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녀오십시오 스님
지난 2003년, 천주교 개신교 불교 원불교를 대표해서 네 사람의 성직자가 새만금 알리기 삼보일배를 한 적이 있었다. 3월 28일부터 5월 31일까지 장장 65일간에 걸쳐 300킬로미터를 절하며 걸어간, 고행이란 말이 훨씬 잘 어울리는 이 행사.
아마도 이때의 ‘스타’는 89년 임수경씨와 함께한 방북으로 잘 알려진 천주교정의구현 사제단의 문규현 신부였을 것이다. 20년전 30대의 젊고 세련된 청년 사제였던 그가 어느새 반백이 된 모습으로 나타나 화제가 되었고, 그의 유명세를 통해 삼보일배가 더 뉴스에 오르기도 했지 싶다.
그런데 여기에 아직까지 우리들에게 많이 알려지지 않았던 동갑내기 스님 한 분이 함께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 분은 오랜 수행으로 무릎이 좋지 않았고, 결국 삼보일배가 막바지에 이를 무렵인 55일째 경기도 과천에 이르러 탈진해 버린다. 남태령 고개를 넘어 서울로 들어오기 직전에 그만 실신하고 만 거다. 구급차를 타고 병원으로 이송하는 중에도 의식을 찾지 못할 만큼 상태가 좋지 않았는데, 실은 체력이 소진해서 이미 이틀 동안 식사도 못하고 있을 정도였단다.
병원에서의 진단은 장기간의 격렬한 고행으로 근육세포가 죽어 빠져 나가고 있어 움직여서는 절대 안되고, 최소 일주일 이상의 입원 치료가 필요하다는 상태. 그러나 그는 결국 이틀 만에 일어나, 주위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휠체어에 링거를 꽂은 채 다시 거리에 나섰다.
그리고는 3일 후에는 휠체어도 벗어버리고 다시 일어나 수척한 모습으로 삼보일배를 완수하고 만다. 근육세포가 죽어가고 있다고 했는데.
이 때의 후유증으로 스님은 결국 두 번의 무릎수술을 받아야 했다. 하지만 이렇게 만신창이가 된 몸으로도 천성산을 지키고자 108배를 세 번이나 올렸고 그로 인해 또 수술을 받았다. 그 중간에도 전국을 걸어서 순회하는 ‘생명평화탁발순례’를 6개월이나 계속하기도 했다. 이번에는 허리까지 이상이 생겨 극도로 조심해야 한다는 경고와 함께.
허나 스님은 단지 묵언으로 걸어다니고 절만 하는 분이 아니었다. 바로 얼마 전 소신공양한 문수스님의 추모제에서는 이런 말들을 거침없이 내뱉었으니 말이다.
‘강의 숨통을 자르면서 온갖 생명을 짓밟는 것도 모자라 사람의 목숨을 가져가고도 이토록 냉담할 수 있는가’
‘이제 그만 하라. 국민이 이명박 대통령을 대통령으로 인정하지 않는 상황으로 몰고 가지 마라’
‘(추모제 자리에 참석도 않은 총무원장 자승에게) 이명박 정권의 하수인 노릇 그만하라. 온갖 교활한 방법으로 문수스님의 소신공양의 의미를 축소시키려 한 지난 며칠간의 행위는 마구니(해충)들이나 할 짓이다. 수행자이기 전에 인간으로서 그래서는 안 된다’
이 스님, 참으로 독하고 엄하다. 단 오직 생명과 민주주의의 대의 앞에서만.
이분이 바로 수경스님이다. 강남에 명진이 있다면 강북에는 수경이 있다 하여 ‘강남명진 강북수경’으로 불리던 바로 그 스님. 화계사 주지이자 불교환경연대 대표로서 이 사회의 불의에 맞서 싸우는 불교계의 양심으로 불리던 그.
이런 이력에 어울리게, 스님은 며칠 전 문수스님의 추도제에서 아래와 같은 사자후를 터트리기도 했었다.
사람이 죽었습니다. 무고하게 죽어가는 생명을 위해, 더 이상의 살생을 막기 위해, 온 생명을 위해 자신의 생명을 공양했습니다.
