내용이 되는 재산분배를 거의 취급하지 않고 죽음을 맞는 시간부터 장례절차에 이르는 문제를 핵심사안으로 다룬 게 특징.
공박사는 장례 절차에 대해 만일 죽더라도 누구에게도 알리지 말고, 장례식이나 추도식 같은 것을 하지 말되 세가지 지침에 따라 가능한 방법을 택해 시체를 처리하도록 후손들에게 못을 박아놨었다.
공박사는 이 지침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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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체 중 조직 또는 장기가 다른 환자의 치료에 사용가능할 경우, 이를 적출해 기증하고, 나머지 시체는 병리학 또는 시체해부학 교실에서 실습용으로 이용할 수 있도록 의과대학에 제공할 것
또 죽은 지 1개월이 지난 후 가족, 친척, 친구에게 사망 사실을 알리되 만일 매장을 했더라도 화장한 것처럼 아무에게도 묘지의 소재지를 알리지 말고 화장을 했다면 남은 재를 몽땅 버리고 조금이라도 어떤 곳에 남겨 두지 말 것을 당부했던 것.
재산분배 문제와 관련, 공박사는 유형 무형의 재산이 있을 경우는 신체장애자들, 특히 앞 못보는 장님들의 복지 사업을 위해 쓸 수 있도록 가족과 자신이 법적으로 지명한 집행인과의 협의에 따라 처분토록 했다.
공박사의 시신은 이같은 그의 생전에 남긴 유언에 따라 사망직후 연세대 신촌 세브란스 병원 해부학 교실에 기증됐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