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에는 꽃이피네
산에는 꽃이피네
산에는 꽃이피네
지은이: 법정 스님(류시화 엮음)
스님의 말씀을 책으로 엮으며
내가 처음 법정 스님을 보비기 위해 송광사 뒷산 불일암을 찾았을 때의 일이
다. 고요한 한낮, 우거진 나무들 사이를 지나 그곳에 도착하니 스님은 출타중이
고 안 계셨다. 나는 서너 시간을 주인 없는 불일암뜰에 앉아 있어야 했다. 그
리고 차츰 어떤 평온함 같은 것이 내 안에 찾아드들었던 기억이 난다.
아무도 없는 빈터에서 누군가를 기다린다는 것은 무료한 일이다. 나는 그냥
떠날까도 생각했었다. 그러나 무료함 대신 이상하게도 평화로움과 고요함이 느
껴지기 시작했다. 그것은 다름아닌 그 장소가 가진 어떤 분위기 때문이었다.
사실 어떤 집이나 방은 그 주인으 내면 세계를 그대로 드러내 보여준다. 집
과 방은 그 사람이 어떤 생각을 하고 있고, 어떤 방식의 삶을 사는가의 적나라
한 드러남이다.
잎사귀가 넓은 후박나무, 집 안팎을 둘러봐도 명성에 걸맞지 않는 빈한한 살
림살이, 그러나 그곳에 고여 있는 침묵과 그 침묵이 가져다 주던 충만감을 나는
잊지 못한다.
흙벽 앞에 놓인 나무의자며, 포개진 몇 안 되는 그룻이며, 발등에 올라앉는 풀
여치들이며, 낫과 괭이 같은 것이 단순히 하나의 사물로 내던져져 있는 것이 아
니라 자신을 내세움 없이도 온전히 어떤 침묵의 얘기를 전하고 있었다. 나는
무의식중에 그 침묵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게 된 것이다.
잠시 후 나는 물을 마시기 위애 근처의 옹달샘으로 갔다. 이제 생각하니 그
때 나는 마치 어느 비밀의 정원에 들어선 어린아이와 같았던 듯하다. 그런데
샘으로 가서 물을 떠마시려는 순간 나는 수면에 비친 내 얼굴을 가만히 응시하
게 되었다. 한 순간, 기ㅌ은 고요함이 내안으로 찾아들었다.
아마도 주위가 소란스러웠거나 그 집이 내적인 향기로움을 지니지 못했다면
단순히 물을 떠마시고 끝났을 것이다. 수면은 흐트러지고 내 자신을 들여다볼
기회조차 갖지 못했으리라. 작은 오두막 안팎에 고여서 출렁이는 단순하면서도
명상적인 분위기가 무심결에 나를 내존재로 이끌었다고 할 수 있다.
모든 물건과 장소의 배치가, 돌멩이 하나까지도 절제된 아름다움을 여실히 드
러내고 있었다. 그렇게 나는 그곳에서 홀로 두세 시간 동안 텅 빈 충만감을 누
리다가 산을 내려왔다. 스님을 뵙지 못했으나 나는 이미 그분의 존재를 충분히
느낀 것이다.
훗날 스님을 뵈었을 때 나는 주인 없는 불일암 뜰에서 느꼈던 것과 똑같은 분
위기를 스님에게서 느낄 수 있어서 기분이 좋았다. 그것은 일종의 안도감이었
고, 사람에 대한 희망이 한 순간에 되살아남이었다. 거죽의 얼굴과 속의 얼굴이
같음은 인간의 진정성을 가늠하는 척도이기 때문에 그렇다.
단순하면서도 가난하되, 절제된 아름다움을 지닌 삶. 그것이 내가 스님의 처
소에서 받은 첫 느낌이다. 그리고 그서은 많은 물건 더미와 장식물을 자랑하는
‘풍요로운 감옥’들에 대한 서늘한 깨우침이 아닐수 없다.
그분은 가난한 삶을 역설한다. 가난한 삶이라니! 모두가 경제 회복과 물질의
풍요를 되찾자고 외치는 이 시대에! 그러나 나는 아무리 해도 그 말씀에 공감하
지 않을 수 없다.
세상의 소음과 어지러운 말들에 지칠 때면 나는 십 년 전 처음 찾아갔던 그
불일암의 뜰과, 그곳에서 느낀 단순함과 침묵의 풍요가 더없이 그립다. 다시 그
곳에 가서 홀로 가만히 앉아 있고 싶어진다. 그래서 내안을 들여다보고, 그 안
에서 고구마를 캐듯이 침묵을 캐내고 싶어진다.
여기에 모은 이 글들은 지난 여러 해 동안 스님이 법문하시고 말슴하신 내용
중에서 가려뽑은 것이다. 명동 성당 축성 백주년 기념으로 강연하신 것도 있고,
‘맑고 향기롭게’ 회원들과 길상회 모임을 대상으로 법문하신 것도 포함되었
다. 가장 최근의 것으로는 도올 서원에서 말씀하신 내용이 여기에 수록되엇다.
도한 서너 사람이 모인 사석에서 하신 말씀도 엮은이의 기억을 살려 여기에 실
었다.
말씀과 말씀 사이에 하나의 문양을 넣고 한 줄씩 여백을 띄운 것은 그 말씀들
배경에 놓인 침묵의 세계를 깨뜨리지 않기 위해서이다. 말씀 도중에 하나의 맑
은 풍경소리를 듣는 것처럼, 이른 아침의 순수한 새소리를 듣는 것처럼 그 여백
이 읽는 이의 마음 속에 자리하기를 바라는 의도에서다. 저 불일의 뜨락에서
내 발등에 올라앉던 풀여치의 감촉, 그 침묵의 느낌을 전하고 싶어서다.
일은 이렇게 진행되었다. 녹음되어 있는 내용을 한 자도 빠짐없이 몇몇 사람
이 배껴 적고, 구어체와 경어체의 문장을 엮은이가 문어체로 바꾸었. 그러나 그
과정에서 단어나 표현법을 문학적으로 바꿔 구지는 않았다. 그 대부분이 스님
의 육성 그대로임을 여기에 밝혀 둔다.
책의 표지는 판화가 이철수 형이 새로이 글자와 꽃 한 송이를 판화로 새겨 주
었다. 그것을 갖고, 스님이 늘 말씀하시는 단순과 간소함의 철학에 다라 책의
장정은 최대한 단순하게 하되 미적인 배치 또한 잊지 않았다.
언제나 변함없이 독자들에게 꾸준히 읽히고 있는 <무소유>와 <서있는 사람
들>을 비롯해 스님이 쓰신 여러 권의 수상록들은 자연 속에서 충만된 삶과 거
기서 체험되는 마음의 풍경을 탁월하게 그려 보이고 있는 점에서 높이 평가받아
왔다.
