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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마무리(全文)
오늘 오후 채소밭을 정리했다.
고랭지에 서리가 내리기 전에
오이넝쿨과 고춧대와 아욱대 등을 걷어 냈다.
여름날 내 식탁에 먹을 것을 대 주고 가꾸는 재미를 베풀어 준 채소의 끝자락이
서리를 맞아 어둡게 시들어 가는 것을 그대로 두는 것은 가꾸는 사람의
도리가 아니다.
그때그때 바로 그 자리에서
나 자신이 해야 할 도리와 의무와 책임을 다하는 것이
아름다운 마무리다.
아름다운 마무리는 삶에 대해 감사하게 여긴다.
내가 걸어온 길 말고는 나에게 다른 길이 없었음을 깨닫고
그 길이 나를 성장시켜 주었음을 긍정한다. 자신에게 일어난 일들과
모든 과정의 의미를 이해하고 나에게 성장의 기회를 준 삶에 대해,
이 존재계에 대해 감사하는 것이 아름다운 마무리다.
아름다운 마무리는 처음의 마음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일의 과정에서, 길의 도중에서 잃어버린 초심을 회복하는 것이다.
아름다운 마무리는 근원적인 물음, ‘나는 누구인가’ 하고 묻는 것이다.
삶의 순간순간마다 ‘나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 하는 물음에서
그때그때 마무리가 이루어진다.
그 물음은 본래 모습을 잃지 않는 중요한 자각이다.
아름다운 마무리는 내려놓음이다.
내려놓음은 일의 결과나 세상에서의 성공과 실패를 뛰어넘어
자신의 순수 존재에 이르는 내면의 연금술이다.
내려놓지 못할 때 마무리는 일어나지 않는다.
그것은 또 다른 윤회와 반복의 여지를 남긴다.
아름다운 마무리는 진정한 내려놓음에서 완성된다.
아름다운 마무리는 비움이다.
채움만을 위해 달려온 생각을 버리고 비움에 다가가는 것이다.
그러므로 아름다운 마무리는 비움이고
그 비움이 가져다 주는 충만으로 자신을 채운다.
아름다운 마무리는 삶의 본질은 놀이를 회복하는 것.
심각함과 복잡한 생각을 내려놓고
천진과 순수로 돌아가 존재의 기쁨을 누린다.
아름다운 마무리는 지금이 바로 그때임을 안다.
과거나 미래의 어느 때가 아니라
지금 이 순간이 나에게 주어진 유일한 순간임을 안다.
아름다운 마무리는 지나간 모든 순간과 기꺼이 작별하고
아직 오지 않은 순간들에 대해서는 미지 그대로 열어 둔 채
지금 이 순간을 받아들인다.
또한 아름다운 마무리는 용서이고 이해이고 자비이다.
용서와 이해와 자비를 통해 자기 자신을 새롭게 일깨운다.
이유 없이 일어나는 일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아름다운 마무리는 자연과 대지, 태양과 강, 나무와 풀을 돌아보고
내 안의 자연을 되찾는다.
궁극적으로 내가 기댈 곳은
오직 자연뿐임을 아는 마음이다.
아름다운 마무리는 나를 얽어 매고 있는 구속과 생각들로부터 벗어나
자유로워지는 것. 삶의 예속물이 아니라 삶의 주체로서 거듭난다.
진정한 자유인에 이르는 것이야말로 아름다운 마무리다.
아름다운 마무리는 차 한 잔을 앞에 두고
그 향기와 맛과 빛깔을 조용히 음미한다.
그것은 삶에 새로운 향기와 빛을 부여하는 일이다.
아름다운 마무리는 스스로 가난과 간소함을 선택한다.
맑은 가난과 간소함으로 자신을 정신적 궁핍으로부터 바로 세우고
비좁은 감옥으로부터 해방시킨다. 아름다운 마무리는 또한 단순해지는 것.
하나만으로 만족할 줄 안다. 불필요한 것들과 거리를 둠으로써
자기 자신과 더욱 가까워진다. 필요한 것과 불필요한 것을 분명하게 가릴 줄 안다.
문명이 만들어낸 온갖 제품을 사용하면서 ‘어느 것이 진정으로 내 삶에 필요한가,
나는 이것들로 인해 진정으로 행복한가?’ 하고 스스로에게 묻는다.
그리하여 불필요한 것들로부터 자유로워진다,
아름다운 마무리는 살아온 날들에 대해 찬사를 보내는 것.
