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잔 차 스님
아잔 차 스님의 오두막 본문 중에서
승려가 되고 나서 3년쯤 되었을 무렵, 나는 삼매와 지혜가 어떤 것인지 무척 궁금해졌다. 삼매를 경험하고 싶은 열망에 쉬지 않고 열심히 수행했다. 좌선을 할 때마다 수행이 어떻게 진전되는지 알려고 노력했고, 그래서 마음이 몹시 산란해졌다. 특별히 하는 일 없이 명상도 하지 않을 때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하지만 마음을 집중하려고 애쓰기만 하면 마음이 극도로 동요하는 것이었다.
“어찌된 일이지? 왜 이렇게 되는 걸까?”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얼마 뒤, 나는 집중이 숨쉬는 것과 같다는 것을 깨달았다. 호흡을 억지로 깊거나 얕게, 빠르거나 느리게 하려고 하면 숨쉬기가 어려워진다. 그러나 들숨과 날숨을 의식하지 않으면서 걸으면 호흡이 자연스럽고 부드러워진다. 마찬가지로, 억지로 고요해지려 애쓰는 노력은 집착과 욕망의 표현일 뿐이며 도리어 고요해지지 못하게 방해한다.
계속 수행을 하면서 세월이 흐름에 따라 신심이 굳어지고 바른 이해가 자라게 되었다. 명상은 서서히 자연스럽게 깊어졌다. 나는 욕망이 수행의 장애물임을 분명히 알게 되었고, 그래서 더 솔직한 태도로 수행했으며, 마음의 요소들이 일어날 때마다 조사를 했다. 나는 앉고 지켜보았고, 앉고 지켜보았으며, 그런 과정을 수없이 되풀이했다.
한참 세월이 흐른 뒤 어느 날이었다. 밤 11시가 지났을 무렵, 나는 명상을 하며 걷고 있었다. 생각은 거의 떠오르지 않았다. 나는 숲 속의 수도원에 있었는데, 멀리 마을에서 열리는 축제 소리가 들렸다. 걷기 명상을 하다가 조금 피로해진 나는 오두막으로 돌아갔다. 자리에 앉아서 결가부좌를 하려고 했지만 평소처럼 빨리 취해지지 않는다고 느꼈다. 내 마음은 깊은 삼매에 들어가기를 스스로 원했다. 그 일은 저절로 일어났다. 나는 속으로 생각했다. “왜 이런 것일까?” 자리에 앉았을 때, 나는 참으로 고요했다. 마음은 확고히 집중되어 있었다. 마을에서 들려오는 노랫소리가 여전히 들리기는 했지만, 그 소리가 들리지 않게 할 수도 있었다.
하나로 모아진 마음을 소리를 향해 돌리면 소리가 들렸다. 그러지 않을 때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소리가 다가오면 ‘알아차리는 자’를 바라보았는데, 그것은 소리와 별개였다. 나는 생각했다. “이것이 바로 그것이다. 이게 아니라면 대체 무엇이 그것일 수 있겠는가?” 여기에 있는 바리때와 주전자가 별개이듯이 마음과 그 대상은 별개임을 볼 수 있었다. 마음과 그 소리는 조금도 연결되어 있지 않았다. 이런 식으로 계속 조사해 나갔고, 결국 이해하게 되었다. 나는 무엇이 주체와 객체를 결합시키고 있는지를 보았고, 그 연결이 끊어지자 참된 평화가 드러났다.
그 당시 내 마음은 다른 무엇에도 흥미를 느끼지 않았다. 수행을 멈추고자 했다면 쉽게 그럴 수 있었을 것이다. 승려가 수행을 멈출 때는 “내가 게으른가? 피곤한가? 산란한가?” 하고 생각해 보아야 한다. 그러나 그때 내 마음에는 게으름이나 피로감이나 산란함이 없었으며, 모든 면에서 오직 완전하고 충족된 상태였다.