국민 여러분!
오늘 우리는 목숨을 바쳐 시대의 빛이 된 문수 스님의 뜻을 기리기 위해 이 자리에 모였습니다. 사실 저는 이 순간도 문수 스님이 감내했을 마지막 순간의 고통을 헤아리기조차 힘듭니다. 상상하기도 힘겹습니다.
손톱 밑에 작은 가시만 박혀도 온 몸과 마음이 괴로워 어쩔 줄 모르는 게 사람입니다. 문수 스님도 마찬가지였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문수 스님은 자신의 몸을 통째로 내놓았습니다. 자신의 목숨을 이 시대를 위한 대자비의 약으로 내 놓았습니다. 3년간 무문관 정진을 한 수좌로서, 생사의 관문을 투탈한 사람만이 보일 수 있는 경지를 열어 보였습니다.
국민 여러분!
저는 결코 문수 스님의 소신공양을 미화할 생각이 없습니다. 색신의 고통만을 헤아리자면 비통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밤새워 통곡을 해도 애통함을 감당하지 못할 것입니다. 하지만 저는 오늘, 생명의 존엄을 모르는 권력자들의 무지와 탐욕, 몰인정과 무자비함을 일깨우기 위해, 무고하게 죽어간 온갖 생명을 대신하여 자신의 목숨을 공양한 문수 스님의 뜻만큼은 바로 세워야 한다는 마음으로 이 자리에 섰습니다.
에두르지 않겠습니다. 바로 가겠습니다.
이명박 대통령님, 사람이 죽었습니다. 그런데 어찌 눈도 깜짝하지 않으십니까? 강의 숨통을 자르면서, 온갖 생명을 짓밟은 것으로도 모자라 사람의 목숨까지도 가져가고도 이토록 냉담하십니까? 이럴 수는 없습니다. 최소한의 상식을 가진 사람이라면 이래서는 안 됩니다.
이명박 대통령님.
이번 지방 선거 결과로 드러난 민심의 준엄함을 보셨습니까? 돈과 권력으로 방송을 장악하고, 국민의 입을 틀어막고 겁박해도, 양심만큼은, 진실만큼은 틀어막지 못했습니다. 불과 투표 1주일 전까지도 소위 '여론조사'의 결과는 한나라당의 압승을 예상하게 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당신이 애써 외면한 민심, 천심을 가린 오만의 손바닥이었습니다. 경찰국가나 다름없는 통치의 부당함을 표로 보여 준 것입니다. 여론 조사로는 당신을 안심시키고 투표장에서 진심을 밝힌 것입니다.
이제는 그만 하십시오. 우리 국민들, 돈만 된다면 무슨 짓을 해도 받아들이는 그런 사람들이 아닙니다. 더 이상 국민이 당신을 대통령으로 인정하지 않는 그런 상황으로는 몰고 가지 마십시오. 이제라도 늦지 않았습니다. 더 이상 국민을 힘들게 하지 마십시오. 지치게 하지 마십시오. 4대강 개발 여기서 멈추십시오.
지금의 방식은 강 살리기가 아니라 4대강 전체를 인공 댐으로 만드는 일이라는 것을 토목 전문가인 당신이 더 잘 알지 않습니까. 민심을 바로 보십시오. 천심을 거역하지 마십시오. 그 소리에 귀 기울이십시오. 제대로 강 살리기 하십시다. 그러면 국민 모두는 흔쾌히 도울 것입니다. 제발 정치하십시오. 정치는 선거판의 승부와는 다르지 않습니까? 수단 방법 가리지 않고 이기면 그만인 게임이 아니지 않습니까.
이명박 대통령님, 제발 국민으로부터 신뢰 받는 대통령의 모습을 보여 주십시오. 이 이상의 오만은 대통령으로서 최소한의 품위도 지키지 못하게 할 것입니다.
