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정스님 글모음

[스크랩] 절제의 미덕

병노 2010. 3. 27. 16:41




 절제의 미덕 
        - 2007년 5월 부처님 오신 날을 맞이하여 - 오늘은 '부처님 오신 날'입니다. 부처님은 어디서 오셨을까요? 해마다 돌아오는 이 날을 단순한 기념행사로 여기지 마십시오. 부처님은 우리들에게 어떻게 오셨는지, 우리에게 어떤 존재인지 생각해 보십시오. 저도 가끔 '만약에 부처님의 가르침을 만나지 못했다면 내 인생은 어떻게 됐을까?' 를 돌아 봅니다. 그럴 때면 20대 초반에 불법을 만나게 된 것이 얼마나 고맙고 다행한 일인지 절절하게 느낍니다. 제 삶의 방향과 가치의식이 부처님의 가르침에 의해서 형성되었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만남'에 의해서 거듭 형성되어 갑니다. 사람이 되었건, 사상이나 종교가 되 었건 그와의 만남으로 인해서 눈을 뜨게 되고 인식의 영역이 깊어지고 넓어집니다. 이름도 성도 낯도 모르는 우리들이 오늘 이 자리에서 이렇게 만나게 된 것도 부처님의 가르침 덕분입니다. 이해타산으로 얽혀 사고 파는 장바닥에서가 아니라 순수한 믿음 의 세계에서 만난 길벗들입니다. 한 스승의 가르침을 따르는 도반들이고 법의 형제, 자 매들입니다. 생각할수록 고마운 인연이 아닐 수 없습니다. 시끄럽고 혼란스런 세상에서 각자 나름 의 인생관을 지니고 삶의 지헤와 그 길을 찾게 된 것도 부처님의 가르침 덕입니다. 어떻게 사는 것이 보다 인간적인 삶이고 보리인가를 부처님의 가르침을 통해서 알게 된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전 오늘 여러분과 함께 '만약 이 땅에 부처님이 생존해 게신다면 어떤 문제를 가장 시급하고 중요하게 다룰 것인가'를 한번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각자 한번 상상해 보십시오. 제가 알고 있는 부처님이라면 그 어떤 일 보다도 날로 심각해져 가는 지구 환경에 대한 문제가 무엇보다도 첫째로 떠오를 것 같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환경 위기 앞에 직면해 있습니다. 우리가 의지해 살고 있는 지구의 위기에 마주친 것입니다. 절에 들어와서 맨 처음 배우는 것 중에 원효 스님의 <발심수행장>이란 글이 있습니다. 그 <발심수행장>의 맨 첫머리에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부처님이 세상에 나와 우리들을 이롭게 하는 것은 오랜 세월동안 욕심을 버리고 견디기 어려운 수행을 겪었기 때문이요, 중생들이 불타는 집에서 나오지 못하고 괴로워하는 것은 끝없는 세월을 두고 탐욕을 버리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런 내용의 글입니다. <법화경> 이라는 경전을 보면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을 '불타는 집'에 비유합니다. 생사윤회의 근본은 탐욕에 있다고 하였습니다. 탐욕이란 무엇입니까? 분수에 넘치는 욕심입니다. 오늘날 지구 환경의 위기도 따져보면 안긴들의 끝없는 탐욕에 그 원인이 있습니다. 한정된 자원을 무제한으로 퍼 쓰는데 재앙의 원인이 있습니다. 우리들 삶의 터전인 이 지구는 우리보다 앞서 살다가신 선인들이 물려준 소중한 유산입니다. 그런데 우리 시대에 와서 너무 탐욕을 부리는 바람에 지구는 크게 병들어 있습니다. 미래 세대들의 몫까지도 현재 우리가 빼앗아서 쓰고 있는 실정입니다. 