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대 마음속에 분노가 고여들거든 마음 공부는 내가 죽는 공부입니다. 마음의 짐을 내려 놓고 마음의 때를 벗겨내는 것은 '나'라는 상이 죽는 길입니다 그렇게 죽으면 비로소 내가 누구인지를 알게 되니 마음 공부는 참나를 발견 하는 공부입니다. 참나를 발견하고 나면 다시 나와 너가 본래 둘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니 나, 너가 함께 죽는 공부입니다 그러나 죽는 공부로 그치는 게 아니라 만법이 다시 하나로부터 나투는 도리를 알게 되니 나를 버려 일체를 얻는 공부입니다. 죽으라는 것은 마음으로 죽으라 하는 것이지 몸뚱이를 죽이라는게 아닙니다. 그러니 열 번인들 죽으면 어떻습니까? 몸뚱이는 오히려 건강해지고 오래 삽니다 병고액난도 녹아 버립니다. 강에 얼음이 녹으면 봄이오는 것은 정한 이치입니다 죽어야 깨달을 수 있습니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마치나인양, 나의 분신인양 붙들고 아끼던 고정된 생각, 고정된 관념이 죽어야 비로소 삶의 판도가 바뀌게 되고 내 앞을 가로막고 서 있는 은산철벽을 타파할 수 있습니다. 그게 바로 문 없는 문으로 드나드는 것입니다 고정관념이 죽지 않고서는 변화란 기대할 수 없습니다 깨달음이야 더 말할 나위도 없습니다 죽는 것도 한 번이 아니라 죽고 또 죽어야 합니다 은산철벽을 뚫어라! 하는데 바깥 세상의 은산철벽이라면 거대한 터널 뚫듯이 뚫어 보겠지만 이게 마음의 은산철벽이니 도리를 모르면 꼼짝을 못합니다. 아니 도리를 모른다고 하기 이전에 자기를 바꿀 생각을 않고 이 탓 저 탓, 바깥에서 원인을 찾으려드니 한 발짝도 나아갈 수가 없는 겁니다. 내 앞의 장애란 실은 철벽이 아니라 백지 한 장입니다. 그러나 백지 한 장이라도 좀처럼 뚫기가 어려우니 은산철벽이 무색할 정도입니다 마음으로 과거 의식(아버지)과 현재 의식(아들)이 상봉을 해야 하는데 창호지 한 장 사이를 넘지 못해 영영 상봉을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왜 그러냐 하면 아들이 창호지 한 장 너머에 아버지가 있다는 사실을 믿지않고 바깥으로 나가려고만 하기 때문입니다 마음 공부는 무엇을 얻고자 하는 공부가 아닙니다. 기쁨과 행복의 길이지만 얻는 공부가 아니라 다만 닦는 공부인 것입니다 - 대행스님 - |
'불심' 카테고리의 다른 글
[스크랩] 일체유심조 (0) | 2010.07.09 |
---|---|
[스크랩] 그대 마음속에 분노가 고여들거든 (0) | 2010.07.04 |
[스크랩] 한 성품 속에 만 가지 업이 (0) | 2010.07.04 |
108배동영상 (0) | 2010.06.27 |
108배 (0) | 2010.06.2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