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거지 같은 놈이 있었다.
그는 한때 세속에 염증을 느껴 생각이 이기적인 놈들이나 선함을 가장한
비굴성을 호신책으로 간직하고 살아가는 놈들하고는 아예 상종조차 하지 않았다.
딴에는 큰 공부를 한답시고 유불선에 목을 매달아본 적도 있었고 때로는 여러 분야의 수행자들과
날밤을 새우면서 자연과 우주를 논해본 적도 있었다.
깡패들과 어울려 싸움질이나 하면서 인간말종으로 살았던 시절도 있었고 지식인들과 어울려 관념놀이나
하면서 고등천치로 살았던 시절도 있었다. 그러나 어느날 거지 같은 놈은 홀연히 깨달았다.
모든 공부의 근본이 마음에 있다는 사실을.
거지 같은 놈은 산을 만나면 산이 되고 물을 만나면 물이 될 줄 아는 인격체가 되고 싶었다.
그러자면 우선 자신이 알고 있는 자신부터 버려야 한다.
그는 한때 세인들이 그를 지칭하던 기인에서 평범한 시정잡재로 돌아왔다.
그에게는 분명한 하산이다.
사방이 다 내려다보이는 산꼭대기에 주저앉아 있는 놈은 아직 공부가 모자라는 놈이다.
진실로 산꼭대기에서 사방을 낼려다보았다면 출발했던 그 자리로 돌아갈 줄 알아야 한다.
그래서 하산이라는 말은 의미심장하다.
그는 평범한 시정잡배로 돌아왔지만 산을 만나면 산이 되고 물을 만나면 물이 될 수가 있다.
몸이 그렇다는 것이 아니라 마음이 그렇다는 것이다.
인간을 대할 때도 마찬가지다.
깡패를 만나면 깡패가 되고 현인을 만나면 현인이 될 수가 있다.
이것은 조화할 수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지 대적할 수 있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그는 한없이 비천하게 보일 수도 있고 한없이 고상하게 보일 수도 있다.
다만 그의 앞에 어떤 성정(性情)이 놓이는가에 따라 얼마든지 달라질 수가 있다.
그는 생노병사 희노애락을 숨기거나 피하지 않는다.
예수님도 부처님도 그것을 숨기거나 피하지 않으셨다.
그는 화를 낼 일이 있으면 화를 내고 슬퍼할 일이 있으면 슬퍼한다.
다만 그것을 오래 간직하고 있지 않을 뿐, 그 순간이 지나면 놓아버린다.
그는 오늘날의 젊은이들을 좋아한다.
오늘날의 젊은이들은 보편적으로 정의롭고 정직하고 자유롭다.
그러나 불만이 전혀 없는 것도 아니다.
대부분 머릿공부에 너무 많은 시간을 빼앗긴 나머지
마음공부를 너무 소홀히 해서 무례를 부끄러워할 줄 모른다.
그것은 청년기의 특권이 아니라 유아기의 특권이다.
그리고 지나치게 이기적인 성향도 마음에 들지 않는다.
하지만 앞으로 개선할 수 있는 기회와 시간이 충분하기 때문에 그리 비관적으로는 생각지 않는다.
적어도 그는 한번 인연을 맺으면 평생을 지켜본다.
그에게 막대한 피해를 입히거나 배신을 때린 놈들도 달라지는 날이 오기를 기다린다.
그러나 한평생 자기 껍질을 탈피하지 못하는 놈들도 부지기수다.
그는 권위를 대단치 않게 생각한다.
남을 대할 때는 그다지 흉허물을 가리지 않는다.
그러나 흉허물을 가리지 않으면 영락없이 버르장머리가 없어지거나 그를 과소평가해 버리는
성향을 나타내 보이는 놈들도 적지 않다.
상대를 하자니 시간이 아깝고 외면을 하자니 도리가아니다.
최소한 오십여 년을 산전수전 다 겪으면서 살아온 그에게 충언을 할 때는
자신의 판단이 관연 옳은가를 깊이 재고해 볼 필요가 있을 터인데
도 주제넘은 소리들을 서슴지 않을 때는 대꾸조차 귀찮아진다.
그 거지 같은 놈의 직업은 소설가다.
그래서 작품에 대해 비판적인 시각을 들이대는 놈들에 대해서는 그다지 좋은 점수를 주지 않는다.
글을 잘 쓴다고 소설까지 잘 쓰는 것은 아니다.
이 말이 사실인지 아닌지를 알고 싶다면, 그리고 자신이 글깨나 쓴답시고 자부한다면,
이백자 원고지 백 매 분량의 단편 하나라도 제대로 한번 서보시라.
머릿속에 들어 있는 몇 가마니의 지식으로 썰을 풀기는 쉬워도 소설을 창작하기는 어려운 법이다.
글에도 생명이 있다. 그러나 그것을 모두가 느낄 수는 없다.
당연히 모두가 느끼기를 바라지도 않는다.
하지만 자신의 비판적인 안목에 겸허함이 간직되어 있지 않은 자들에게는
글이 절대로 가슴을 열어주지 않는다.
그는 지금 소설 한 편을 삼 년째 붙잡고 있다.
그러나 삼 년째 붙잡고 있으면서도 언제 끝나는지 알지를 못한다.
그것은 그가 글을 다스리고 있는 것이 아니라 글이 그를 다스리고 있기 때문이다.
글- 이외수-출처 : 생활불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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