잠시 쉬기 위해 수행을 멈추었을 때, 멈춘 것은 앉은 자세뿐이었다. 내 마음은 그대로였으며 움직이지 않았다. 자리에 눕는 순간에도 마음은 이전처럼 고요했다. 머리가 베개에 닿는 순간, 마음이 내면으로 방향을 바꾸었다. 어디에서 방향 전환이 일어나고 있는지는 알지 못했으나 마치 전기 스위치를 올리듯 내면으로 방향을 바꾸었고, 내 몸은 큰 소리로 폭발하는 것 같았다. 알아차림은 더없이 또렷해지는 것 같았다. 마음은 그 지점을 지나 안으로 더 깊이 들어갔다. 안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진정 아무것도. 아무것도 그 안으로 들어가지 않았으며, 아무것도 거기에 도달할 수 없었다. 알아차림은 내면에서 잠시 멈추었다가 다시 밖으로 나왔다. 내가 나오게 한 것이 아니었다. 나는 그저 관찰자였으며, 알아차리는 자였다.
이 상태에서 빠져나오자 평소의 마음 상태로 돌아왔다. 질문이 일어났다. “이게 뭘까?” 그러자 대답이 나왔다. “이 일들은 본래 그런 것이다. 의심할 필요는 없다.” 대답은 이뿐이었으며, 내 마음은 받아들일 수 있었다.
한동안 가만히 멈추어 있던 마음은 다시 내면으로 향했다. 내가 향하게 한 게 아니라 마음이 스스로 향했다. 마음은 안으로 들어가서 이전처럼 한계에 이르렀다. 두 번째로 들어간 이때, 몸은 미세한 조각들로 산산이 부서졌으며, 마음은 더 깊이 들어가서 고요해지고 닿을 수 없게 되었다. 마음은 안으로 들어가서 원하는 만큼 머문 뒤 다시 나왔고, 나는 평소 상태로 돌아왔다. 마음은 줄곧 스스로 행동하고 있었다. 나는 마음을 어떤 식으로 오고 가게 하려고 의도하지 않았다. 오로지 알아차리고 관찰했을 뿐이다. 나는 의심하지 않았다. 계속 앉아서 관찰해 나갔다.
마음이 세 번째로 안으로 들어갔을 때, 온 세상이 부서져 버렸다. 땅, 풀, 나무, 산, 사람, 모두가 빈 공간이었다. 남은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마음은 안으로 들어가서 원하는 만큼 머물고, 할 수 있는 만큼 오래 머문 뒤 다시 나와서 평소 상태로 돌아왔다. 나는 마음이 어떻게 머물렀는지 모른다. 그런 일은 알기도 어렵고, 말하기도 어렵다. 비교하여 설명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
이 세 가지 경험에 대해 무슨 일이 일어났다고 누가 말할 수 있겠는가? 누가 알 수 있겠는가? 그것을 무엇이라고 부를 수 있겠는가? 이제까지 내가 말한 것은 모두 마음의 성질에 관한 것이다. 마음의 요인이 어떠니, 의식의 범주가 어떠니 얘기할 필요가 없다. 나는 굳은 믿음을 가지고 열심히 수행했으며 목숨까지 걸 각오가 되어 있었다. 그리고 이 체험을 한 뒤 온 세상이 바뀌었다. 모든 지식과 이해가 완전히 바뀌어 버렸다. 이런 나를 보고서 미쳤다고 생각한 사람도 있을 것이다. 사실, 알아차림을 강하게 단련하지 않았다면 미쳐버렸을지도 모를 일이다. 세상 모든 것이 예전과는 완전히 달랐기 때문이다. 하지만 실상 바뀐 것은 나밖에 없었고, 그럼에도 나는 여전히 같은 사람이었다. 모두들 이런 식으로 생각할 때, 나는 저런 식으로 생각했다. 모두들 이런 식으로 얘기할 때, 나는 저런 식으로 얘기했다. 나는 다른 사람들과 다른 길을 걷고 있었다.
내 마음의 힘이 최고조에 달했을 때, 그것은 기본적으로 마음의 에너지, 집중의 에너지였다. 이 체험은 삼매의 에너지에 바탕을 두고 있었다. 삼매가 이 수준에 도달하면 위빠싸나는 저절로 흐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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