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계삼소 길상사 주지 덕현 스님
폭설로 인해 거리에 쌓였던 눈 더미가 다 녹아내리자 서울이 말끔해졌다. 공기마저 맑아진 겨울 오후, 길상사는 서울 도심의 사찰인데도 고즈넉했다. 찬바람이 절 마당을 쓸고 지나가자 종종 걸음 치던 사람들도 모두 어딘가로 사라져버리고 빈 나뭇가지엔 햇살만 가지런히 널려 있었다. 그러고 보면 산중 사찰과 도심 사찰이 뭐 다를 것 있겠나 싶지만, 문 밖으로 나가 고개 들어보면 거대한 건물들이 눈에 들어차고 자동차 소리가 귀를 빡빡하게 채운다. 산중 숲이나 새들의 지저귐은 멀리에 있다.
그러니 줄곧 선방에서 수행만 했다는 덕현 스님이 도심 사찰의 주지로 있으며 눈도 귀도 마음도 고단하지 않을까 싶은데 스님은 말씀하신다.
“기본적으로 수행자는 수행과 전법을 일로 삼아야 한다는 부처님의 가르침에서 벗어나지 않으면 된다고 생각해요. 도심에 와보니 수행 자체가 포교나 전법이 되기도 하고 또 반대로 사람들에게 법을 가르치고 알리는 게 수행의 일부이기도 한 것 같아요. 새의 두 날개가 허공을 저어가듯 두 가지가 서로 보완하며 가는 것이지요.”
지나온 길에도 갈 길에도 미련이나 욕심 따윈 없는 눈빛이다. 여느 주지 스님들이 그렇듯 주지 스님이라 바쁠 텐데도 말에 서두름이 없고 다음 행보를 서두르는 재촉도 없다. 내일이든 내년이든 십년 후든 똑같은 보폭으로 여여히 걸어갈 듯 스님은 단출하고 고즈넉한 방에 수도승처럼 앉아 있었다.
그리고 여낙낙한 스님의 말 품세는 마치 오래된 선방의 부드러워진 미닫이 문을 닮아 있었다.
스님은 차를 한잔 내 주시더니 문득 허준과 그의 스승 류의태 이야기를 꺼내신다.
의원 류의태는 자신의 친자식들과 허준을 함께 가르쳤다. 그들이 과거시험을 보러 떠났는데 전염병이 도는 마을을 지나게 됐다. 류의태 자식들은 과거시험을 보러가는 길이라 그냥 지나쳐갔으나 허준은 그곳에 머물며 사람들을 치료했다. 과거시험은 보지 못 했다. 류의태는 허준이야말로 의사가 될 인물이라 생각하고 허준에게 모든 것을 전수해주었다. 수행자 또한 수행의 길에서 반드시 선방에 앉아야 한다든지 좌선을 해야 한다든지 하는 형식에 얽매일 필요가 없다는 말씀이다.
“수행이라는 것은 우리의 생사가 고통이기에 그 고통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일이잖아요. 그러나 그것 자체가 생사에 뿌리를 내리고 있는 것이기 때문에, 생사의 고통에 직면하지 않으면 발심 자체가 힘들어요. 중생의 괴로움과 아픔을 외면하고서는 발심도 수행도 힘들지요.”
수행자라면 산중에서 다리 틀고 앉아만 있을 것이 아니란 말씀이다. 세속이 복잡하고 혼란스러워 제정신 차리고 시간과 열정을 수행에 온전히 기울이기 힘드니 출가도 하고 선방만 다니고 묵언도 하겠지만, 그것이 공허하게 느껴지면 언제든 자리를 털고 일어나 사람들의 아픔을 보고 그 속에서 재발심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스님은 그것을 이 도심에서 체험하며 느끼고 있단다.
스님이 절 문으로 들어선 것은 대학을 졸업한 이십대 후반.
대학을 다니던 때는 제5공화국, 고민하고 방황하던 시절이었다. 고등학교의 종용으로 법대에 갔으나 스님과 맞지 않았다. 세상의 법이란 것은 사람의 머리에서 나온 것, 기본적으로 더 많은 이익과 권력을 바라고 경쟁하고 투쟁하는 관계에서 그런 정글의 법칙을 조정하기 위해 만든 게 법이기 때문이다. 이기심을 버리면 필요치 않은 게 법이기 때문이다.