한편으로 여기에 묶은 말씀들은 삶의 진정한 가치를 발견하는 일과 매순간 자
기를 점검하는 구도자적 자세에 그 주제가 집중되고 있다. 또한 어떻게 하면
불필요한 것으로부터 자유로워져서 단순하되 충만된 삶을 살 것인가의 화두가
곳곳에서 우리를 일깨운다.
그렇다. 안으로 충만해지는 일은 밖으로 부자가 되는 일 못지 안헥 인생의
중요한 몫임을 우리가 깨닫지 못할 이유가 없다. 때로는 개울에서 흘러내리는
비 온 뒤의 힘찬 물줄기 처럼, 때로는 대숲에 겸허하게 내리는 싸락눈처럼, 그분
의 말씀 우리를 문득 고요한 깨달음의 자리로 인도한다.
스님의 말씀을 여러 장으로 엮으면서 각 장 서두에 엮은이의 개인적인 소감을
실은 것은 자칫 이 책의 의미와 를 흐려 놓지 않을가 염려스럽다. 다만 내가
그 글들을 쓴 것은, 자주 스님을 뵙는 행봅을 누리는 자로서 그 만남을 통해 내
자신이 느낀 것과 배운 것들을 독자들과 함게 나누고자 함이다.
여기 내가 받아적은 이 글들 속에 혹시라도 한쪽에 부처와 조사들의 가르침
에 어긋난 표현이 잇다면 그것은 전적으로 엮은 이인 내 자신의 무지의 결과이
다. 믿는 것은, 내 부족한 식견에 현혹됨이 없이 스님의 말씀에 담긴 그 고요한
침묵의 세계를 바라볼 줄 아는 독자들의 드높은 혜안이다.
1998년 6월
류시화
1
홀로 있는 시간
우리처럼 한평생 산을 의지하고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산은 단순한
자연이 아니다.
산은 곧 커다란 생명체요, 시들지 않는 영원한 품 속이다.
산에는 꽃이 피고 꽃이 지는 일만이 아니라,
거기에는 시가 있고, 음악이 있고, 사상이 있고, 종교가 있다.
인류의 위대한 사상이나 종교가 벽돌과 시멘트로 된 교실에서가 아니라,
때묻지 않은 자연의 숲속에서 움텄다는 사실을 우리는 상기할
필요가 있다. - 법정 스님 수상집 <물소리 바람소리> 중에서
얼마전 존경하는 동화작가 정채봉 선생님을 만났더니 이런 일화를 들려 주셨
다. 그분이 한여름에 법정 스님을 찾아뵌 적이 있엇다고 한다. 불일암으로 난
오솔길을 오르는데 날은 덥고 주위에 매미소리가 요란했다. 그래서 이런 날은
나무 그늘 아래서 낮잠이나 자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불일암에 도착하니 스님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혹시 낮잠을 주무시는 게
아닌가 하고 오두막 가까이 가서 스님을 부르자, 먼 뒤꼍에서 걸어나오시는 것
이었다. 그래서, ‘스님, 이 무더운 날 무얼 하고 계셨습니까? 하고 묻자 스님
깨서는 이렇게 말씀하셧다고 한다.
‘졸음에 바지지 않으려고 칼로 대나무를 깎고 있었습니다.’
졸지 않기 위해 그 일을 하고 계셨다는 것이다. 칼로 날카롭고 대나무도 날
카로우니 깜박 졸았다간 위험하다. 한여름에 그것도 혼지 지내는 거처이니 낮
잠을 즐길 수도 있는 일이다. 그런데 졸지 않고 활짝 깨어 있기 위해 칼로 뾰
족한 대나무를 깎고 있다니.
나는 그동안 인도와 미국 등지를 다니며 여러 명상법을 배웠다. 이땅에도 오
늘날 많은 새로운 수행법들이 유입되고 있음을 본다. 어떤이는 남방불교의 위
파사나를 들고 와 그것이야말로 깨달음의 지름길이라고 역설한다.
그러나 우리가 마냥 졸음에 빠져 삶을 무가치하게 보내는 것은 방편의 부족에
서 오는 것이라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오히려 매순간 자신을 점검하지 않기 때
문이 아니겠는가. 세상과 타협하는 일보다 더 경계해야 할 일은 자기 자신과
타협하는 일이라고 나는 들었다.
스님의 그 대나무 깎는 일화는 두고두고 내게 경책이 되었다. 대나무만 보면
그 일화가 생각났다. 스님을 홀로 사는 즐거움을 말씀하시지만, 그것이 얼마만
큼이나 스스로 자신의 매서운 스승 노릇을 해야하는 일인가를 이 일화가 말해
주고 있기 때문이다.
저 중국의 선승 앙산을 깨달음을 얻은 뒤에도 부엌에서 계속 일을 했다고 하
지 않은가. 그 이유를 묻는 스승에게 앙산을 대답하고 있다.
‘저는 지금 소가 채소받으로 달려가지 않도록 고삐를 힘껏 잡아당기고 있는
중입니다.’
진정한 자유가 내적 절제에 있음을 말해 주는 일화이다. 법정 스님의 대나무
깎는 일화도 그것과 마찬가지 속뜻으로 내 귀에 들린다.
스님은 또 어느 사석에서 말씀하신 적이 있다.
‘나는 줄곧 혼자 살고 있다. 그러니 내가 나를 감시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수행이 되겠는가. 홀로 살면서도 나는 아침 저녁 예불을 빼놓지 않는다. 하루
를 거르면 한 달을 거르게 되기 때문이다. 그렇게 되면 삶 자체가 흐트러져 버
린다.’
명상과 수행의 궁극적인 목표가 자유의 획에 있음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그
러나 진정한 내적 자유를 품기 위해서는 거듭된 자기 점검이 필요함을, ‘도끼
로 얼음을 깨고 물을 길어와야 하는’ 스님의 홀로 사는 삶이 일깨우고 있다.
- 엮은이
홀로 있는 시간
내가 사는 곳은 겨울이면 영하 20도를 오르내린다. 지대가 높고 또 개울가라
무척 춥다. 대관령이 영하 몇 도라고 일기예보가 나가는 걸 보면 내가 사는 곳
이 대개 4,5도 더 낮은 듯하다. 얼음이 두꺼워 에서 물을 길어올 때는 얼음을
깨야만 한다. 깨고 나면 또 금방 얼어붙는다.
추운지는 별로 모르겠지만 숨을 쉬면 코가 찡찡해지고 눈이 어릿어릿하다.
그 정도인데 견딜 만은 하다. 이보다 더 추운 지방에서도 사람이 사지 않는가.
계절이라는 게 추울 땐 추워야 하고 더울 땐 더워야 한다.
