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정스님이 머물던 암자를 찾았다.
수년만에 또다시 불일암 가는 산길에서 솔바람으로 귀를 씻고 있는 것이다.
산길 중간에는 엉덩이만 붙이고 쉬어 가는 통마무 자리가 서너개 마련되어 있고,
땀을 들이면서 보라는 듯 고려 말의 선승 나옹 스님의 시가 한 편 걸려 있다.
청산은 나를 보고 말없이 살라 하고
창공은 나를 보고 티 없이 살라 하네
탐욕도 벗어 놓고 성냄고 벗어놓고
물같이 바람같이 살다가 가라 하네
두런두런 시를 읽고 있자니 나옹 스님이 환생하여 법문하는 것 같다.
청산처럼 말없이 창공처럼 티없이 탐욕이나 성냄을 벗어놓고 물같이 바람같이
순리대로 살라고 말씀하시는 성 싶다.
문득 콧잔등이 시큰해진다.
몇달전 나그네는 10여년 다니던 정든 직장을 놓았다.
그러자 아내와 두 딸들이 불안해했다.
중학교 3학년인 작은 딸은 힘없이 '이제 우리 집도 가난해지는 거야?'하면서
학원가는 날도 줄였다. 그 무렵 법정스님께서 하신 말씀은 이러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직장을 꼭 그만두고 싶은가. '다니고 싶은 마음'과 그만두고 싶은 마음'이
반반의 갈등 정도라면 그냥 다녀라. 그러나 '그만두고 싶은 마음'이 단 1퍼센트라도
더 간절하다면 직장을 떠나도 좋다.
무슨 일을 하다가 절망하였을때 그 1퍼센트가 극복의 에너지가 될 것이고,
10여년 직장 생활을 하였다면 이제야말로 자신을 위하여 변화를 줄 때가 되었다."
산길을 좀 더 오르자 예전과 다른 길이 나타난다.
호반새가 사는 오동나무 쪽으로 길이 나 있었는데 지금은 대숲을 비껴돌아 오르게 되었다.
대숲 입구에 '길이 아니면 가지 말라'는 표지판이 화두처럼 다가온다.
'이 청정한 대숲 길을 돌아서면 불일암이 있으니'
그렇다. 산길이 끝나는 곳에 암자가 있게 마련이다.
찬물 한 모금 마시고 다시 힘을 내는 자리가 있다.
어디 가파른 산길의 끝만 그러하리.
모든 인생길이 그러하지 않을까
삶의 길이 막혀 눈앞이 캄캄해지거나,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져 생의 기쁨이 사라졌을 때에도 절망스러운
바로 그 자리에 희망이 숨어 있는 법이다.
맏다른 길에서도 다시 눈을 크게 뜨고 보면
거기에 또 다른 길이 시작되고 있음이다.
- 정찬주 <길 끝나는 곳에 암자가 있다>에서 -
사진/ 법정스님과 정찬주(불일암)
'법정스님 글모음' 카테고리의 다른 글
[스크랩] 소욕지족(少欲知足) (0) | 2010.10.15 |
---|---|
[스크랩] 미리쓰는 유서 - 법정 스님 (0) | 2010.10.12 |
[스크랩] 삶의 기술 (0) | 2010.10.12 |
[스크랩] 스쳐가는 인연은 그냥 보내라 (0) | 2010.10.07 |
[스크랩] 성 베네딕도 (0) | 2010.10.0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