타인의 상처를 치유하고 잃어버렸던 나를 찾는 것,
그리고 수많은 의존과 타성적인 관계에서 벗어나 홀로 서는 것이다.
그리고 아름다운 마무리는 언제든 떠날 채비를 갖춘다.
그 어디 어느 것에도 얽매이지 않고
순례자나 여행자의 모습으로 산다.
우리 앞에 놓인 이 많은 우주의 선물도 그저 감사히 받아 쓸 뿐,
언제든 빈손으로 두고 떠날 수 있도록 준비한다.
머지않아 늦가을 서릿바람에
저토록 무성한 나뭇잎들도 무너져 내릴 것이다.
그 빈 가지에 때가 오면 또다시 새잎이 돋아날 것이다.
아름다운 마무리는 낡은 생각, 낡은 습관을 미련 없이 떨쳐 버리고
새로운 존재로 거듭나는 것이다. 그러므로 아름다운 마무리는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이다.
삶에 저항하지 말라
올 여름에는 거의 책을 보지 않는다.
눈이 번쩍 뜨이는 그런 책을 가까이 접할 수도 없지만
비슷비슷한 소리에 진력이 났기 때문이다.
그리고 돋보기를 맞추어 쓴 지가 10년도 훨씬 넘기 때문에
눈이 쉬이 피로해져서 책을 멀리하게 된 것이다.
어쩌면 다행한 일인지도 모르겠다.
종이에 활자로 박힌 남의 글보다는
나 자신을 읽고 들여다보는 시간이
보다 소중하게 여겨진다.
책꽂이를 정리하다가 뜻밖에 묵은 일기장이 꽂혀 있는 것이 눈에 띄었다.
대충 훑어보면서 내 삶의 자취가 빛이 바랜 사진첩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1995년 6월 17일(토요일), 남불 생 레미에서 쓴 대목.
여행 중에 가지고 간 크리슈나무르티의 <<명상집>>에서 인용한 글이 실려 있었다.
홀로 명상하라.
모든 것을 놓아 버려라.
이미 있었는지를 기억하지 말라.
굳이 기억하려 하면 그것은 이미 죽은 것이 되리라.
그리고 그것에 매달리면 다시는 홀로 있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저 끝없는 고독, 저 사랑의 아름다움 속에서
그토록 순결하고 그토록 새롭게 명상하라.
저항하지 말라.
그 어떤 것에도 장벽을 쌓아 두지 말라.
온갖 사소한 충동, 강제와 욕구로부터
그리고 그 자질구레한 모든 갈등과 위선으로부터
진정으로 온전히 자유로워지거라.
그러면 팔을 활짝 벌리고
삶의 한복판을 뚜벅뚜벅 당당하게 걸어갈 수 있으리라.
다시 채소를 가꾸며
어떤 학자가 조주 선사에게 물었다.
“저는 모든 것을 버리고 한 물건도 갖지 않았습니다.
이런 때 어떻게 했으면 좋겠습니까?”
조주 선사의 대답.
“방하착(放下着, 내던져 버려라. 놓아 버려라)!”
“이미 한 물건도 갖고 있지 않은데 무엇을 놓아 버리라고 하십니까.”
“그렇다면 지고 가거라!”
그 학자는 자신의 모든 것을 버렸다는
그 생각에서 아직 벗어나지 못한 것이다.
그런 생각이 남아 있는 한
겉으로는 버린 것 같지만
실제로는 버린 것이 아니다.
바람이 나뭇가지를 스치고 지나갈 때처럼
안팎으로 거리낌이 없어야
비로소 자유로울 수 있다.
노년의 아름다움
요즘 <<계로록(戒老錄)>>, 노년에 경계해야 할 일들을 읽고 있는데
나 자신의 일상을 되돌아보게 하는 글이다. 돌이켜보니 나 스스로도 의식하지
못한 채 같은 말을 되풀이해 왔다. 같은 말을 되풀이한다는 것은 지나간 시간의
늪에 갇혀 헤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소식이다... 새로운 것에 대한 관심과 탐구의
노력이 결여되었다는 그 반증이기도 하다. 우리는 자신의 꿈과 이상을 저버릴 때
늙는다. 세월은 우리 얼굴에 주름살을 남기지만 우리가 일에 대한 흥미를 잃을 때는
영혼이 주름지게 된다. 그 누구를 물을 것 없이 탐구하는 노력을 쉬게 되면 인생이
녹슨다.
무엇보다도 먼저 간소하고 단순하게 살아야 한다.
