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한 친지의 병문안을 하고 돌아오는 길에서였다.
주택가 한쪽에 잔디밭이 있었는데
대여섯 살 된 사내아이가 토끼풀을 뽑아 한 손에 가지런히 들고 있었다.
그 아이의 모습이 하도 귀여워 다가가서 물었다.
“누구에게 주려고 그러니?”
“여자친구에게 주려고요.”
이 말을 듣고 그 애가 너무 기특해서
그 곁에 쭈그리고 앉아
“나도 여자친구에게 줄 꽃을 꺾어야겠네”
하고 토끼풀을 뽑았다.
한 주먹 뽑아들고 일어서니
내 토끼풀에는 꽃이 없다며 자기가 뽑아 든 꽃에서
세 송이를 내게 건네주었다.
유치원생 또래의 아이가
여자 친구한테 주기 위해 토끼풀을 뽑고 있던 그 모습이
요 근래 내가 마주친 사람들 중에서 가장 감동적이었다.
내가 뽑은 토끼풀에는 꽃이 없다고
자기가 뽑은 꽃을 내게 나누어준 그 마음씨도
너무나 착하고 기특했다.
이런 아이들이 세상의 물결에 휩쓸리지 않고 곱게 자란다면
이 땅의 미래도 밝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날 오전 나는 정기집회에서
'나눔'에 대해서 이야기를 했었다.
그런데 진정한 나눔이 무엇이라는 걸 그 애가 몸소 보여주었던 것이다.
나눔이란 이름을 내걸거나 생색을 내지 않고
사소한 일상적인 일로써 마음을 따뜻하게 해주는 것이다.
이를테면 끼어들려는 차에 선뜻 차로를 양보하는 일,
엘리베이터 단추를 눌러 뒤에 오는 사람이 탈 수 있도록 마음 쓰는 일,
또 뒤따라오는 사람을 위해 열린 문을 잡아주는 일,
그리고 마주치는 사람에게 밝은 표정으로 미소 짓는 일,
이와 같은 일들이 다 나눔 아니겠는가.
나눔에는 무엇보다도 맞은편에 대한 배려가 전제되어야 한다.
흔히 가을을 수확의 계절이라고 하는데,
이와 같은 표현은 어디까지나 사람을 기준으로 한 것이다.
자연의 입장에서는 거두어들임이 아니고 나누어줌이다.
겨울의 혹독한 추위를 견뎌내고
여름날의 폭풍우와 뙤약볕 아래서 가꾸어 온
이삭과 열매와 잎과 뿌리를,
곡식과 과일과 채소들을 무상으로 나누어준다.
자연의 은덕을 노자는 이렇게 말한다.
'하늘과 땅은 만물을 생성하고 양육하지만 자기 소유로 삼지 않고,
스스로 이룬 바 있어도 자신의 능력을 과시하지 않으며
온갖 것을 길러주었으면서도 아무것도 거느리지 않는다.
이것을 일러 크나큰 덕이라 한다.'
죄다 나누어줄 뿐 어느 것 하나도 차지하거나 거느리지 않는다.
그러면서도 자신의 공을 결코 내세우지 않는다.
이것이 대지가 지닌 덕이다.
땅을 의지하고 살아가는 우리는
이와 같은 대지의 덕을 본받을 수 있어야 한다.
나눔이나 봉사에 어떤 보상이 있다면
그건 나누며 봉사할 때의 그 뿌듯하고 흐뭇한 마음일 것이다.
결식 이웃에게 부식을 만들어 보내는 일을 하고 있는
'맑고 향기롭게 모임'의 회원으로부터
지난 추석 무렵 편지를 한 통 받았는데,
편지 중에 이런 구절이 있었다.
'한 주에 한 번씩 남을 위해 봉사를 한다기보다는
그곳에 나가서 한주 동안 흐트러졌던 마음을 가다듬고
작은 힘이나마 이웃에게 따듯한 마음을 나눌 수 있음에
도리어 위안과 기쁨을 안고 돌아옵니다.
무언가를 주러 가서
도리어 몇 갑절, 한 아름 안고 돌아오니
이렇게 실다운 일이 바로 부처님 법인가 봅니다.
맑고 향기롭게 조리장에 모이는
정말 아름다운 사람들을 만나는 금요일을 만들어주셔서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나눔에서 이와 같은 위안과 기쁨과 고마움이 따른다.
나눌 때 내 몫이 줄어드는가?
물론 아니다.
뿌듯하고 흐뭇한 그 마음이 복과 덕을 쌓는다.
우리에게 건강과 재능이 주어진 것은
그 건강과 재능이 남아 있는 동안
그걸 이웃과 함께 나눌 수 있어야 그 뜻이 우주에 도달한다.
돌이켜 보니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나는
이웃에게 많은 은혜를 입어 왔다.
뒤늦게 철이 들어
그 은혜 갚음을 하고 가야겠다는 생각이 일고 있다.
몸은 고단하지만 여지저기 나를 필요로 하는 곳에
최소한으로라도 드러내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우리를 감싸고 있는 이 대지와 공기와 햇볕과 바람,
나무와 물로부터 아무 대가도 치르지 않고
무상으로 입은 그 은혜와 보살핌이 얼마이겠는가.
한순간도 우리 곁에 없으면 살아갈 수 없는 소중한 존재들.
먹고 입고 거처하는 의식주가 모두 자연의 혜택 아닌 것이 없다.
우리는 살아 있는 동안 이런 은혜와 보살핌에 대해서
나누는 일로써 보답하해야 한다.
이것이 이 지구상에 몸담아 사는
인간의 도리이고 의무일 것이다.
인도의 현자, 비노바 바베는
학교교육이 아닌 어머니의 믿음에 감화를 받으면서 성장한 사람이다.
어느 날 체격이 건장한 거지에게 적선을 베푼 어머니를 보고
"저런 사람에게 적선하는 것은 게으름만 키워주게 돼요.
받을 자격 없는 사람에게 배푸는 것은
그들에게도 좋지 않아요" 라고 불만을 토로한다.
이때 어머니는 차분하게 말한다.
"아들아, 우리가 무엇인데
누가 받을 사람이고 그렇지 못한 사람인지를 판단한단 말이냐.
내 집 문전에 찾아오는 사람이면 그가 누구든 다 신처럼 받들고
우리 힘닿는 대로 베푸는 거란다.
내가 어떻게 그 사람을 판단할 수 있겠느냐."
꿀벌이 다른 곤충보다 존중되는 것은
부지런해서가 아니라 남을 위해 일하기 때문이다.
남이란 누구인가?
그는 무연한 타인이 아니라 또 다른 나 자신 아니겠는가.
그는 생명의 한 뿌리 에서 나누어진 가지다.
![](https://t1.daumcdn.net/cfile/cafe/113C62264C48EC9370)
출처 : 생활불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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