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에 내리는 비 새벽에 비 내리는 소리를 듣고 잠에서 깨어났다. 머리맡에 소근소근 다가서는 저 부드러운 발자국 소리. 개울물 소리에 실려 조용히 내리는 빗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으면 살아 있는 우주의 맥박을 느낄 수 있다. 새벽에 내리는 빗소리에서 나는 우주의 호흡이 내 자신의 숨결과 서로 이어지고 있음을 감지한다. 그 무엇에도 방해받지 않는 자연의 소리는, 늘 들어도 시끄럽거나 무료하지 않고 우리 마음을 그윽하게 한다. 사람이 흙을 일구며 농사를 짓고 살던 시절에는 이와 같은 자연의 소리를 들으면서 그 질서 안에서 넘치지 않고 순박하게 살 수 있었다. 작은 것에 만족하고 적은 것에도 고마워했다. 남이 가진 것을 시샘하거나 넘보지도 않았다. 자기 분수에 자족하면서 논밭을 가꾸듯 자신의 삶을 묵묵히 가꾸어 나갔다. 그러나 물질과 경제를 '사람'보다도 중요시하고 우선시하는 요즘 세상에서는, 농사를 짓는 사람들까지도 대부분 예전 같은 감성과 덕성을 지니고 있지 않다. 농사도 이제는 기업으로 여겨 먼저 수지타산을 따져야 하기 때문이다. 논밭을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신성한 생명의 터전으로 여기기보다는 생산과 효용의 수단으로 이용하고 있을 뿐이다. 좁은 땅덩이에 인구는 불어나 어쩔 수 없이 양계장처럼 켜켜이 올려놓은 아파트라는 주거형태는, 우선은 편리하겠지만 인간의 본질과 장래를 생각할 때 결코 이상적인 주거공간은 못 된다. 그 같은 주거공간에는 생명의 근원인 흙이 없다. 허공에 매달려 추상적이고 관념적으로 살아가는 생태이므로 인간생활이 건강할 수 없다. 한 마디로 요약하면, 사람은 흙에서 멀어질수록 병원과 가까워진다. 우리에게는 각자가 짊어지고 있는 상황이 있다. 좋건 싫건 그 상황 아래서 살아가지 않을 수 없다. 자신의 뜻은 보다 단순하고 소박하게 살고 싶은데, 주변의 상황은 그렇게 살기를 허용하지 않는다. 이게 아닌데 아닌데 하면서도 어쩔 수 없이 끌려가면서 사는 일이 허다하다. 물론 그와 같은 자기 자신이 순간순간의 삶을 통해서 그렇게 만들어 놓은 것이고 개인의 집합체인 사회가 또한 그런 흐름을 이루어 놓은 것이다. 이를 다른 용어로 표현하자면, 우리들의 삶은 '업業의 놀음'이라고 할 수 있다. 개인의 상황을 별업別業이라 하고, 사회적인 상황을 공업共業이라고 한다. 우리 둘레가 온통 부정 부패와 검은 돈의 거래로 들끓고 있는 요즘의 현실을 지켜보면서, 우리 시대가 저지른 업의 놀음을 실감하게 된다. 탐욕이 생사 윤회의 근본이라는 말도 있지만, 모두 분수 밖의 욕심 때문에 나라꼴이 이 지경에 이른 것이다. 끼니를 이을 수 없을 만큼 가난한 처지라면 이해도 가지만, 다들 번쩍거리면서 살만큼 사는 사람들이 검은 돈에 놀아나고 있으니, '사과상자'의 위력이 무엇이기에 이 모양 이 꼴인가. 자기 분수와 명예를 목숨처럼 지키면서 꿋꿋하게 살았던 우리 선인들의 선비 정신을 생각하면, 돈의 노예로 전락해 버린 그 후손인 우리의 설 자리는 과연 어디일 까 싶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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