산중은 사실 여름보다는 겨울이 더 지내기 좋다. 열므도 내가 사는 곳은 지
대가 높아 모기나 파리가 없기 때문에 아주 쾌적하지만, 산중이라는 곳이 다 그
렇듯 겨울이 차분하다.
둘레가 조용하고, 가끔 뒷골에서는 올빼미나 노루 우는 소리라든가 바람소리
가 지나가고, 밤으로는 등잔불 켜고 이렇게 벽에 기대 앉아 등잔을 바라보고 있
으면 아, 이런 공간이 나한테 주어졌다는 게 얼마나 고마운가 하는 생각이 든다.
바쁘게 사는 세상 사람들에게는 대단히 미안하지만 혼자 거기서 조촐한 삶의
기쁜을 누릴 때가 많다.
그 전에 불일암에 있을 대도 혼자 사니까 가끔 사람들이 와서 홀로 지내기 무
섭지 않느냐고 묻고 했다. 무섭다는 것은 마음의 문제다. 밤이라고 해도 한낮
과 똑은 것이다. 골짜기, 그 산, 그 나무, 그 바위 그대로 있는데 단지 조명 상
태가 어두워진 것일 뿐이다. 그런데 마음이 무서움을 지어낸다.
내가 세속에 있을 때는 무서움을 많이 탔었다. 특히 시골집이니까 변소에 갈
려면 꼭 할머니를 앞세우고 갔다가는 빨리 튀어나오곤 했다.
그러다가 무서움이 사라지게 된 계기가 있었다. 지리산 상계사에 있을 때인
데 한번은 섣달 그믐날 무슨일로 밖에 나왔다가 화개장에서 내려 거기서부터 시
오리 길을 걸어가야만 했다. 비가 부슬부슬 내리는데 전혀 앞이 안 보였다. 그
래서 관세음보살을 부르면서 반은 뛰다시피 하고 갔더니 옷이 전부 땀에 젖어
있었다.
그 뒤로부터는 무서은 생각이 사라졌다.
무서움이란 것이 내 마음 안에서 오는 것임을 어느 순간 깨달은 것이다.
사실 혼자 사는 사람들만 외로움을 느끼는 것은 아니다. 세상 사람 누구나
자기 그림자를 이끌고 살아가고 있으며, 자기 그림자를 되돌아다보면 다 외롭기
마련이다. 외로움을 느끼지 못한다면 그는 무딘 사람이다.
물론 너무 외로움에 젖어 있어도 문제이지만 때로는 옆구리께를 스쳐가는 외
로움 같은 것을 통해서 자기 정화, 자기 삶을 맑힐 수가 있다. 따라서 가끔은
시장기 같은 외로움을 느껴야 한다.
내 경우는 완전히 홀로살이가 되어 이제는 고독 같은 것도 별로 느끼지 않고,
그저 홀가분하게 지낼 뿐이다.
혼자 사는 사람들은 좀 괴팍할 것이다. 좋게 말하면 개성들이 강하고 고집이
세고 그래서 혼자 살기 마련이다. 그것도 습관인 것 같다. 그러나 나 같은 경
우는 홀로 있음으로써 함께 있을 수 있다. 너무 한데 얽혀 함께 지내다 보면
더불어 살아그는 고마움도 모르고, 무엇 때문에 내가 수도 생활을 하는지 그 의
미를 잃게 된다. 또한 자기 개성이나 자기 빛깔 같은 것도 상실된다.
혼자 있어 버릇하니까 누구한테 폐 될 것도 없고, 또 자기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다. 또한 무엇보다도 자연과 가까이 할 수 있다는 것, 그것이 큰 기쁨이
다. 얼음장 밑으로 흐르는 개울물 소리도 그 산골 아니면 들을 수 없을 것이다.
거기서 그렁저렁 지내고 있다.
나는 혼자 살기 때문에 차 타고 어디를 지나가다가도 산자락에 외떨어져 있는
집을 보면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다. 한번 가보고 싶고, 어떤 사람이 사는가 들
여다보고 싶다. 거창한 집이 아니고, 조그만 오두막 같은 걸 보면 무척 정답고,
가서 어떤 사람들이 살고 있는지 기웃거려 보고 싶다.
이제 어느 곳을 가나 큰 절 주변은 거의 오염되었다. 환경만 오염된 것이 아
니고 절 자체도 과소비를 하는 곳이 많다. 생활 환경 자체도 오염되어 절 같지
도 않고, 다라서 우리 같은 경우는 절밥을 오래 얻어먹은 습관 때문에 어딜 가
면 눈에 띄고 귀에 거슬리는게 많다.
이제 홀로 덜어져나와 살게 되니 보지 않고 듣지 않으므로 마음 쓸일도 없다.
다만 이렇게 살면서도 과도자로서 내가 어떻게 처신해야 할 것인가, 이런 것이
화두처럼 내게 늘 과제로 떠오른다.
자연이든 사람이든 세상이든 다 마음에서 시작된 것이다. 마음이 진정한 인
간의 마음으로서 맑고 투명하다면 그 그림자인 세상도 맑고 투명해진다. 세상
에서 온갖 사건, 사과아 비리들이 일어나는 것은 인간의 마음이 순화되지 않았
기 때문이다. 그야말로 말고 향기롭지 못하기 때문에 그렇기 된 것이다.
꼭 불교신자가 아니라도 자기 존재에 대한 그대그때의 물음, 나는 누구인가,
어떤 것이 내 온전한 마음안가, 거듭거듭 물음으로써 삶이 조금씩 개선되고 삶
의 질도 달라진다.
우리가 너무 외부적인 것, 외행적인 것, 표피적인 것, 이런데만 관심을 갖다
보니까 마음이 황폐해졌다. 옛날보다는 훨씬 많이 갖고 있으면서도 마음들
은 더 허전하고 갈피를 잡지 못한다.
현대 문명의 해독제는 자연밖에 없다.
인간이 마지막으로 기댈 데가 자연이다. 자연은 인간 존재와 격리된 별개으
세계가 아니다. 크게 보면 우주 자체가 커디란 생명체이며, 자연은 생명체의 본
질이다.
따라서 우리는 그 자연의 한 부분이다. 우리가 커다란 우주 생명체의 한 부
분이라는 것을 알게 되면 자연을 함부로 망가뜨릴 수 없다.
동양의 전통적인 생각 속에서는 커다란 산이라도 하나의 생명체로 여겼다.
그래서 등산이란 말을 쓰지 않았다. 곡 입산, 산에 들어간다고 했지 산에 오른
다는 말을 감히 하지 않았다.
자연은 우리가 하나의 수단으로서 생각할 것이 아니고 생명의 근원으로서, 커
다란 생명체로 여겨야 한다. 그러게 한다면 오늘과 같이 지구의 환경오염이나
과소비 문제가 안 생겼을 것이다.
