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심

[스크랩] 이해인 수녀님의 법정스님 추모글 전문

병노 2010. 3. 14. 10:24
이해인 수녀님의 법정스님 추모글 전문 

법정 스님 

언제 한번 스님을 꼭 뵈어야겠다고 벼르는 사이 저도 많이 아프게 되었고 스님도 많이 편찮으시다더니 기어이 이렇게 먼저 먼 길을 떠나셨네요. 

2월 중순, 스님의 조카스님으로부터 스님께서 많이 야위셨다는 말씀을 듣고 제 슬픔은 한층 더 깊고 무거워졌더랬습니다. 평소에 스님을 직접 뵙진 못해도 스님의 청정한 글들을 통해 우리는 얼마나 큰 기쁨을 누렸는지요! 

우리나라 온 국민이 다 스님의 글로 위로 받고 평화를 누리며 행복해했습니다. 웬만한 집에는 다 스님의 책이 꽂혀 있고 개인적 친분이 있는 분들은 스님의 글씨를 표구하여 걸어놓곤 했습니다. 

이제 다시는 스님의 그 모습을 뵐 수 없음을, 새로운 글을 만날 수 없음을 슬퍼합니다. 

'야단맞고 싶으면 언제라도 나에게 오라'고 하시던 스님. 스님의 표현대로 '현품대조'한 지 꽤나 오래되었다고 하시던 스님. 때로는 다정한 삼촌처럼, 때로는 엄격한 오라버님처럼 늘 제 곁에 가까이 계셨던 스님. 감정을 절제해야 하는 수행자라지만 이별의 인간적인 슬픔은 감당이 잘 안 되네요. 어떤 말로도 마음의 빛깔을 표현하기 힘드네요. 

사실 그동안 여러 가지로 조심스러워 편지도 안 하고 뵐 수 있는 기회도 일부러 피하면서 살았던 저입니다. 아주 오래전 고 정채봉 님과의 TV 대담에서 스님은 '어느 산길에서 만난 한 수녀님'이 잠시 마음을 흔들던 젊은 시절이 있었다는 고백을 하신 일이 있었지요. 전 그 시절 스님을 알지도 못했는데 그 사람이 바로 수녀님 아니냐며 항의 아닌 항의를 하는 불자들도 있었고 암튼 저로서는 억울한 오해를 더러 받았답니다. 

1977년 여름 스님께서 제게 보내주신 구름모음 그림책도 다시 들여다봅니다. 오래전 스님과 함께 광안리 바닷가에서 조가비를 줍던 기억도, 단감 20개를 사 들고 저의 언니 수녀님이 계신 가르멜수녀원을 방문했던 기억도 새롭습니다.

어린왕자의 촌수로 따지면 우리는 친구입니다. '민들레의 영토'를 읽으신 스님의 편지를 받은 그 이후 우리는 나이 차를 뛰어넘어 그저 물처럼 구름처럼 바람처럼 담백하고도 아름답고 정겨운 도반이었습니다. 주로 자연과 음악과 좋은 책에 대한 의견을 많이 나누는 벗이었습니다.

'…구름 수녀님 올해는 스님들이 많이 떠나는데 언젠가 내 차례도 올 것입니다. 죽음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생명현상이기 때문에 겸허히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날그날 헛되이 살지 않으면 좋은 삶이 될 것입니다…한밤중에 일어나(기침이 아니면 누가 이런 시각에 나를 깨워주겠어요) 벽에 기대어 얼음 풀린 개울물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으면 이 자리가 곧 정토요 별천지임을 그때마다 고맙게 누립니다' 

2003년에 제게 주신 글을 다시 읽어봅니다. 어쩌다 산으로 새 우표를 보내 드리면 마음이 푸른 하늘처럼 부풀어 오른다며 즐거워하셨지요. 바다가 그립다고 하셨지요. 수녀의 조촐한 정성을 늘 받기만 하는 것 같아 미안하다고도 하셨습니다. 누군가 중간 역할을 잘못한 일로 제게 편지로 크게 역정을 내시어 저도 항의편지를 보냈더니 미안하다 하시며 그런 일을 통해 우리의 우정이 더 튼튼해지길 바란다고, 가까이 있으면 가볍게 안아주며 상처 받은 맘을 토닥이고 싶다고, 언제 같이 달맞이꽃 피는 모습을 보게 불일암에서 꼭 만나자고 하셨습니다. 

이젠 어디로 갈까요, 스님. 스님을 못 잊고 그리워하는 이들의 가슴속에 자비의 하얀 연꽃으로 피어나십시오. 부처님의 미소를 닮은 둥근달로 떠오르십시오.









