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

[스크랩] 화구 골목

병노 2010. 1. 29. 08:17


                 화구 골목

                                             黃 章 鎭


 <花邱>는 경상북도 울진군 평해읍 월송3리의 자연부락이름이다.

진달래와 철쭉꽃이 아름다운 언덕이 있는 마을이라서 <화구>라 불렀다.

관동팔경의 하나로 아름드리 송림이 울울창창한 월송정이 있는 마을, 나의 제2고향이다.

논에는 나락(벼), 밭에는 보리·서숙(조)·콩·옥시기(옥수수)를 주로 심던 전형적인농촌마을이었다.

 

 동해안 남북을 유일하게 잇는 국도 7호선을 타고 평해읍에서 5리쯤 북향해서 왼쪽으로 한 마장 들어가면 60호농가가 옹기종기 모여 살던 곳이었다.

대문이라고는 눈을 씻고 찾아 봐도 찾을 수 없는 동네였다.

솔가지 울타리나 돌담, 토담이 골목길이나 옆집과 경계를 이루고 있을 따름이다.

 

 우리 집은 방 넷, 대청마루, 부엌, 마구간, 뒷간이 딸린 집으로 4대 8명의 식구가 오순도순 살았다. 암소와 송아지도 한 지붕 밑에서 살았으니 작지는 않은 초가 집이였다.

 

이집 뒤로 초군들이 풀 한 짐 그득히 지고가도 풀 한 잎 안 보일 정도의 돌흙 담 뒤로 긴 골목길이 남북으로 나 있었다. 동네에선 제일 번화한 골목이었다. 수레하나 다닐 수 없는 좁은 길, 허나 나의 눈엔 꽤 넓은 길로 보였다.

어머니는 안방에서 담을 타고 넘어오는 목소리만 들어도 누군지 척척 알아냈다.

 “너품댁이 갱피정 논에  피 뽑으러 가나 보지.”

 “하마(벌써) 금강댁 새댁이 물 길러 오는 가 봐.”

 

 이 길은 이모 댁 다니는 심부름 길, 인수 네 집이나 호동 댁 사랑으로 놀러 다니는 길이였다.

초등학교 다닐 때는 잔등이 필통 달그락대던 등하교길이기도 했다.

술래잡기를 하려면 한참을 뛰어야했다. 비교적 길이 곧기 때문이다.

 봄·여름·가을, 초목들과 학동들이 소를 몰고 다니던 공동방목 길이였다.

이 길에는 소들이 쭉쭉 싸고 간 배설물들이 무덕무덕 늘어서 있을 때가 많았다. 그러나 이것들은 굳기도 전에 누구의 퇴비장으로 갔는지 곧바로 없어지곤 했다.

보송보송하고 하얀 흙길이 되어 맘 놓고 뛰어 다녀도 돌에 부딪쳐 넘어지거나 고무신이나 짚신에 달라붙는 게 없는 좋은 길이였다.

 

 장마철 폭우가 쏟아지면 물살 빠른 물길이 되고, 담장이 무너지거나 감나무나 대추나무 잎이 떨어질 때는 어수선한 길이 되기도 했다.

담장 밖 골목위로 붉은 감들이 주렁주렁 매달려 ‘날 잡아봐라’ 놀려대도 손 한 번 뻗지 못하고 입맛만 다시던 양심길이였다.

 

 길 들머리에서 엿장수의 가위질 소리가 ‘쨍그랑 쨍그랑’ 하기 시작할 때는 맨발에 봉당으로 헛간으로 헌 고무신, 빈 유리병, 쇠붙이 찾기에 눈에 불을 켰던 달콤한 길이었다.

 

 뒤 배미 논에서 쓰레질 하시는 아버지께 농주 한 주전자와 짠지 한 통 들고 종종걸음 치던 바쁜 길이였다.

까까머리들과 어울려 엽전재기차기를 하거나 짚으로 만든 공이나 고무공으로 축구하던 놀이터였다. 자치기하다가 월담하거나 장독을 깨고서 꾸중 듣던 훈육길이였다.

 

아버지와 둘이서 20리길 산에 가서 땔 나무 가득 싣고 오거나, 볏단을 집채만큼 실은 달구지 뒤를 낑낑거리며 밀고 오던 고마운 길이였다.

큰길에서 우리 집까지 들어오는 골목길은 우물의 허드렛물이 나가는 도랑에 달구지 바퀴 하나를 넣고 오면 들어 올 수 있는 한길이었다.

 

 순이, 옥이가 이 길에서 깨금발하며 담 너머로 공기돌이나 생감  던지기를 자라목이 빠지도록 기다리던 애틋한 길이였다.

나 또래 예쁜 여시가(여자아이)가 지나칠 때는 못 본척하다가도 골목을 꺾어 돌아 새까만 치마가 안 보일 때는 왜 그리 짧은 몽당 길이었던지······.

 

 나를 키우던 골목, 나의 놀이 터 화구 골목을 매정하게도 수 십 년 동안 찾지 못하고 살아왔다.

이제 옛 이웃 찾아뵙고 아버지께서 즐겨들던 막걸리 몇 사발 주고받다가 이 골목 저 골목 어슬렁거려나 볼까.

  “아저씨, 순이 옥이 잘  있죠?”


 ^*^  * ( )앞의 낱말은 울진지방의 사투리

출처 : 강원수필문학회
글쓴이 : 平岡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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