지구의 재생 능력, 이를 자정 능력이라고 합니다. 전문가들 연구에 의하면 지구의 재생 능력은 지금으로부터 20년 전인 80년대 초에 이미 그 한계에 도달했다고 합니다. 해마다 인간들은 자연이 생산해내는 것보다 20% 더 많은 자원을 소비하고 있다는 통계가 이를 말해 줍니다. 다시 말하면 자연이 낳은 이자만으로 만족하지 않고 그 원금 까지 빼앗아 쓰고 있는 현실인 것입니다. 때문에 지구는 지금 신음하고 있습니다. 정치란 미래를 예견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현재 이 땅의 정치인들은 정권 잡기에만 혈안이 되어 있지 환경 위기에 대해서는 관심조차 두고 있지 않습니다. 오늘 우리가 어떻게 사느냐에 따라서 우리의 미래는 다라집니다. 하루하루, 순간순간을 어떻게 사느냐에 따라서 우리의 미래는 밝아질 수도 있고 어두어질 수도 있습니다. 지구 환경 의 위기 앞에서 이 말을 다 같이 명심해야 합니다. 오늘 우리들의 삶의 모습에 의해서 지구의 생존 여부가 달여 있다는 겁니다. 현재 지구상 농경지의 절반이 가축의 사료가 될 작물을 기르는 데 쓰이고 있습니다. 심각한 일입니다. 서양인의 육식 위주의 식습관 때문에 이런 일이 벌어졌습니다. 그러나 현재는 서양인만이 아니라 우리도 육식을 너무 많이 하고 있음을 간과해서 안 되겠습 니다. 지구 저 쪽에서는 식량이 없어 하루에도 수만 명이 굶어 죽어 가는데, 곡식의 절반 을 짐승의 사료로 쓰고 있다는 게 말이 됩니까? 전문가들 연구에 의하면 1Kg의 쇠고기를 생산하기 위해서는 10만 리트의 물이 필요 하다고 합니다. 잘못된 식습관 때문에 귀한 수자원 역시 고갈될 형편이라는 겁니다. 그 뿐 아닙니다. 인간들이 동물에 가하는 행동 또한 잔인하고 가혹하기가 이루 말 할 수 없습니다. 닭 공장, 양계장을 한 번 가 보십시오. 병아리는 태어나자마자 감졀사에 의해 검사를 받습니다. 이 대 수컷은 그냥 쓰레기통에 버려지고 암컷은 알을 빼먹기 위해 살려 둔답 니다. 겨우 살아난 병아리들은 서로 쪼지 못하게 부리를 다 잘리고, 옴짝달싹 못할 정도 로 좁은 공간에서 사육됩니다. 게다가 근 3주 동안 불을 켰다 껐다 한답니다. 빛에 민감 한 닭의 습성을 이용, 그렇게 충격을 줘 더 많은 알을 낳도록 하려는 겁니다. 이런 몹쓸 짓을 당한 닭들은 당연히 거의 미쳐 버리게 되고, 결국은 죽음을 맞게 되는 것입니다. 닭고기, 달걀을 먹기 위해서 우리가 이렇게 잔인한 짓을 하고 있습니다. 식탁에 오르 는 쇠고기, 돼지고기, 닭고기를 대할 때 이 동물이 어떤 고통 속에서 살다가 죽어갔는지 되돌아 보아야 합니다. 소나 돼지, 개의 눈을 유심히 보십시오. 선하디 선한 그 눈은 우리들의 눈보다 더 맑고 투명합니다. 지구상의 모든 생물은 서로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상호 작용을 합니다. 최근에 읽은 이야기인데, 현재 지구상에 벌이 40% 감소되었답니다. 일부 전문가들에 의하면 핸드폰의 전자파가 그 이유라는 겁니다. 우리가 늘 사용하고 있는 핸드폰의 전자파 때문에 지구상의 40%, 즉 10마리 중 4마리가 죽는다는 겁니다. 벌이 사라지면 식물이 열매를 맺지 못합니다. 촉매 작용이 되어야 열매를 맺는데 그 역할을 할 벌이 없으니 식물의 수정이 재데로 이뤄지질 못하는 겁니다. 뿐만 아니라 독한 농약 때문에 산중에서도 벌을 볼 수가 없습니다. 제가 사는 산중이 해발 800M인데 예닐곱 그루의 산자두와 돌배나무가 있습니다. 그런데 6~7년 전부터 꽃은 무성하게 피는 데 열매가 열리지 않는 현상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이런 일은 비단 제가 사는 산중에서만 벌어지고 있지는 않을겁니다. 