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정스님 글모음

[스크랩] 그대가 곁에 있어도

병노 2010. 3. 20. 16:12







그대가 곁에 있어도    
        그대가 곁에 있어도 아침나절에는 대숲머리로 안개가 자욱이 피어오르더니 오후에는 부슬부슬 비가 내린다. 오랜만에 숲에 내리는 빗소리를 듣고 있으니 내 속뜰도 촉촉이 젖어드는 것 같다. 어느 가지에선지 청개구리들이 끌끌 끌끌 요란스럽게 울어댄다. 아궁이에 군불을 지펴놓고 들어와 커피를 한잔 마셨다. 가을비 내리는 소리를 들으면서 마시는 커피 맛또한 별미이다. 서울 불임서점에서 오늘 인편으로 부쳐온 시집을 펼쳐들고 두런두런 소리내여 읽었다. 물 속에는 물만 있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는 그 하늘만 있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내 안에는 나만이 있는 것이 아니다 내 안에 있는 이여 내 안에서 나를 흔드는 이여 물처럼 하늘처럼 내 깊은 곳 흘러서 은밀한 내 꿈과 만나는 이여 그대가 곁에 있어도 나는 그대가 그립다. 최근에 출간된 류시화의 시집 <그대가 곁에 있어도 나는 그대가 그립다>에 실린 시다. 시는 따로 해설이 필요하지 않다. 누구나 자신의 목소리로 두런두런 읽으면서 느끼면 된다. 시는 눈으로 읽어서는 그 감흥을 제대로 느낄 수 없다. 소리내어 읽어야만 운율과 함께 시가 지닌 그 속뜰을 들여다 볼 수 있다. 그렇다. 물 속에는 물만 있는 것이 아니다. 괴어 있는 물이건 흐르는 물이건 그 물 속에는 많은 것들이 함께 있다. 텅 빈 하늘에도 새가 날고, 해와 달이 돋아오르고, 별이 솟는다. 바람이 불고 구름이 흐르고 비와 이슬을 머금고 있다. 이와 마찬가지로 내 안에도 나만 있는 것은 아니다. 눈에 보이지 않고 손에 잡히지 않을지라도 무수한 인연의 끄나풀들이 얼기설기 얽혀 있다. 어떤 끄나풀은 내 삶을 넉넉하고 순수하게 채워주는가 하면, 또 어떤 끄나풀은 내 삶을 어둡게 하고 지겹게 하고, 때로는 화나게 만든다. 내 안에서 나를 주재하는 이는 누구일까, 또 나를 다스리고 나를 뒤흔드는 이는 과연 누구일까. 그 '나'는 누구인가? 사람에 따라서 그것은 신일 수도 있고, 불성이나 보리심일 수도 있다. 선 수행자라면 그것은 또한 그가 끊임없이 추구해야 할 화두일 것이다. 그리고 맹목적인 열기에 도취되어 있는 사람이라면 자나깨나 마음 속에서 떠나지 않는 사랑하는 연인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기에 그것들은 물처럼 하늘처럼 내 깊은 곳을 흘러 은밀한 내 꿈과 하나가 된다. '그대가 곁에 있어도 나는 그대가 그립다'니, 이렇듯 그리운 존재를 지니고 절절하게 사는 사람은 삶의 의미를 캐내면서 스스로 꽃다운 삶을 누리게 될 것이다. 그대가 곁에 있으면서도 그립기만 하는 그대를 당신은 지녔는가? 그런 '그대'를 지닌 사람은 축복받은 삶이다. 그리고 그런 '그대'를 지니지 못한 가슴들은, 이런 시를 거듭 읽으면서 일상 속에서 삶의 신비를 스스로 찾아내야 한다. 사람들이 방안에 모여 별에 대한 토론을 하고 있을 때 나는 문 밖으로 나와서 풀줄기를 흔들며 지나가는 벌레 한 마리를 구경했다. 까만 벌레의 눈에 별들이 비치고 있었다 그것을 사람들에게 보여주기 위해 나는 벌레를 방안으로 데리고 갔다 그러나 어느새 별들은 사라지고 벌레의 눈에 방안의 전등불만 비치고 있었다 나는 다시 벌레를 풀섶으로 데려다주었다 별들이 일제히 벌레의 몸 안에서 반짝이기 시작했다. 같은 시집에 실란<벌레의 별>이란 시다. 참 좋은 시다. 이건 단순히 시가 아니라 많은 것을 상징하고있는 삶의 양식이다. 말은 누과 생각이 깊은 사람이면 누구나 일상에서 흔히 경험할 수 있는 삶의 신비다. 진리와 실상이 어느 곳에 존재하는 지, 시인의 일상적인 체험을 통해 그 비밀을 열어보이고 있다. 우리는 여기저기서 많은 사람들의 가르침을 듣는다. 종교가 무엇이고 깨달음이 어떤 것이며 선의 세계가 어떻다고 외치는 소리가 정기적인 집회마다 시끄럽게 넘친다. 그러나 곰곰이 귀를 기울여보면 얼마나 메마르고 공허하고 관념적인 소리인지 그 속이 빤히 들여다보인다. 스스로 깨달았노라고 자기 선전을 하는 사람치고 그에게서 깨달음의 행을 본 적이 있는가? 꽃이 꿀을 품고 있으면 소리쳐 부르지 않더라도 벌들은 저절로 찾아간다. 자기 자신을 속이고 남을 속이고 세상을 속이고 부처님과 조사를 속이는 이런 행위를 불교승단의 계율에서는 대망어(大妄語() 즉 새까만 거짓말이라고 해서 승단 추방의 허물로 여긴다. 진정한 삶의 이해에 도달하지도 못한 사람이 어떻게 깨달음의 세계에 도달할 수 있단 말인가. 방안에 모여 앉아 별에 대한 이야기를 맨날 해보았자 별을 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몸소 밖에 나와 자기 자신의 눈으로 직접 밤하늘에 보석처럼 빛나는 별과 마주할 때, 우주의 신비를 함께 터득할 수 있다. 좋은 시를 읽고 있으면 피가 맑아지고 삶에 율동이 생기는 것 같다. 시는 일용의 양식 중에서도 가장 조촐하고 향기로운 양식일 것이다. '그대가 곁에 있어도 나는 그대가 그립다.' 이 가을에 우리도 그대에 대한 그리움을 지녀볼 일이 아닌가. 나무본래자성불 본사(本師)합장
출처 : 생활불교
글쓴이 : 본사(本師)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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