자연을 하나의 수단으로 생각했했기 때문에, 정복의 대상으로 생각했기 때문
에 오늘과 같은 문제가 생겼다. 산에서 살다 보면 자연처럼 위대한 교사가 없
다. 이론적으로 배우는 것, 그것은 관념적이고 피상적인 것이다. 자연으로부터
얻어듣는 것, 그것이야말로 근본적인 것이고 그때그때 우리에게 많은 깨우침을
준다.
또 자연은, 태양과 물과 바람과 나무는, 아무 보상도 바라지 않고 무상으로 준
다. 우리는 그걸 감사하게 받아쓰면서 활용해야 하는데, 그것을 허물고 더럽히
는 데 문제가 있다. 그것은 말하자면 생명의 근원을 우리가 자꾸 허무는 것이
나 마찬가지다.
마음을 맑게 하고 자연 속에서 많은 생명체들과 교감하며 나누면서 사는 기
쁨, 그것을 내가 낱낱이 다 알리지는 못하지만 나는 그렇게 살고 있다. 또 그렇
게 노력하고 있다.
사람은 어떤 묵은 데 갇혀 있으면 안 된다. 꽃처럼 늘 새롭게 피어날 수 있
어야 한다. 살아 있는 꽃이라면 어제 핀 꽃하고 오늘 핀 꽃은 다르다. 새로운
향기와 새로운 빛을 발산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가 일단 어딘가에 집착해 그것이 전부인 것처럼 안주하면 그 웅덩
이에 갇히고 만다. 그러면 마치 고여있는 물처럼 썩기 마련이다.
버리고 떠난다는 것은 자기가 살던 집을 훌적 나오라는 소리가 아니다. 낡은
생각에서, 낡은 생활 습관에서 떨치고 나오라는 것이다. 그렇지 않고 눌러앉아
서 세상 흐름대로 따르다 보면 자기 빛깔도 없어지고 자기 삶도 없어진다. 자
주적으로 자기 인생을 살아가는 것이 아니고 남의 장단에 의해서, 마치 어떤 흐
름에 의해서 삶에 표류당하는 것처럼 되어 버린다.
버리고 떠난다는 것은 곧 자기답게 사는 것이다. 자기답게 거듭거듭 시작하
며 사는 일이다. 낡은 탈로부터, 낡은 울타리로부터, 낡은 생각으로부터 벗어나
야 새롭게 시작할 수 있다.
생명은 늘 새롭다. 생명은 늘 흐르는 강물처럼 새롭다. 그런데 틀에 갇히면,
늪에 갇히면, 그것이 상하고 만다. 거듭거듭 둘레에 에워싼 제방을 무너뜨리고
라도 늘 흐르는 쪽으로 살아야 한다.
혼자 사는 사람들은 일단 새롭게 살기가 누구보다도 손쉬울 것이다. 나는 이
렇게 묻는다. 진짜 어떻게 사는 것이 나답게 사는 것인가, 이렇게 살아도 되는
가, 늘 스스로 묻는다. 그러면서 똑같은 일을 되풀이하고 싶진 않다. 늘 새롭게
시작하고 싶다.
가령 서울에 오면 가끔 큰 서점에 가서 책을 고르는데, 나하고는 전혀 상관도
없는, 내 전공분야하고는 상관도 없는 책들을 고르기도 한다. 그것들을 읽어 보
면 거기서 얻을 게 많다. 요즘 우리나라에도 많이 소개되는 시오노 나나미라는
일본 작가의 책을 읽어봤더니 매력 있는 남성에 대한 이론이 있었다. 자기 빛깔
을 지니고, 세속에 타협하지 않고 꿋꿋하게 살아가는 사람도 매력 있는 남성의
하나라는 것이다.
그런 책을 통해서 과연 나는 남으로부터 매력을 느낄 수 있는 삶인가 아닌가
하는 것을 돌아볼 수 있다. 내 삶을 새로가 시작한다는 의미에서 나는 내 전공
과는 상관없는 책이나 사상을 접하곤 한다. 나는 늘 새롭게 살고 싶다.
내가 전에 살던 불일암에는 서너 달에 한 번씩 가끔 가다 들른다. 요즘 강원
도에 살면서 거처로부터 자유로워졌다. 지금 살고 있는 곳은 전기도 안 들어 오
고 전화도 없는데, 그전 내 성격 같아서는 기를 쓰고라도 전기를 끌어들였을 것
이다. 그렇게 되면 거기서 사는 의미가 없다. 어딜 가나 전기는 있다.
또 일단 전기가 들어와 보라. 이제 냉장고다, 텔레비전이다, 오디오다, 비디오
다, 그밖에 무슨 빵 굽는 기계다, 세탁기다, 이게 다 곁들여 올 것 아닌가. 그렇
게 되면 그런 산중에서 사는 의미가 없어진다.
그래서 요즘에 와서는 나이가 들어가는 탓인지 몰라도 주어진 여건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 그대로 수용하는 쪽으로 돌아가고 있다.
불편하다는 것, 그것이 좋은 것이다. 우리가 너무 편리하게 살다 보니까 잠시
라도 전기가 나가고 전화가 끊어지면 안절부절못하고 모든 기능이 정지된다. 그
러나 내가 사는 곳에는 그런 것들이 아예 없고, 또한 필요로 하지도 않는다.
나는 이 땅에 살면서도 전기세와 수도세를 내지 않는다. 따라서 내 자신의 어
떤 잠재력, 원시적이고 야성적인 잠재력이 마음껏 드러난다.
지난 해 내가 변소를 하난 만들었데 그 전에는 변소가 없었다. 사람들이 들으
면 조금 언짢은 소리겠지만, 비 오는 날은 우산을 쓰고 밭에 가서 구덩이를 파
가지고, 거기서 동물처럼 배설하고는 덮어 버렸다.
그런데 비가 많이 오거나 눈이 내리면 그것도 불편했다. 그래서 개울가에서
막돌을 주워다가 쌓아올리고 굴피로 지붕을 덮어 뒷간을 하나 만들었다.
혼자 하니까 시간이 많이 걸렸다. 한 달 가까이 걸렸는데 좀 불편하지만 최소
한 내가 노력해서 그런 건조물을 짓고 나니까 훨씬 흐뭇하고 보람이 있었다.
우리가 너무 편리한 문명의 이기에만 의존하다 보니까 무한한 잠재력과 가능
성이 자꾸만 소멸되어 간다. 그리하여 문명의 노예처럼, 조금만 문명의 장치가
고장나도 옴짝 못할 정도가 되었다.
내가 사는 곳에는 다행히 전기가 안 들어오기 때문에 불편이야 하지만 마음은
더 편하다.
전에는 촛불을 켰는데 겨울에는 외풍에 초가 팔락거려서 요샌 램프를 켠다.