민주당을 비롯한 야당 정치인 여러분께도 호소합니다. 긴 얘기 않겠습니다. 이번 지방 선거의 야당 지지는 순수한 야당 지지가 아니라는 것, 잘 아시지요. 제발 정신 똑똑히 차리십시오. 이명박 대통령과 한나라당에 대한 불신을 야당에 대한 지지로 오해하지 마십시오. 하루 빨리 대안을 보여 주십시오.
마지막으로 조계종단 수뇌부에 호소합니다. 이명박 정권의 하수인 노릇, 그만 하십시오. 온갖 교활한 방법으로 문수 스님의 소신공양의 의미를 축소시키려 한 지난 며칠간의 행위는 마구니들이나 할 짓입니다. 수행자이기 전에 인간으로서 그래서는 안 됩니다.
총무원장 스님, 사판의 역할, 이판의 역할과 똑같이 소중합니다. 사판 노릇 제대로 하십시오. 타락한 정치인 흉내 내는 것이 사판 노릇 아니라는 것, 잘 아시지 않습니까. 불문의 한 구성원으로서 간곡히 호소합니다. 중답게 사십시다. 더 이상 저처럼 거리로 나서는 수행자들이 없게 해 주십시오. 그렇게만 해 주신다면 저는 당장 바랑 지고 산골로 들어가 촌로로 살 것입니다.
총무원장 스님 부탁드립니다. 집행부를 쇄신해서 국민과 종도들에게 신뢰 받는 종단을 만들어 주십시오.
국민 여러분!
군더더기가 많았습니다. 문수 스님의 마지막 육성으로 마치겠습니다.
"이명박 정권은 4대강 사업을 즉각 중지 폐기하라. 이명박 정권은 부정부패를 척결하라. 이명박 정권은 재벌과 부자가 아닌 서민과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을 위해 최선을 다하라."
납자의 분상에서 간곡히 말씀드립니다.
문수 스님의 이 시대의 약왕보살입니다.
그러나 이 사자후가 속세를 향한 마지막 일갈이었던 걸까. 그는 지난 14일 아래와 같은 글을 남긴 채 홀연히 길을 떠나고 만다(‘잠적’이라는 표현은 스님의 결심과 행보의 무게에 어울리지 않으므로 쓰지 않으련다).
그냥 어딘가 가서 묻혀 버린 게 아니다. 가사 장삼을 벗어두고. 수십 년 간 몸담아왔던 조계종 승적마저 파 버리고는 한 가닥 연결선이던 휴대폰과 이메일 계정마저 없애 버리고 떠난 거다. 그저 육신만을 남겨둔 채 모든 지위와 명예와 책임을 벗어 던지고는. 어느 따뜻한 겨울, 바위 옆에서 졸다 죽고 싶다는 탈속의 유언 같은 말을 남긴 채.
그 고통과 번뇌를 우원 같은 날라리가 제대로 헤아릴 수 있겠냐마는, 짐작으로나마 느껴지는 것들이 없는 건 아니다. 그간 생명을 살리고 인간 세상을 이롭게 하기 위해 몸담았던 모든 번잡한 일들, 그리고 문수스님의 죽음을 통한 승려로서의 실존적 고민, 또 소신공양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조계종과 정부의 무성의한 대응에 대한 극도의 환멸… 그런 것들이 전부 섞여든 것 아니었을까.
다시 길을 떠나며
모든 걸 다 내려놓고 떠납니다.
먼저 화계사 주지 자리부터 내려놓습니다.
얼마가 될지 모르는 남은 인생은
초심으로 돌아가 진솔하게 살고 싶습니다.
“대접받는 중노릇을 해서는 안 된다.”
초심 학인 시절, 어른 스님으로부터 늘 듣던 소리였습니다.
그런데 지금 제가 그런 중노릇을 하고 있습니다.
칠십, 팔십 노인분들로부터 절을 받습니다.
저로서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일입니다. 더 이상은 자신이 없습니다.
모두를 위한다는 명분으로 한 시절을 보냈습니다.
비록 정치권력과 대척점에 서긴 했습니다만,
그것도 하나의 권력이라는 사실을 깨닫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제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무슨 대단한 일을 하고 있는 것 같은 생각에 빠졌습니다.
