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로 여기 이 자리 - 법정스님
말보다는 침묵이 더욱 귀하게 여겨질 때 입다물고 침잠하고 싶어집니다.
말이 의사표시의 하나이듯이 침묵도 또한 의사표시의 한 방법입니다.
말과 침묵의 상관관계 안에서 자기 자신을 들여다보는 일은 삶의 내밀한 오솔길이기도 합니다.
15세기 인도의 영적인 시인 까비르는 이렇게 노래합니다.
벗이여,
어디 가서 '나'를 찾는가
나는 그대 곁에 있다
내 어깨가 그대의 어깨에 기대어 있다
절이나 교회에서 나를 찾으려
하지 말라 그런 곳에 나는 없다
인도의 성스러운 불탑들 속에도
회교의 찬란한 사원에도
나는 없다
어떠한 종교의식 속에서도
나를 찾아낼 수 없으리라
다리를 꼬고 앉아 요가수행을 할지라도
채식주의를 엄격히 지킨다 할 지라도
굳은 결심으로 속세를 떠난다 할지라도
그대는 나를 찾아내지 못하리라
그대가 진정으로 나를 찾고자 한다면
지금 이 순간을 놓치지 말라
바로 지금 이 순간에 나를 만날 수 있으리라
벗이여, 나에게 말해다오
신은 숨 속의 숨이니라
우리는 무엇을 믿습니까? 부처님? 신? 하느님?
이것은 또 얼마나 관념적이고 개념화된 이름입니까.
이런 메마른 관념과 개념에 얽매여 살아있는 진짜 부처님과 신을
보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관념화되고 개념화된 '머리의 종교'는 공허한 이론에 지나지 않습니다.
삶이 약동하는 '가슴의 종교'만이 우리들의 영혼을 구제할 수 있습니다.
그럼 부처님과 신은 어디에 존재하나요?
마음 밖에서 찾으려고 하지 마십시오.
마음 밖에 있는 것은 모두가 허상입니다.
분명히 새겨두십시오.
불교는 부처님을 믿는 종교가 아닙니다.
인과관계를 비롯한 우주 질서와 존재의 실상을 철저히 인식하고
본래의 자아에 눈떠 온전한 사람이 되는 길입니다.
온전한 사람이 되려면 무엇보다도 먼저 자기 자신을 알아야 합니다.
자기 자신을 알고자 한다면 스스로를 면밀히 지켜보십시오.
자신의 생각과 말씨, 혹은 걸음걸이와 먹는 태도, 운전습관,
그리고 남을 미워하고 시기하는 그 마음을 자세히 살펴보십시오.
마음의 움직임을 살피는 이 과정에서 순간순간 삶의 실체를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안으로 살피고 지켜보는 일이 없다면 우리들의 마음은 거친 황무지가 되고 말 것입니다.
종교는 그럴 듯한 말이나 이론에 있지 않습니다.
순간 순간 마음쓰는 일과 일상적인 행동 안에 있습니다.
'완성'이라는 것 어디 있습니까?
그것은 우리가 추구해야 할 영원한 이상이지 현실은 아닙니다.
중생계가 남아 있는 한 완성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
본래의 깨달음(本來成佛)은 어디다 두고 새삼스럽게 깨닫겠다는 것입니까.
우리가 수도하고 정진하는 것은 새삼스럽게 깨닫기 위해서가 아니라,
본래의 깨달음을 드러내기 위해서입니다.
닦지 않으면 오염되는 것이 바로 우리 마음입니다.
그러므로 본래의 진실한 마음을 지키는 것이 제일 가는
정진(守本眞心 第一精進)이라고 옛사람도 말한 것입니다.
다시 까비르의 시를 소개합니다.
물 속에 사는 물고기가 목말라한다는
말을 듣고 나는 웃는다
진리는 그대 집안에 있다
그러나 그대 자신은
이것을 알지 못한 채
이 숲으로 저 골짝으로
쉴 새 없이 헤매고 있다
여기, 바로 이 자리에
있는 진리를 보라
그대가 원하는 곳이면
어디든지 가보라
이 도시로 저 산으로
그러나 그대 자신의 영혼을
발견하지 못한다면
세상은 여전히 환상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출처 : 생활불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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