 

법정 스님께, 

조마조마하면서도 설마하던 중에 스님께서 입적하셨다는 전화를 받고 한동안 그야말로 멍했습니다. 늘 청정하게 사시면서 뉘게나 "맑고 향기롭게" 살기를 가르치신 스님께서, 그래서 도시의 번잡을 늘 부담스러워 하시던 스님께서, 그래서 손수 세우시고 가꾸시던 불일암 조차 훌쩍 떠나 깊은 산골 화전민이 머물다간 오두막에서 맑은 공기와 물, 그리고 새소리를 벗하시던 스님께서 폐암으로 세상을 등지셨다니 너무나도 믿기지 않아서였습니다. 그러면서 차츰 깨달음이 제게 다가왔습니다. 

스님께서는 중생, 특히 1970년대에 민주화를 갈망하던 중생들의 가슴앓이를 아직껏 홀몸으로 견뎌내신 것입니다. < 불교신문 > 의 주필로, 함석헌 선생의 < 씨알의 소리 > 편집동인으로, 강원용 목사의 크리스챤 아카데미 운영위원으로 한국사회와 종교계의 이지러진 모습을 준엄하게 꾸지람하시던 중, 1974년 1월 11일, 아카데미 간사로 있는 제게 보내주신 엽서 한 장이 그 아픔을 말해줍니다. "세월이 나를 못 가게 합니다. 요즘 거의 연금상태입니다. 4~5인의 사복(私服)이 수문장 노릇을 하고 있습니다. 제기랄ㅡ내가 무슨 솔제니친이라고." 스님께서는 시대의 질병을 몸소 겪으시며 아파하셨는데, 그 가슴앓이가 끝내 스님을 우리 곁에서 멀리 있게 만든 것이지요. 

그 후 세인들은 어느덧 또다시 일상 속에 파묻혀 뒹굴 때, 스님께서는 더욱 무소유와 무소의 뿔처럼 혼자 나아가는 정진의 세월을 보내시면서 그 가슴앓이를 계속하셨던 것입니다. 교통사고로 몸져 누워있었을 때, 병상을 찾아주시고 < 보왕삼매론 > 을 보내주셔서 "몸에 병 없기를 바라지 말라. 몸에 병이 없으면 탐욕이 생기기 쉽나니 그래서 성인이 말씀하시되 '병고로써 양약을 삼으라' 하셨나이다."라고 용기를 불어넣어주시던 스님께서 가슴앓이쯤 이겨내지 못했을 리 만무인즉, 아무래도 그 질병은 중생들이 더 맑고 향기롭게 살게 하시려고 스스로 짊어지신 형벌임에 틀림없습니다. 온갖 탐욕과 비리, 불의와 부정, 억압과 착취로 인해 괴로워하는 중생들을 위해 고통 속에 계셨던 것입니다. 외면당한 사람을 긍휼히 여기시는 스님의 마음은, 스님께서 봉은사에 계실 때 성탄절날 사람들이 예수는 떠받들면서 산고를 겪은 성모는 소홀히 하는 것이 안타깝다 하시면서 서안 한 귀퉁이 모셔놓은 백색의 성모상에 촛불을 밝혀주시던 그 마음은 이제 길상사의 성모 같은 관음상으로 되살아나 서러운 사람들을 달래줍니다. 

스님께서는 죄인임을 자책하는 기독교인들을 보시면서 그대들이 진정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믿는다면, 그와 함께 부활한 존재로 살아가라고 하셨습니다. 참으로 그래야겠지요. 

그러나 스님! 

스님의 고희를 기리고자 70년대를 살아오면서 남은 졸작 시문들과 스님께서 보내주신 서신들을 한데 묶은 책자 < 눈이 맑은 아이 > 를 기꺼워 하시면서도 띠동갑인 제게 잔나비들은 재주가 많으니 삼가야 한다고 다정하게 일러주시던 육성을 더 이상 들을 수 없는 이 허허로움은 어찌 해야 합니까? 어제 홑이불을 덮으신 채 단정히 누우신 마지막 모습에 삼배하며 흐느끼는 중생들의 오열은 어찌해야 거듭나겠는지요. 

스님이 그토록 사랑하시던 꽃피고 움트는 봄이 오고 있습니다. 그러니 이 서러움들이 스님과 저를 처음 묶어주던 생텍쥐페리의 '어린 왕자'를 길들인 장미꽃으로 피어날 것을 믿어야 하겠지요. 

스님께서 편지마다 즐겨 써주셨던 인사를 이제 스님께 되돌립니다. 

"부디 청안(淸安)하십시오." 

불초 김문환 서울대 명예교수 미학자 


출처 : 박어사
글쓴이 : 노병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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