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정스님 글모음

[스크랩] 산자두를 줍다

병노 2010. 8. 18. 13:25
처서를 전후로 더위를 씻어가는 비가 몇 차례 오락가락 하더니 
바람결이 많이 서늘해졌다. 
밤으로 풀벌레 소리가 요란하고 반딧불이가 어지럽게 날아다닌다. 
뒤꼍에서 산자두 떨어지는 소리가 함석지붕에 울릴 때마다 
반사적으로 움찍거려진다.
바람결이 서늘해지자 어느새 하늘도 저렇게 높아졌다. 
산속에 사는 사람들의 귀는 바람결을 타고 날로 예민해간다.
팽팽하게 당겨진 현악기의 줄처럼 
슬쩍 스치기만 해도 
저 안에서 깊은 소리가 울려나올 것 같은 그런 태세다.
지난 여름은 참으로 무더웠다. 
이렇게 말할 수 있는 것도 우리가 살아 있기 때문이다. 
살아 있는 존재만이 더위와 추위를 느낄 수 있다. 
그래서 삶이란 
우리에게 주어진 단 한 번의 행운이라고 한다.
순간순간 살아있는 준재로서 
아침이면 밝은 햇살을, 
저녁이면 어둠을 맞이하는 행운을 누리고 있다. 
이 세상이 계속해서 우리를 향해
무어라고 말을 걸어온다.
그러므로 삶은
우리가 조금씩 아껴가면서 꺼내 놓고 싶은 
보배요, 행운이다.
지난 여름 그 무더위 속에서도 
우리가 누린 행운의 하나는 
반세기가 넘게 남북으로 흩어진 가족들의 일부가 
한때나마 부둥켜안고 통곡을 할 수 있었던 만남이었다. 
그것은 단순한 행운이 아니라 비극적인 행운이다. 
개인의 의지에서가 아니라 
미국과 소련의 전후 이해관계에 의해 자행된 분단이었기 때문이다.
이 비극적인 행운 속에서 
우리가 함께 눈물을 지으면서 거듭 되새긴 것은 
'어머니의 존재'였다.
70이 넘은 자식이 어머니 앞에서 통곡을 하고, 
집을 나간 자식을 자나깨나 애타게 기다리며 
50년을 참고 견뎌온 그 인고의 세월에 
주름 잡힌 어머니의 모습은 참으로 거룩하게 다가섰다.
한 몸에서 떨어져 나온 자식에게 
어머니는 더 말할 것도 없이 생명의 뿌리이다. 
어머니야 말로 우리가 기대고 의지할 인간의 영원한 대지다. 
이와 같은 어머니를 
아침저녁 가까이에서 모실 수 있는 사람은 
특별한 행운임을 고맙게 여겨야 한다. 
세상은 지금 어지럽게 변하고 있다. 
정보화 사회의 인터넷 보급으로 
세상은 하루가 다르게 변해가고 있다. 
인터넷에 맛을 들인(어쩌면 걸려든) 사람들은 
지루하게 기다릴 필요가 없어졌다. 
찾고자 하는 자료들은 
앉은 자리에서 재빠르게 손에 넣을 수 있다. 
그들은 인간적인 접촉보다 
가상 공간에서 이루어진 접속을 
보다 구체적인 사실로 받아들인다. 
그들은 감정이 없는 컴퓨터 앞에 홀로 앉아 있다. 
둘레에는 삶의 율동과 지혜, 인간미와 흙냄새 등 
현실 세계는 존재하지 않는다. 
추상적인 지식과 정보와 가상 공간이 있을 뿐이다. 
차디찬 정보는 있어도 
따듯한 삶의 실존이 없다. 
이것은 우리 시대의 단적인 현상이다.
편리한 연장이기 때문에 
나도 한때는  컴퓨터를 다루어볼까 했었다. 
그러나 보다 단순하고 간소하게 살고자 하는 
내 삶의 규범에 맞지 않아 
한때의 호기심을 거두어들였다.
《장자》 외편 <천지(天地)>에 이런 이야기가 있다. 
공자의 제자 자공이 한수 기슭을 지날 때 
한 노인이 항아리에 물을 길어 밭고랑에 붓는 
힘든 일을 하고 있었다. 
이 광경을 보고 자공이 물었다.
"어째서 양수기를 쓰지 않습니까?"
노인의 대답은 이러했다.
"양수기기를 쓰면 편리하다는 것쯤은 나도 잘 알고 있소. 
그러나 한 번 기계에 의존하기 시작하면 
거기 기심(機心) 일어납니다. 
기계에 마음이 팔리면 순박하지 못하고, 
순박하지 못하면 정신은 안정을 이룰 수 없어 
마침내 도를 지킬 수 없습니다.
나는 양수기를 다룰 줄 몰라서가 아니라 하지 않는 것이오."
이 말을 듣고 자공은 
부끄러워 고개를 숙인 채 아무 말도 못 했다.
지난 여름에 읽에 읽은 
프랑스의 사회학자이자 에세이스트인 피에르 쌍소의 
《느리게 산다는 것의 의미》가 
아직도 좋은 여운을 남기고 있다.
모든 것이 빠르게 돌아가는 세상에서도 
그는 느리게 살 필요가 있다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느림'은 개인의 자유를 일컫는 가치이기 때문이다. 
느리게 사는 지혜는 
첫째 빈둥거릴 것. 
즉 자기만의 시간을 가지라는 것이다. 
둘째 들을 것. 
신뢰할 만한 다른 사람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다. 
셋째 권태. 
무의미할 때까지 반복되는 것을 받아들이면서 
취미를 가지는 것이다. 
넷째 꿈을 꿀 것. 
자기 안에 희미하지만 예민한 
하나의 의식을 자리 잡아 두는 것이다. 
다섯째 기다릴 것. 
가장 넓고 큰 가능성을 열어 두라는 것이다. 
여섯째 마음의 고향,
즉 존재의 퇴색한 부분을 간직해두라고 그는 말한다.
한가로이 거니는 것, 
그것은 시간을 중단시키는 것이 아니라 
시간에 쫓기지 않고 시간과 조화를 이루는 행위라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시간에 구애받지 않는 자유로움이다.
그는 또 이런 말도 하고 있다.
'소유가 우리를 괴롭히는 까닭은 
그것이 우리에게 궁핍을 모르게 하고,
우리의 정체성을 더욱 부풀게 해주기 때문이다.
재물이 우리가 할 일을 대신 하게 될 때 
우리는 스스로 존재할 수 없게 된다.'
일찍이 동양의 현자들이 가르친 바 있는 사상을 
그는 현대의 언어로 서술하고 있다. 
동양의 지혜가 
그 현지에서는 무시되거나 소홀히 다루어지고 있는데, 
서양의 지성이 이를 새롭게 조명하고 있다. 
우리는 삶의 지혜를 밖에서만 찾으려고 한다.
                                                                 
'살짝 스치기만 할 것이지 움켜잡지 말라. 
움켜잡는 순간 그대는                                                    
복잡한 삶 속으로 빠져들고 말 것이다
출처 : 생활불교
글쓴이 : 하늘바다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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