군사정권 당시 권력의 시녀로써만 존재하는 그런 법을 보았기 때문이다. 법이 정한 어떤 것을 과연 옳다고 할 수 있을까 회의가 들었기 때문이다.
“법대 가길 잘 한 것 같아요. 덕분에 출가할 수 있었으니까.”
이 세상의 문제는 마음의 문제와 직결되어 있으니, 탐진치를 해결하지 않고서는 이 세상의 문제도 풀리지 않을 것이고 사람들이 꿈꾸는 이상적 사회도 구현되지 않을 것이라는 자각이 들었다. 예전부터 마음에 두었던 출가를 결심했다.
“진짜 법, 불법을 공부하게 된 것이지요. 둘 다 법이라는 말을 쓰긴 하지만 하나는 사람의 머릿속에서 이기적인 동기로 나온 것이고 하나는 깨달음을 통해 고통에서 벗어나 근원을 향해 나아가는 가장 이상적인 법이죠. 그런 진정한 법을 찾아 떠나오면서 가짜 법, 세속의 법을 버린 것이지요.”
그렇게 머리 깎고 부처님의 법 속으로 들어왔다. 그리고 나중에야 알았다. 부처님 당시 청정한 승가의 모습과는 달리 승단이 많이 변질 되어 있다는 것을. 부처님 멸도 후 계율을 스승으로 삼으라 하셨듯이 계율은 그 승가의 청정성과 존폐를 결정짓는 중요한 요소다. 그래서 스님은 종단의 폐단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부처님의 계율 정신을 회복하는 데에 집중해야 한다고 본다. 풍토만이 아니라 구체적인 규정들도 부처님 말씀대로 회복시켜야 한다고 본다.
“옛날엔 어른 역할의 소임을 두고 그 자리에 맞는 스님이 대중에 의해 추대되었지요. 그렇기에 그 자리에 오른 스님은 책임감 있게 어른의 권위로 대중을 부드럽고 자연스럽게 이끌어갔습니다.”
그러나 현재의 모습은 서로 주지를 하겠다고 나서는 판국이다. 원하는 자리에 앉기 위해 입후보하고 선거를 한다. 세속의 정치판보다 더 혼탁한 선거 양상을 보이기도 한다. 그 후엔 자기의 이익을 위해 힘쓴다. 승단 밖의 사람들 눈에도 세속의 법과 승단의 법이 다를 다 없어 보인다. 그 모습만 보고 있자면 중생을 제도하겠다는 스님들은 모두 어디로 갔나 싶다.
“이 문제들을 어떻게 고칠 것인가 생각해봤는데 세상의 불완전함을 고치기 위해서 외적인 조건을 바꾸는 것으로 세상이 크게 나아질 것이 없듯이, 종단의 현실도 종법을 고치거나 스님들이 나서서 주장을 관철시켜서 되는 일은 아닌 것 같아요. 시간이 걸리더라도 내적으로 진정한 변화를 겪으며 자연스럽게 주위에 좋은 여향을 미치게 해야 한다는 생각입니다.”
진정으로 부처님의 법을 닦는 스승들이 바른 방향으로 제자들을 이끌어 가면 지금의 문제들은 자연스럽게 해결될 것이라는 말씀이다. 그래야만 부작용과 물의를 일으키지 않고 본래 모습으로 회복시킬 수 있다는 말씀이다. 승단은 인류 역사상 가장 오래된 공동체다. 이런 아름다운 승가가 지금까지 유지되어 온 것은 제도나 법이 뛰어나서가 아니라 오직 수행에 의해서 지탱되어 온 것. 그러니 스님들은 청정한 수행을 통해 승단을 청정하게 만들 수 있다는 말씀이다.
“수행자가 해야 할 일은 두 가지입니다. 수행과 전법, 이것이 수행자의 본분이고 수행자는 이 두 가지만 해야 하는 것이지요.”
스님은 그렇게 법학을 그만두고 그 당시 송광사 불일암에 계시다는 법정 스님을 찾아갔다. 대학 시절 강연회에 오신 스님을 뵌 것이 인연이었다. 곳곳에서 시위와 최루탄이 난무하던 때, 대형 강의실은 법정 스님의 강연을 들으려는 학생들로 가득했다.