저녁 끝에 램프를 켜고 벽에 등을 기대고 앉아 그 불꽃을 바라보고 있으면 세월
이 고개를 넘는 것 같은 소리를 듣게 된다. 그런데 만일 전기가 들어오고 여러
가지 편리한 장치가 있다면 그걸 누리지 못할 것이다.
행복이란 무엇인가. 밖에서 오는 행복도 있겠지만 안에서 향기처럼, 꽃향기처
럼 피어나는 것이 진정한 행복이다. 그것은 많고 큰 데서 오는 것이 아니고 지
극히 사소하고 아주 조그마한 데서 찾아온다. 조그만 것에서 잔잔한 기쁨이나
고마움 같은 것을 누릴 때 그것이 행복이다.
너무 문명의 이기에 의존하지 말고 때로는 밤에 텔레비전도 다 끄고, 전깃불
도 끄고, 촛불이라도 한번 켜보라. 그러면 산중은 아니더라도 산중의 그윽함을
간접적으로라도 누릴 수가 있다.
또한 가족들끼리, 아니면 하두 사람이라도 조촐한 녹차를 마시면서 잔잔한 얘
기를 나눌 수 있다면 거기서 또한 삶의 향기가 피어나올 수 있다. 때로는 전화
도 내려놓고, 신문도 보지 말고, 단 십 분이든 삼십 분이든 허리를 바짝 펴고 벽
을 보고 앉아서 나는 누구인가 물어보라.
이렇게 스스로 묻는 속에서 근원적인 삶의 뿌리 같은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문명의 커다란 이기로부터 벗어나 하루 한 순간만이라도 순수하게 홀로 있는 시
간을 갖는다면 삶의 질이 달라질 것이다.
나눔의 삶을 살아야 한다. 물질적인 것만이 아니고 따뜻한 말을 나눈다든가
눈매를 나눈다든가 일을 나눈다든가, 아니면 시간을 함께 나눈다든가, 함께 살고
있는 공동체와의 유대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나누는 기쁨이 없다면 사는 기쁨
도 없다. 시간적으로나 공간적으로 외떨어져 독립되어 있다 하더라도 나누는 기
쁨이 없다면 그건 사는 것이 아니다.
아무리 가난해도 마음이 있는 한 다 나눌 것은 있다. 근원적인 마음을 나눌
때 물질적인 것은 자연히 그림자처럼 따라온다. 그렇게 함으로써 내 자신이 더
풍요로워질 수 있다. 세속적인 계산법으로는 나눠 가질수록 내 잔고가 줄어들
것 같지만, 출세간적인 입장에서는 나눌수록 더 풍요로워진다.
내가 사는 곳에는 눈이 많이 쌓이면 짐승들이 먹이를 찾아서 내려온다. 그래
서 내가 콩이나 빵부스러기 같은 먹을 걸 놓아 준다. 박새가 더러 오는데, 박새
한테는 좁쌀이 필요하니까 장에서 사다가 주고 있다.
고구마도 짐승들과 같이 먹는다. 나도 먹고 그 놈들도 먹는다. 밤에 잘 때는
이 아이들이 물 찾아 개울로 내려온다. 눈 쌓인 데 보면 개울가에 발자국이 있
다. 토끼 발자국도 있고, 노루 발자국도 있고, 멧돼지 발자국도 있다. 물을 찾아
오는 것이다.
그래서 내가 그 아이들을 위해서 해질녘에 도끼로 얼음을 깨고 물구멍을 만들
어 둔다. 물구멍을 하나만 두면 그냥 얼어 버리기 때문에 숨구멍을 서너 군데
만들어 놓으면 공기가 통해 잘 얼지 않는다.
그것도 굳이 말하자면 내게는 나눠 갖는 큰 기쁨이다. 나눔이란 누군가에게
끝없는 관심을 기울이는 일이다.
2
소유의 비좁은 골방
산다는 것은 끊임없이 자기 자신을 창조하는 일. 그 누구도 아닌
자신이 자신에게 자신을 만들어 준다.
이 창조의 노력이 멎을 때 나무건 사람이건, 늙음과 질병과 죽음이 온다.
겉으로 보기에 나무들은 표정을 잃은 채 덤덤히 서 있는 것 같지만,
안으로는 잠시도 창조의 일손을 멈추지 않는다.
땅의 은밀한 말씀에 귀 기울이면서 새 봄의 싹을 마련하고 있는 것이다.
시절 인연이 오면 안으로 다스리던 생명력을 대지 위에 활짝 펼쳐
보일 것이다. - 법정 스님 수상집 <신방한담> 중에서
얼마 전 서울의 명동 성당에서 법정 스님을 초청해 카톨릭 신도들과 수도자들
이 모인 자리에서 법문을 들었다. 명동 성당이 세워진 지 백 년을 기념하기 위
해 열린 강연회였다. 불교 수행자가 그 설교단에 올라 법문을 한 것은 그때가
최초의 일이었다.
그 자리에서 스님은 이렇게 말문을 여셨다.
‘방금 신부님께서 말씀하셨듯이 제 자신도 더러 수녀원에 가서 강론한 적은
있지만 이런 큰 성당에서 말하게 된 기회는 오늘이 처음입니다. 저를 오늘 이
자리에 초대해 주신 명동 성당측에 감사 말씀드리고, 성당이 축성된 지 올해가
백 돌 되는 해에 저와 같은 사람을 이런 자리에 서게 해주신 천주님의 뜻에 거
듭 감사드립니다.’
그러자 청중들 사이에서 환호와 박수가 터져나왔다. 그 자리에 있던 나 역시
잔잔한 감동이 느껴졌다. 두 종교의 만남이라는 거죽의 일이 아니더라도, 십자가
앞에 서 계신 스님의 모습은 보는 이들에게 많은 감흥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
다.
내가 알기로 스님은 그동안 어떤 거국적인 종교계의 기도회나 합동 모임에도
참석하신 적이 없으시다. 그분은 다시 태어난다 해도 그런 형식적인 자리에 얼
굴을 내미실 분이 아니다.
그러나 한편으로 스님은 카톨릭이나 기독교의 몇몇 분들과 친분이 두터우시
다. 오랜 세월을 장익 주교님과 만나오면서 두 분 사이에 복장의 차이뿐 다른
차이는 아무것도 없다고 말씀하신다. 장안의 언론이 떠들썩했지만, 서울의 길상
사 개원식에 김수환 추기경이 참석해 불상 앞에서 축사를 읽으신 것도 따라서
우연한 일이 아니었다. 그것에 대한 화답으로 스님은 그해 크리스마스에 성탄절
축하 메세지를 보내셨다.