고랭지 에서 채소를 가꾸느라 독한 농약들을 수없이 뿌려대기 때문에 벌이 살 수가 없게 되어 버린 것입니다. 누구의 말을 빌릴 것도 없이 이 세상은 우리의 필요를 위해서는 풍요 롭지만 탐욕을 위해서는 궁핍한 곳입니다. 탐욕을 억제하려면 무엇보다도 소비를 줄여야 합니다. 그리고 소비를 줄이려면 우선 광고에 접근해서는 안 됩니다. 텔레비전이 되었건 신문이 되었건 들여다보면 광고의 마력에 빨겨 들어갑니다. 멀리서 바라보아야 합니다. 눈만 뜨면 광고의 홍수 속에서 우리는 살아갑니다. 광고란 우리가 무엇인가를 갖고 싶어 하는 욕구를 부추기는 것입 니다. 처음에는 흔들리지 않다가도 반복해서 접하게 되면 대개는 넘어가게 됩니다. 견물생심이란 말도 있지 않습니까. 일단 광고에 빠져 들면 사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저 역시도 그런 경험을 몇 번 했습니다. 진정한 행복은 마음의 평화 즉 정신적인 것에 있습니다. 그 어떤 물질더미 앞에서도 우리는 행복해 질 수 없습니다. 마음이 안정되고 평화로워야 거기서 행복의 움이 틔어 나오는 것입니다. 물질로 얻어지는 행복은 한 때일 뿐입니다. 가령 시장에서 남이 안 가진 물건을 사다 집에 놔 보십시오. 며칠은 좋지만 한 두 주일 지나면 거기 있는지 신경도 쓰지 않습니다. 그것이 물건들입니다. 진정한 행복은 물질적인 것이 아니라 정신적인 것임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 나머지는 모두가 부수적이고 장식품 에 지나지 않음을 바로 알아야겠습니다. 행복은 또 조화로운 삶에 있습니다. 넘치지도 모자라지도 않는 가장 알맞은 상태, 다시 말하면 자기 분수에 맞는 상태가 바로 행복이라는 것입니다. 절제의 미덕에 기초를 둔 검소한 습관이 조화로운 삶을 이룹니다. 조금 모자란 듯 가져야 합니다. 넘치면 모자란 것만 못합니다. 우리가 보다 인간 다운 삶을 이루려면 될 수 있는 한 생활용품을 적게 사용하면서 간소하게 지내야 합니다. 없어도 좋은 것은 갖지 않고자 노력하십시오. 남 주기는 아깝고 놔두기는 짐스런 물건들이 얼마나 많은지 자신을 돌아보십시오. 한 때 필요해서 구해 놓았지만 조금 지나면 시들해집니다. 이런 물건들 속에서 우리가 살고 있습니다. 간소한 삶이 본질적인 삶입니다. 우리가 사용하는 모든 물건은 지구상에 한정된 자 원으로 만들어진 것들입니다. 게다가 공장에서 기계와 기름과 전기와 화학약품으로 생산되기 때문에 우리의 과도한 소비는 반드시 자연의 훼손과 환경의 오염을 가져옵 니다. 신발 한 켤레, 옷 한 벌, 가전 제품 한 가지, 가구 한 가지를 만드는데 그 만큼 매연과 산업 쓰레기와 더러운 물이 생기게 되는 겁니다. 우리 삶의 터전인 지구 환경을 살리는 일은 국가 정책만으로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한 사람 한 사람이 소비를 억제하고 절제 의 미덕을 새롭게 다질 때 비로소 희망이 보일 수 있을 겁니다. 끝없는 욕구인 물질주의에서 벗어나 진정한 행복이 어디에 있는가를 각자의 삶에서 되찾을 때 또한 그 희망의 빛은 진하게 빛날 수 있을 겁니다. 거듭 말씀드립니다. 오늘 우리가 어떻게 사느냐에 지구 환경의 소생과 종말이 달려 있음을 깊이깊이 명심하십시다. 부처님 오신 날, 지혜롭고 자비로운 그 가르침에 귀 기울여 우리의 삶이 보다 인간 다운 삶으로 자리 잡기를 늘 다졌으면 합니다. 여러 불자님들 복 받으십시오~!
출처 : 생활불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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