원력이라고 말하기에는 제 양심이 허락하지 않는 모습입니다.
문수 스님의 소신공양을 보면서 제 자신의 문제가 더욱 명료해졌습니다.
‘한 생각’에 몸을 던져 생멸을 아우르는 모습에서,
지금의 제 모습을 분명히 보았습니다.
저는 죽음이 두렵습니다.
제 자신의 생사문제도 해결하지 못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제가 지금 이대로의 모습으로 살아갈 수 있겠습니까.
이대로 살면 제 인생이 너무 불쌍할 것 같습니다.
대접받는 중노릇 하면서, 스스로를 속이는 위선적인 삶을 이어갈 자신이 없습니다.
모든 걸 내려놓고 떠납니다.
조계종 승적도 내려놓습니다.
제게 돌아올 비난과 비판, 실망, 원망 모두를 약으로 삼겠습니다.
번다했습니다.
이제 저는 다시 길을 떠납니다.
어느 따뜻한 겨울,
바위 옆에서 졸다 죽고 싶습니다.
2010년 6월 14일
수경
…우원은 작년 본지 지면을 통해 우리 사회의 어른 중 한 분으로 봉은사 주지 명진스님을 소개해 드린바 있었다. 그러면서 어른을 알아보지 못하고 뫼시지 못하는 우리 젊은 사람들의 경박함에 대해 이야기하기도 했다.
이제 이 땅의 또다른 어른이라고 할 수경스님이 어딘지 모를 길을 떠났다. 맘 같아선 요즘 같은 세상에 어딜 가시나요, 빨리 맘 고쳐먹고 돌아오세요, 우리들 앞에서 어른 노릇 좀 해주세요 라고 매달리고 싶다.
허나 그것이 과연 옳은 일일까.
생사의 고민 앞에서 스스로의 한계와 권력의 비열함을 절감하며 다시 외로운 깨달음의 길을 가겠다는데, 아니 원래부터 속세의 지저분함을 벗어나 구도에 전념하려던 승려를 강호로 끌어온 것이, 스스로의 문제도 해결하지 못하는 우리들의 미욱함이었는데. 우린 언제까지 어른들의 바지 자락이나 붙잡고 땡깡 부릴건가.
언제나 스스로 어른이 될 건가.
스님, 뜻 닿는 대로 하십시오. 땅 끝까지 가서라도 우리 어리석은 아해들이 불쌍해 돌아와야겠거들랑 얼릉 오시고, 아니면 문수스님이 던져놓은 의미를 깨우치실 때까지 자유롭게 떠돌다 오십시오.
하지만 바위 옆에서 졸다 죽는 것만은 안됩니다…
추신: 수경스님과 관련된 내용을 찾다가 우연히 그가 떠난 의미를 지맘대로 해석한 헤럴드 경제의 기사를 보게 됐다. 내용인즉슨 수경스님이 ‘환경운동판의 권력화’에 환멸을 느껴 잠적했다는 거다. 그러면서 ‘이미 오래 전에 이기심의 싹이 자신과 주위에서 자라는 걸 본 듯하다’ 는 자의적 가정을 통해 썩은 환경운동판과 함께 썩어갔을 수경스님을 은근히 비웃고, ‘염불보다 잿밥에 관심이 많은 사람들, 아수라 속에서 스님이 본 것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라며 나름 선문답 같이 그럴싸하게 끝맺고 있다.
(원문보기 : http://biz.heraldm.com/common/Detail.jsp?newsMLId=20100615000386)
그러나 저 위에 우원이 소개한 수경스님의 글들이나 그간의 맥락을 보면 스님이 가졌던 ‘권력화’에 대한 고민은 승려로서의 개인적 성찰에 따른 실존적인 것이지 환경운동판의 권력다툼 같은 것과는 아무 관계도 없다는 사실, 삼척동자라도 알 수 있다.
요렇게 본말을 바꾸고 방점을 엉뚱하게 찍어 호도하는 수법, 어디서 많이 본 듯 하지 않냐?
그렇다. 해럴드 경제, 조선일보 자회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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