스님은 프란치스코 성인의 살아간 모습을 좋아하셔서 자주 언급하신다. 사막
교부의 일화들도 곧잘 인용하신다. 그런가 하면 랍비와 힌두교 시인들도 좋아하
신다. 나를 만날 때마다 매번 크리슈나무르티의 ‘마지막 일기’가 갖고 있는
아름다움과 감동을 말씀하신다. 연륜 있는 한 수도자의 이러한 태도는 나 자신
뿐 아니라 수행하는 사람들, 이 세상을 함께 살아가는 모든 이들에게 큰 깨우침
이라고 나는 믿는다.
네덜란드 출신의 명상화가 프레데릭 프랑크는 말한다.
‘진정한 예술인은 예술이라는 것 너머에 있고, 진리는 종교라는 울타리 밖에
있으며, 사랑은 껴안는 행위 너머에 있다.’
불교 전통에 따라 누군가 삼배를 올리면 스님은 그렇게 불편해 하실 수가 없
다. 그 불편해 하는 모습에서 인간적인 순수함이 드러난다. 그 순수함과 진실을
직시하는 눈빛은 종교에 오래 몸담은 사람일수록 가장 먼저 잃어 버리기 쉬운
요소들이라고 할 수 있다.
옛 선승들도 ‘배는 강을 건너라고 있는 것이고, 종교는 그것을 뛰어 넘으라
고 있는 것’임을 가르쳤지 않았는가. 명동 성당의 설교단에 서서 약간은 수줍
어하는 말투로 프란치스코 성인의 일화를 예로 드는 스님을 바라보면서, 나는
문득 한 사람의 참인간이 내 앞에 서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 엮은이
소유의 비좁은 골방
성 프란치스코의 말을 빌리자면 가난은 우리 자신을 떨어뜨리는 것이 아니라
들어올리는 길이다. 어려운 처지에 놓여 이웃과 나눠 가질 때 그것은 우리 자신
을 높이 들어올리는 행위라는 것이다. 우리가 지금 마주친 삶의 경제적인 위기
는 우리 자신을 떨어뜨리지 않고 우리 자신을 높이 들어올리는 계기가 되어야
한다.
프란치스코 성인은 죽음이 임박했을 때 가난과 겸손을 보다 온전하게 지키기
위해 형제들의 모든 집과 움막은 반드시 흙과 나무로 지어야 한다는 내용을 유
언에 넣도록 당부했다. 나는 이 글을 읽으면서 많은 영감을 얻었다.
동서고금을 물을 것 없이 그 시대와 후세에까지 모범이 된 신앙인들은 가난과
어려움 속에서 믿음의 꽃을 피우고 그 열매를 맺었다.
불교 경전에도 보면 수도자는 먼저 가난해야 한다고 적혀 있다. 가난하지 않
고서는 보리심이나 어떤 진리에 대한 자각이 이루어지기 어렵다는 것이다. 주어
진 가난은 우리가 극복해야 할 과제이지만, 스스로 선택한 맑은 가난, 즉 청빈은
절제된 아름다움이며 삶의 미덕이다.
풍요 속에서는 사람이 타락하기 쉽다. 그러나 맑은 가난은 우리에게 마음의
평안을 가져다 주고 올바른 정신을 지니게 한다.
온갖 욕망과 자기 자신에 대한 집착으로부터 해방되었을 때 사람은 비로소 온
우주와 하나가 될 수 있다. 욕망과 아집에 사로잡히면 자신의 외부에 가득차
있는 우주의 생명을 받아들일 수가 없다.
그러므로 소유물을 최소한으로 줄여서 스스로를 우주적인 생명으로 승화시키
는 것이 맑은 가난, 곧 청빈이다. 청빈은 절제된 아름다움이며 사람을 사람답게
만드는 기본적인 조건이다. 예로부터 깨어 있는 정신들은 늘 자신의 삶을 절제
된 아름다움으로 가꾸어 나갔다.
청빈의 덕을 쌓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무엇보다 따뜻한 가슴을 지녀야
한다. 우리 둘레에 편리한 물건의 더미는 한없이 쌓여 있지만 그것들을 사용하
면서 우리는 과연 행복한가 스스로에게 물어봐야 한다. 일상적인 물건들을 사용
하면서 우리는 과연 행복한가.
단추 하나만 눌러도 밥이 되고 냉장이 되고 세탁이 된다. 이렇게 편리한 연장
을 쓰면서 과연 우리는 얼마만큼 행복을 느끼고 있는가. 그런 사실에 대해 고마
움을 느끼고 있는가.
사람은 머리만 갖고는 제대로 살 수 없는 존재이다. 머리의 회전만을 중시하
는 세상은 더없이 냉혹하고 차갑다. 이 사회는 머리만이 존재할 뿐 따뜻한 가슴
이 끼어들 틈이 없다. 보라. 온갖 종류의 부정과 비리, 사기와 속임수, 그 밑바탕
에는 간교한 머리가 작용하고 있다.
심장은 그런 데 관여하지 않는다. 가슴은 그런 일에 관계하지 않는다. 사람을
뽑는 대학에서 머리만 중시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 머리의 회전만을 중요시하는
사회는 문제를 안을 수밖에 없다.
믿음은 머리에서 나오지 않는다. 가슴에서 온다. 머리에서 오는 것은 지극히
추상적이고 관념적이다. 머리는 늘 따지고 의심한다. 그러나 가슴은 받아들인다.
열린 가슴으로 믿을 때 그 믿음은 진실한 것이고 또 살아 움직이는 것이다. 인
간의 신뢰와 성실성도 머리가 아니라 가슴에서 온다.
삶의 질이란 도대체 무엇이겠는가. 그것은 따뜻한 가슴에 있다. 진정한 삶의
질을 누리려면 가슴이 따뜻해야 한다. 세상을 살아가면서 가장 마음써야 할 것
은 만나는 이웃에게 좀더 친절해지는 것이다. 내가 오늘 어떤 사람을 만났다면
그 사람을 통해서 내 안의 따뜻한 가슴이 전해져야 한다. 그래야 만나는 것이다.
따뜻한 가슴에서 우러나오는 친절이야말로 모든 삶의 기초가 되어야 한다. 우
리가 보다 더 친절하고 사랑한다면 우주는 그만큼 선한 기운으로 채워질 것이
다.
우주는 한정되어 있지 않다. 우리가 마음의 문을 닫고 옹졸하게 산다면 그만
큼 비좁아지고 옹색해진다. 마음을 활짝 열고 누군가에게 친절하고 사랑한다면
그만큼 자기 자신이 선한 기운으로 활짝 열리게 되는 것이다.
누군가를 기쁘게 해주면 내 자신이 기뻐지고, 누군가를 언짢게 하거나 괴롭히
면 내 자신이 괴로워진다. 이것이 바로 마음의 메아리이다. 마음의 뿌리는 하나
이기 때문에 그렇다.
