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심

[스크랩] Re:파격적인 육두문자 법문 / 무애도인 춘성스님

병노 2013. 2. 5. 14:00

 

[서평] ≪춘성, 무애도인 삶의 이야기≫, 김광식, 새싹

 

 

 

“자유는 만물의 생명이요. 평화는 인생의 행복이다.”로 시작되는 “조선독립의 서”는 만해 한용운이 조선이 독립해야 하는 까닭을 준엄하게 써내려간 글이다. 만해는 이 글을 일본 검사에게 제출하고, 상해의 대한민국 임시정부에도 전달했는데 이 글은 기미독립선언문과 함께 독립운동과 관련하여 대문장으로 평가받는다.

 

이 “조선독립의 서”는 독립운동가들이 돌려가며 읽고 외웠으며, 이역만리 땅에서 조국 독립을 위해 투쟁하였던 독립운동가들의 가슴을 뛰게 한 글이다.

 

그렇다면, 이 대문장이 어떻게 세상에 나왔을까? 만해는 1919년 독립선언 기념식에서 일제에 체포되었는데 그 뒤 지극정성으로 만해를 옥바라지 한 무애도인 춘성 큰스님이 전달한 것이라고 한다. 춘성 큰스님이 없었더라면 우리는 만해의 그 대문장을 영영 못 볼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 만해의 제자 춘성 큰스님은 아직 많은 이에게 알려지지 않았다.

 

▲ "춘성, 무애도인 삶의 이야기" 책 표지     

 

그 무애도인 춘성을 찾아 밝혀낸 책이 나와 화제이다. 바로 현재 백담사 만해마을 김광식 연구실장이 새싹을 통해 낸 ≪춘성, 무애도인 삶의 이야기≫가 그 책이다. 춘성은 그저 “없다. 없다.”란 말만 되뇐 대선사라고 한다. 특히 우리가 스승의 날을 맞아 생각해 볼 것은 로 만해와 춘성 그리고 만공과 춘성 사이는 어떤 사제관계였는 지이다. 

 

춘성은 만해가 옥에 갇혀 있을 동안 망월사에 머무르고 있었다. 춘성은 땔감이 가득한데도 이불도 덮지 않고 냉골 방에서 참선하며 밤을 지새운 적이 있다. 왜 그랬을까? 춘성은 말한다. “제 스승이 독립운동을 하다 왜놈들한테 붙잡혀 지금 서대문 감옥의 추운 감방에서 떨고 계시는 데, 그 제자인 제가 어찌 따듯한 방에서 잠을 잘 수가 있겠습니까?”

 

스승을 지극히 생각하는 춘성의 진면목을 여실히 드러내는 대목이다. 그런가 하면 춘성은 이 시대의 큰 스님 만공을 끔찍이 모셨던 제자로 꼽힌다.

 

 

▲ 만해 한용운이 쓴 "조선독립의 서", 춘성이 몰래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전달했다.     ? 새싹

 

 

 ▲ 봉국사 설법전에서 설법하는 춘성     ?새싹

 

 

책을 읽다 보 스님에 대한 재미있는 일화가 참 많다. 특히 일본 경찰심문에 답하는 스님을 보라!

 

“본적이 어디입니까?”

“그것은 당신이나 나도 가지고 있으며, 살았다 죽었다 하는 자지야!”

“자지라고요? 그러면 고향은 어디입니까?”

“내 고향이야 우리 어머니 보지 속이지.”

 

경찰은 스님을 이상하게 생각하고 풀어줄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춘성스님은 욕쟁이 스님으로 유명하지만 욕은 할지언정 가슴은 참으로 따뜻한 분이었다고 증언하는 사람이 많다.

   

춘성은 양복을 입고 밖에 나가면 거지에게 양복을 벗어주곤 했고, 선방을 벗어나 도회지에 가면 한 달 반 이상을 다방에 머물며 할아버지, 할머니, 청년들을 도반으로, 벗으로 삼아 함께 어울리기를 좋아했다고 한다. 춘성의 대중불교 정신을 드러내는 좋은 본보기이다.

 

그리고 춘성은 지독한 정진을 하는 스님으로 유명했다. 유점사에서 정진하던 춘성은 잠이 쏟아지자, 잠에서 항복 받으려고 법당 뒤에 큰 항아리를 묻고 물을 가득 채운 다음 그 항아리에 들어가 머리만 내 놓은 채 물에 잠겨 있었다. 하지만, 그도 인간인지라 항아리 속에서 몸이 굳어버려 죽기 직전까지 가기도 했는데 살을 에이는 고통과 추위를 이겨냈다는 이야기도 소개되었다.

 

이 책은 1부 '춘성의 일대기', 2부에서 그와 인연이 맺은 사람들의 '내가 만난 춘성', 3부 '일화로 만나는 춘성'으로 구성되어 있다. 특히, 다양한 관련 사진자료가 붙어 있으며, 춘성문도회 스님들인 혜성ㆍ혜광ㆍ명진ㆍ수경ㆍ대선, 진관스님과 고은 시인 등 21명의 관련인사가 각각 그를 회고하면서 지은이와 대담한 내용이 실려있다.