꼭 그렇게 필요하지도 않은 물건 더미에 짓눌려 헤어나지 못하고 있는 우리들
살림살이를 시시로 점검하고 되돌아볼 수 있어야 한다. 한 해가 다 지나도록
손대지 않고 쓰지 않는 물건이 쌓여 있다면 그것은 내게 소용없는 것들이니
아낌없이 새 주인에게 돌려주어야 한다. 부자란 집이나 물건을 남보다 많이
차지하고 사는 사람이 아니다. 불필요한 것들을 갖지 않고 마음이 물건에
얽매이지 않아 홀가분하게 사는 사람이야말로 진정한 부자라고 할 수 있다.
병상에서 배우다
어느 날은 문득 이런 생각이 들기도 했다.
병원 대기실에서 기다리는 것도 환자에게는 치유가 되겠다는 생각.
우리들의 성급하고 조급한 마음을 어디 가서 고치겠는가.
자신의 병을 치료하기 위해 기다리는 이런 병원에서의 시간이야말로
성급하고 조급한 생각도
함께 치료할 수 있는 계기로 삼아야 할 것이라는 생각이었다.
이런 생각이 들자 그 뒤부터는
기다리는 일이 결코 지루하거나 무료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그런 시간에 화두삼매(話頭三昧, 나의 마음과 화두가 하나가 된 상태)에
들 수 있고 염불로써 평온한 마음을 지닐 수도 있다.
어느 암자의 작은 연못
아름다움에는 어디에도 거리낌이 없어야 한다. 이런 시가 있다.
대 그림자 뜰을 쓸어도 먼지 일지 않고
달이 연못 속에 들어가도 물에는 흔적 없네
바람에 일렁이는 대와 뜰과 달과 연못이 한데 어울리면서도
서로 거리낌이 없는 이런 경지가 아름다움이 지닌 오묘한 조화이다.
뛰어난 장인(匠人)은 그 자취를 남기지 않는다. 그 무엇에도 거리낌이 없다.
진정한 아름다움은 샘물과 같아서 퍼내어도 퍼내어도 다함이 없이
안에서 솟아난다. 그러나 가꾸지 않으면 솟지 않는다. 어떤 대상에서
아름다움을 만나는 것은 어렵지 않다. 열린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안으로 느낄 수 있으면 된다.
자신에게 알맞은 땅을
며칠 전 불일암에 다녀왔다...
30여년 전 이 암자를 지을 때 손수 심어 놓은 나무들의
정정한 모습을 볼 때마다 뿌듯한 생각이 차오른다. 후박나무, 태산목, 은행나무,
굴거리와 벽오동 등이 마음껏 허공으로 뻗어 가는 그 기상이 믿음직스럽다.
사람은 늙어가는데 나무들은 정정하게 자란다. 사람이 가고 난 뒤에도
이 나무들은 대지 위에 꿋꿋하게 서 있을 것이다.
내 마음을 전하기 위해 한 아름이 된 후박나무를 안아 주었다.
안거가 시작되는 결제날,
홀로 지내는 암주에게 이런 사연을 보냈다.
<장로게>에서 한 수행자는 이와 같이 읊었습니다.
홀로 있는 수행자는 범천(梵天)과 같고,
둘이서 함께라면 두 사람의 신(神)과 같으며,
셋이면 마을 집과 같고,
그 이상이면 장바닥이다.
올 여름 범천이 기뻐할 안거 이루기를.
날마다 새롭게 시작하기를.
부디 청청(靑靑)하시오.
삶의 기술
한 제자가 스승에게 물었다.
“죽고 나면 어떤 일이 벌어집니까?”
스승의 대답.
“시간 낭비하지 말라.
네가 숨이 멎어 무덤 속에 들어가거든
그때 가서 실컷 죽음에 대해 생각해 보거라.
왜 지금 삶을 제쳐두고 죽음에 신경을 쓰는가.
일어날 것은 어차피 일어나게 마련이다.”
... 우리에게 가장 소중한 것은
지금 이곳에서 깨어 있는 삶이다.
삶의 기술이란 개개인이 자신의 삶에 대해 깨어 있는 관심이다.
모든 것은 끊임 없이 흐르고 변한다.
사물을 보는 눈도 때에 따라 바뀐다.
정지해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같은 강물에 발을 두 번 담글 수 없다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그렇기 때문에 집착할 게 아무 것도 없다. 삶은 유희와 같다.
행복할 때는 행복에 매달리지 말라.
불행할 때는 이를 피하려고 하지 말고 그냥 받아들이라.