따뜻한 가슴을 지녀야 청빈의 덕이 자란다. 우리가 불행한 것은 경제적인 결
핍 때문이 아니다. 따뜻한 가슴이 없기 때문에 불행해지는 것이다.
청빈의 덕을 쌓으려면 만족할 줄 알아야 한다. 마하트마 간디는 이런 말을 하
고 있다.
‘ 이 세상은 우리의 필요를 위해서는 풍요롭지만 탐욕을 위해서는 궁핍한 곳
이다.’
환경학자들은 21세기까지 이 지구가 이대로 존속할 수 있을까 없을까를 염려
하고 있다. 한정된 자원을 우리 시대에 와서 너무도 탐욕스럽게 고갈시키고 있
기 때문이다.
오늘날 우리는 이전에 비해 얼마나 풍요롭게 살고 있는가. 그러면서도 안으로
정신적으로 얼마나 궁핍한가. 이삼십 년 전 우리는 연탄 몇 장만 들여 놓아도,
쌀 몇 되만 가지고도 행복할 수 있었다. 삶에 대해 고마워할 줄 알았다.
그러나 지금은 그보다 훨씬 많은 것을 차지하고 살면서도 그러한 행복을 누릴
수가 없다. 그것은 필요한 것과 불필요한 것을 가릴 줄 모르기 때문이다.
행복의 비결은 필요한 것을 얼마나 갖고 있는가가 아니라 불필요한 것에서 얼
마나 자유로워져 있는가 하는 것이다. 옛말에 ‘위에 견주면 모자라고 아래에
견주면 남는다’는 말이 있다. 이 말은 행복을 찾는 오묘한 방법이 어디에 있는
지를 깨우쳐 주고 있다.
안으로 충만해지는 일은 밖으로 부자가 되는 일에 못지 않게 인생의 중요한
몫이다. 인간은 안으로 충만할 수 있어야 한다. 우리가 아무 잡념 없이 기도를
올릴 때 자연히 마음이 넉넉해지는 것을 느낀다. 그때는 삶의 고민 같은 것이
끼어들지 않는다. 내 마음이 넉넉하고 충만하기 때문이다.
2세기 남쪽 인도에 살았던 대승불교학자인 용수가 한 친구에게 보낸 편지에
이런 구절이 있다. 문맥으로 볼 때 아마도 그 친구가 부자였는데 도둑을 맞았던
것 같다.
‘그대가 항상 만족해 있다면 그대가 가진 모든 것을 도둑맞는다 할지라도 그
대는 스스로 부자로 여기리라. 그러나 만족할 줄 모른다면 아무리 부자일지라도
그대는 그 돈과 재산의 노예일 뿐이다.’
만족할 줄 안다면 내면으로 풍성하기 때문에 설령 내 재산을 도둑 맞는다 하
더라도 스스로 부자로 여긴다는 뜻이다. 그러나 아무리 많이 차지하고 있다 하
더라도 만족할 줄 모르면 그 돈과 재산의 노예일 뿐이라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는 무엇을 가지고도 만족할 줄 모른다. 이것이 현대인들의 공통된
병이다. 그래서 늘 목이 마른 상태이다. 겉으로는 번쩍거리고 잘 사는 것 같아도
정신적으로는 초라하고 궁핍하다. 크고 많은 것만을 원하기 때문에 작은 것과
적은 것에서 오는 아름다움과 살뜰함과 사랑스러움과 고마움을 잃어 버렸다.
행복의 조건은 무엇인가. 아름다움과 살뜰함과 사랑스러움과 고마움에 있다.
나는 향기로운 자 한잔을 통해서 행복을 느낄 때가 있다. 내 삶의 고마움을 느
낄 때가 많다. 산길을 지나다가 무심히 피어 있는 한 송이 제비꽃 앞에서도 얼
마든지 나는 행복할 수 있다. 그 꽃을 통해서 하루의 일용할 양식을 얻을 수 있
다.
또 다정한 친구로부터 들려오는 목소리, 전화 한 통화를 통해서도 나는 행복
해진다. 행복은 이처럼 일상적이고 사소한 데 있는 것이지 크고 많은 데 있지
않다. 일상적인 경험을 통해서 늘 확인할 수 있는 것이다.
필요에 따라 살되 욕망에 따라 살지는 말아야 한다. 욕망과 필요의 차이를 알
아야 한다. 욕망은 분수 밖의 바람이고, 필요는 생활의 기본 조건이다. 하나가
필요할 때는 하나만 가져야지 둘을 갖게 되면 당초의 그 하나마저도 잃게 된다.
내가 흔히 드는 비유가 있다. 한때 나는 괴팍해서 글을 쓸 때 꼭 만년필을 고
집한 적이 있었다. 만년필도 보통 만년필이 아니고 촉이 아주 가는 것만을 썼다.
그래야 내가 가진 투명한 감성을 그대로 표현할 것 같아서였다.
한번은 동경대학에 유학중인 스님이 문구점에 가서 내가 좋아한다고 촉이 가
는 만년필을 하나 사준 적이 있다. 나는 아주 고맙게 여기고 그걸로 글을 많이
썼다. 그런데 파리에 갔더니 그곳에 똑같은 만년필이 잔뜩 있었다. 그래서 촉이
가는 만년필을 하나 더 사왔다.
그랬더니 그 날부터 내가 처음 가졌던 그 필기구에 대한 살뜰함과 고마움이
사라졌다. 나는 결국 나중에 산 것을 아는 스님을 줘 버렸다. 그러자 비로소 처
음의 그 소중한 감정이 회복되는 것이었다. 하나가 필요할 때는 그 하나만을 가
져야 한다.
물건에 집착하면 그 물건이 인간 존재보다 훨씬 중요한 것이 된다. 그것은 흔
히 경험하는 일이다. 비싼 물건을 사다 놓고 좋아하다가 그것이 깨지거나 사라
졌다고 상상해 보라. 그러면 큰일이 난 것처럼 소란을 피운다.
물건은 도구이다. 살아가면서 필요한 생활 도구이다. 생활 도구로 쓰지 않고
물건을 반닫이 위나 어디에 모셔 놓으면 그너 도구가 아니다.
인간을 제한하는 소유물에 사로잡히면 소유의 비좁은 골방에 갇혀서 정신의
문이 열리지 않는다. 작은 것과 적은 것으로써 만족할 줄 알아야 한다. 그것이
청빈의 덕이다.
청빈의 덕을 쌓으려면 단순하고 간소하게 살아야 한다. 내가 가끔 인터뷰할
때 스님의 소원은 무엇입니까. 라는 질문을 받는다. 내 개인적인 소원은 보다 단
순하고 조다 간소하게 사는 것이다.