▲ 가사 차림의 춘성. 그는 평소 단벌이어서 옷을 빨 가사만 걸치고 있었다. ?새싹

특히 뒷부분에는 춘성의 다양한 일화가 실려있다. 한 예는 “누구냐, 나는 중대장이다.”이다. 통행금지가 있을 때 그가 그 통금시간에 밤길을 가다 순경을       맞닥뜨렸다. 순경이 “누구냐?”라고 묻자 그는 “중대장이다!”라고 대답하는자  순경이 플래시를 비춰보고 “아니? 스님 아니시오!”라고 하자

“그래. 내  중의 대장이지! 맞지?”라고 했다나.

                                                                                                   

그리고 “내가 만난 춘성”에 보면 각계 인사의 춘성에 대한 회고담이 나온다. 그 회고담의 제목들을 보면 “‘긴 누비파’의 두목이었던 춘성스님”, “좋은 옷은 네가 입어라”, “우리 시대에 환생한 원효”, “이불은 부처와 이별하는 덮개”,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 같은 수행자” 그리고 고은 시인의 “호방질탕한 선승” 등 독자에게 흥미를 줄 것들이 보인다.

 

 

              ▲ 춘성의 다비식 장면. 일체의 장엄을 생략하고 거적대기를 덮고 화장했다.     ? 새싹

 

 

다만, 옥에도 티가 있듯 이 책의 흠이라면 좌탈입망, 한로축괴, 만구성비, 소무공덕, 육근, 문두, 안이비설신 등 어려운 불교 용어가 풀이도 없이 자주 등장하여 불교도가 아닌 이들에게 어렵게 읽히는 측면이 있다. 또 자료의 불충분에 바탕하고 스승들과의 관계가 중요한 부분이었겠지만 앞부분엔 춘성이 아닌 만해, 만공 이야기로 채운듯한 느낌이 들어 아쉬웠다.

 

그럼에도, 이 책은 많은 이가 읽고 춘성이 걸어간 길을 따라가 보고 춘성 큰스님이 강조한 “없다”를 이해해볼 수 있는 좋은 작품이다. 험한 세상, 그리고 명망과 돈에 집착하는 세상에 춘성 큰스님을 그리는 것은 나만의 감상일까?

 

 

 

 

 춘성, 승속을 넘나들었던 선승

 [대담] ≪춘성, 무애도인 삶의 이야기≫, 김광식, 새싹

 

- 춘성은 만해·만공의 제자라고 말한다. 하지만, 책에는 만해 그림자가 적다는 느낌이다. 왜 그럴까?

 

“이것은 춘성에 대한 기록이 충실치 않은 것이 그 첫 번째 이유일 것이다. 그리고 춘성이 1930년 이후부터는 참선으로 기울어지면서, 만공을 당신의 스승으로 인정하고, 춘성 상좌들도 만해 그림자보다는 만공 쪽을 계승한 것을 강조한 것이 그 요인이라 생각한다. 그리고 집필과정에서 춘성 문도들이 만해 그림자에 대해 약간 이의제기를 해와 필자가 수정한 측면도 영향을 주었다.”

 

- 춘성이 가끔 양복을 입은 것으로 보이는데 그 까닭은 무엇일까?

 

“그는 불교수행에서 승속을 넘으려고 했던 배경, 사상이 있었다고 봐야 한다. 그리고 속세에서 무애한 행동을 하려는 의식 곧 일에 막히거나 거치는 것이 없도록 하려는 그의 생각 때문이 아닐까? 다만, 이 문제는 그에 대한 직설적인 증언, 기록이 없어 단언키는 어렵다.”

 

- 춘성은 성기를 말하는 욕쟁이 스님인 것으로 보인다. 그가 그렇게 행동한 까닭이 무엇일까?

 

“춘성은 욕설을 법문으로 활용한 스님이다. 욕설은 인간의 근원을 표출하는 언어로 볼 수 있으며, 욕에 담긴 인간의 원형질적인 본성을 받아들여야 하지 않을까?”

 

- 스님은 입적하기 직전 ‘신도 위해 사나?’라는 말을 했다. 그렇게 말한 까닭이 무엇일까?

 

“이 말은 역설적으로 자기 자신에 충실한, 본성 혹은 불성을 추구한 이력이 엿보이는 대목이 아닐까? 그가 자신을 따르던 수많은 신도를 거들고, 보살폈던 정황을 함께 보면 이는 지독한 선 취향이 아닌가 한다.”

 

- 춘성은 선승인가?

“그렇다. 그는 선방 수행을 지독하게 했고, 선방 조실을 역임하였으며, 그를 만났던 수좌들은 그의 선, 수좌, 선방 등을 엄청나게 강조했던 그의 역사를 필자에게 증언했다. 그는 20~30대엔 교학승, 포교승이었지만 40대 곧 1930년 이후부터는 선승의 길을 갔고 그래서 그의 만공과 수덕사에 대한 사랑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출처 : 무진장 - 행운의 집
글쓴이 : 유당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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