그중 한명이 바로 청년 덕현 스님이었다.
“선에 관한 이야기를 하시는데 그때 당시의 정치 상황을 빗대어 말씀하셨어요. 선에 대해 장황한 설명을 하진 않으시고, 그 자리에 있는 사람의 마음을 본래 자리로 돌이키는 것이라고 하셨어요. 통쾌했지요. 스님에게서 맑은 샘물이 콸콸 솟아나는 듯한 느낌이었어요.”
강의가 끝나자 학생들이 모두 일어나 그치지 않는 기립박수를 쳤다. 그러자 스님은 강의실을 떠나셔버리셨다. 그때 청년 덕현 스님은 법정 스님 뒤를 교문 밖까지 졸졸 따라갔다. 버스를 타고 창가 자리에 앉아 하늘을 쳐다보는 법정스님의 옆모습을 보았다. 그 모습이 너무도 인상적이었다. 방금 전에 수천 명 앞에서 강의를 한 사람의 상기된 모습이 아니라 그저 버스를 타고 왔다가 다시 돌아가는 태평하고 한가로운 모습이었다. 그러다가 하늘의 구름을 한번 쳐다보는. 그래서 출가를 결심하고 바로 법정 스님을 찾아갔다.
“처음에 무슨 생각으로 중노릇을 하고 어떻게 익히는가에 따라서 자기 중노릇의 나머지 길이 결정되는 것 같아요. 저는 초반에 그런 중요한 것들을 법정 스님과의 인연 속에서 형성했던 것 같아요.”
이젠 스승이 머물던 자리에서 덕현 스님은 스승과 연이 있는 다기에 차를 달이며 무겁지도 가볍지도 않게 앉아 있었다. 1년 전에 길상사의 주지로 올 때 도반 스님이 해주었던 말을 생각하면서.
“맘대로 하라대요. 사람들의 기대나 잘하려는 욕심에도, 그 무엇에도 얽매이지 말고 소신대로 하라는 거예요.”
스님은 그 말씀에 덧붙이신다. 무슨 일이든 너무 큰 의미를 부여하고 의도적으로 하려고 하는 것 보다 그때그때 자기 안의 진실한 목소리에 귀 기울이고 그 느낌대로 하는 것이 지혜롭고 선의에 차 있어 더 좋은 결과를 불러올 수 있다고. 그러니 그리 해야 하지 않겠나 하시는 말씀이다.
“내가 주지라는 생각을 가지면 이미 거기에 걸려서 매이는 것이지요. 그러면 초라하고 보잘 것 없어집니다. 세속적인 승이 되고 마는 것이지요. 그러나 그런 상을 떨쳐버리고 자기 본분을 다하면서 자리에 머물 수 있으면 훨씬 당당하고 편안하고 주위 사람들에게도 오히려 좋은 영향을 줄 수 있겠지요. 제가 그렇다는 게 아니라 그렇게 해야 하지 않을까 합니다.”
스님은 허허 웃으시더니 자리를 털고 나가 잠시 걸음을 옮기신다. 스님의 걸음을 따라 조용조용 걸음을 옮겼다, 고즈넉한 산사에서처럼. 그러다가 문득 뒤돌아보니 도심의 혼잡한 소리들이 귀를 파고들었다. 스님의 말씀과 발걸음에 마음을 두는 동안 아무 소리도 듣지 못했던 모양이었다. 스님과의 가벼운 산책길에 요즘의 근황을 여쭈었다.
“정말 중답게 살아간다면 무슨 미련이 있고 후회가 있고 대단한 욕망이 있겠어요. 즐길만 합니다.”
산보를 마친 스님께 여쭙는다, 이제 어디로 가시려는지. 그러자 스님은 이 한겨울에도 바위 위에서 얼어붙지 않고 숨 쉬는 초록빛 이끼를 매만지며 말씀하신다.
“길이 따로 있습니까. 그때 그때 내가 해야 하는 일과 할 수 있는 일을 하면서 마음 챙기며 가야지요.”
2010년 2월 [통권 제336호] 월간 해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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