그러면서 자신의 삶을 순간순간 지켜보라.
맑은 정신으로 지켜보라.
약한 것이 강한 것에 먹히는 세상에서
농부 철학자 피에르 라비가 부족들로부터 직접 전해 들은
이른바 미개사회의 가치의식에 대한 몇 가지 일화는
오늘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화학제품을 만드는 회사가 아프리카 어느 부족의 농부들에게 비료를 갖다 주었다.
농부들이 처음 본 그 비료를 밭에 뿌렸더니 전에 없던 풍작이었다. 농부들은
그 부족의 지혜로운 눈먼 추장을 찾아가 말했다.
“우리는 작년보다 두 배나 많은 곡식을 거두었습니다.”
추장은 잠시 생각에 잠겨 있다가 농부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나의 아이들아. 매우 좋은 일이다. 내년에는 밭의 절반만을 갈아라.”
그들은 사는 데 무엇이 필요한지를 잘 알고 있었다.
그들은 필요 이상의 것을 원치 않았다.
다음 이야기는 콜롬비아에서 일어난 일이다.
원주민인 인디언들이 보잘것없는 도구로 나무를 자르고 있었다.
유럽에서 이주해 온 백인들이 이 광경을 목격하고
나무를 단번에 쓰러뜨릴 수 있는 큰 도끼를 하나 주었다.
다음해에 원주민들이 그 도끼를 어떻게 쓰고 있는지 보기 위해
다시 그 마을을 찾았다.
그들이 도착하자 마을 사람들은 얼굴 가득 미소를 머금고 그들을 에워쌌다.
그때 추장이 다가와 말했다.
“우리는 당신들에게 고마움을 어떻게 다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다.
당신들이 이 도끼를 보내 준 다음부터 우리는 더 많은 휴식을 누릴 수 있었다.”
모자랄까 봐 미리 준비해 쌓아두는 그 마음이 곧 결핍 아니겠는가.
그들은 그날그날의 삶을 즐길 줄 알았다.
세상을 살아가는 데 무엇이 필요한지를 잘 알고 있었다.
필요 이상의 것을 그들은 원치 않았다.
때깔 고운 도자기를 보면
풋중 시절부터 나는 안거가 끝나고 해제가 시작되는 바로 그날
누가 어디서 기다리는 것도 아닌데 일찍 길 떠나기를 좋아했다.
미적미적 미루다가 김이 빠져나간 후에 길을 떠나면
나그넷길의 그 신선감이 소멸되고 만다...
선원에 다니던 시절에는 후원에서 미리 아침공양을 대충 때우고
첫차를 타기 위해 걸망을 메고 동구길을 휘적휘적 나서면
새벽달이 숲길을 훤히 비춰 주었다.
이 또한 해제의 일미(一味)다.
만일 첫차가 아니고 두 번째 차편이나 밝은 대낮에 길을 떠나면
해제의 그 맛이 시들해진다.
우물쭈물하다가는
서양에서 수도원다운 수도원을 최초로 세운 성 베네딕도의 <수도 규칙>을
지난 겨울 이 거처에서 다시 펼쳐 보면서 많은 위로와 각성의 기회를 가졌다...
성 베네딕도는 뒷날 몬떼 까시노에 수도원을 세워
보다 나은 공동생활을 위한 규칙을 만들었다.
그 중에 몇 가지를 추려 생활의 지침으로 삼았으면 한다.
세상의 흐름에 휩쓸리지 말라.
분노를 행동으로 옮기지 말라.
자신의 행동을 항상 살피라.
하느님이 어디서나 우리를 지켜보고 계신다는 것을 확실히 믿어라.
말을 많이 하지 말라.
공허한 말, 남을 웃기려는 말을 하지 말라.
다툼이 있었으면 해가 지기 전에 바로 화해하라.
홀로 걸으라. 행복한 이여
그 전에 읽다가 접어 둔 비노바 바베의 <바가바드기타> 강론 <천상의 노래>를
다시 펼쳐 들었다. 마하트마 간디의 충직하고 헌신적인 제자인 그가 감옥에
수감되었을 때, 같은 동료들의 요청으로 <바가바드기타>를 강론하게 되었다.
그는 영국의 식민통치 하래서 모두 합쳐 5년 동안을 각기 다른 감옥에서 지내면서
많은 공부를 했다... 그의 유명한 ‘부단운동(토지헌납운동)’은 이렇게 시작된다.
출처 : 생활불교
글쓴이 : 天海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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