나는 내가 사는 집의 부엌 벽에다 보다 단순하고 보다 간소하게라는 낙서를
해 놓았다. 단순함과 간소함이 곧 본질적인 세계이다. 불 필요한 것들을 다 덜어
내고 꼭 있어야 할 것과 있어야 되는 것으로만 이루어진 어떤 결정체 같은 것
그것이 단순과 간소이다.
꼭 있어야 되는 것으로 이루어진 복잡한 것을 다 소화하고 난 다음의 어떤 궁
극적인 것이다.
단순함이란 그림으로 치면 수묵화의 경지이다. 먹으로 그린 수묵화 이 빛깔
저 빛깔 다 써보다가 마지막에 가서는 먹으로 하지 않는가. 그 먹은 한 가지 빛
이 아니다. 그 속엔 모든 빛이 다 갗춰져 있다. 또 다른 명상적인 표현으로 하자
면 그것은 침묵의 세계이다. 텅 빈 공의 세계이다.
단순과 간소는 다른 말로 하면 침묵의 세계이다.
또한 텅 빈 공의 세계이다. 텅 빈 충만의 경지이다. 여백과 공간의 아름다움이
이 단순과 간소에 있다. 우리는 흔히 무엇이든지 넘치도록 가득 채우려고만 하
지 텅 비우려고는 하지 않는다.
텅 비워야 그 안에서 영혼의 메아리가 울린다. 텅 비어야 거기 새로운 것이
들어 찬다. 우리는 비울 줄을 모르고 가진 것에 집착한다. 텅 비어야 새것이 들
어찬다.
모든 것을 포기할 때 한 생각을 버리고 모든 것을 포기할 때 진정으로 거기서
영혼의 메아리가 울린다. 다 텅 비었을 때 그 단순한 충만감 그것이 바로 하늘
나라이다. 텅 비어 있을 때 모든 집착에서 벗어나 어디에도 집착하지 않고 텅
비었을 때 그 단순한 충만감 그것이 바로 극락이다.
마음이 충만한 사람은 행복하다. 하늘나라가 그들의 갓이다. 남보다 적게 갖고
있으면서도 그 단순과 간소함 속에서 생의 기쁨과 순수성을 잃지 않는 사람이야
말로 청빈의 화신이다. 또 진정으로 삶을 살 줄 아는 것이다.
그 단순함과 간소함 속에서 생의 기쁨과 순수성을 잃지 않고 있다면 그것이
바로 삶을 살 줄 아는 것이다. 그것은 모자람이 아니고 충만이다.
욕심은 부릴 게 아니라 버릴 것이다. 버림으로써 영원히 빛을 발한다. 이렇게
가난을 강조하는 것은 궁상떨면서 살자는 뜻이 아니다. 우리가 너무 넘치는 것
만 바라기 때문에 제정신을 차리고 차분하게 우리의 삶을 객관적으로 옛 거울에
다시금 비춰 보자는 것이다,
이와 같은 청빈은 경제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일시적인 생활 방편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가 두고두고 익혀 가야 할 항구적이고 지속적인 우리의 생활 규범이
다.
이 지구촌에는 나눠 가져야 할 이웃이 너무도 많다. 절제된 미덕인 청빈은 그
뜻이 나눠 갖는다는 뜻이다. 청빈은 그저 맑은 가난이 아니라 그 원 뜻은 나눠
가진다는 뜻이다.
청빈의 상대 개념은 부가 아니라 탐욕이다. 한자로 탐자는 조개패 위에 이제
금자이고 가난할 빈자는 조개패 위에 나눌분 자이다. 탐욕은 화폐를 거머쥐고
있는 것이고 가난함은 그것을 나눈다는 뜻이다. 따라서 청빈이란 뜻은 나눠 갖
는다는 뜻이다.
사람들에게 만일 가난이 없었다면 나눠 가질 줄도 몰랐을 것이다. 내가 가난
해 봄으로써 우리 이웃의 가난 어려움에 눈을 돌리게 된다.
성 프란치스코는 수도자가 사는 집은 흙과 나무로만 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흙과 나무는 기본적인 소재이다. 흙과 나무로만 짓게 되면 자연히 검소한 집이
된다. 성 프란치스코는 그런 수도원을 그들이 소유하지 말고 그 속에서 순례자
나 여행자처럼 살자고 역설했다.
진정으로 우리가 삶을 살 줄 안다면 순례자나 여행자처럼 살 수 있어야 한다.
순례자나 여행자는 어디에도 집착하지 않는다. 그날 그날 감사하면서 나눠 가지
면서 삶을 산다. 집이든 물건이든 어디에도 집착하지 않는 순례자처럼 살아야
한다.
내 자신이 몹시 초라하고 부끄럽게 느낄 때가 있다. 그것은 내가 가진 것보다
더 많은 것을 갖고 있는 사람 앞에 섰을 때는 결코 아니다. 나보다 훨씬 적게
가졌어도 그 단순과 간소함 속에서 삶의 기쁨과 순수성을 잃지 않는 사람 앞에
섰을 때이다. 그 때 내 자신이 몹시 초라하고 가난하게 되돌아 보인다.
다시 말하거니와, 내가 가진 것보다 더 많은 것을 갖고 있는 사람 앞에 섰을
때 나는 기가 죽지 않는다. 내가 기가 죽을 때는 내 자신이 부끄럽고 가난함을
느낄 때는 나보다 훨씬 적게 갖고 있으면서도 그 단순과 간소함 속에서 여전히
삶의 기쁨과 순수함을 잃지 않는 사람을 만났을 때이다.
옛 사람들은 어렵고 가난한 생활 가운데에서도 아주 편안한 마음으로 도를 즐
길 줄 알았다. 마음의 안정과 여유를 잃지 않고 살았다. 안빈과 낙도란 그래서
생긴 말이다. 가난 속에서도 편안한 마음으로 도를 즐기며 산다는 뜻이다. 그 지
혜를 우리가 배워야만 한다.
어려운 때일수록 낙관적인 생활 태도를 갖는 것이 필요하다. 어떤 명상서적을
읽어 보면 우주의 기운은 자력과 같아서 우리가 어두운 마음을 지니고 있으면
어두운 기운이 몰려 온다고 적혀 있다. 우리가 밝은 마음을 지니고 긍정적이고
낙관적으로 살면 밝은 기운이 밀려 온다는 것이다. 일리가 있는 말이다.
누구에게나 삶의 고민이 있다. 그것이 그 삶의 무게이다. 그것이 그 삶의 빛깔
이다. 우리는 이 세상에 태어날 때 한 물건도 갖고 오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가난한들 무슨 손해가 있겠는가. 내가 태어날 때 아무 것도 갖고 오지 않았는데
가난한들 손해될 게 무엇인가. 또 살만큼 살다 이 세상을 하직할 때 아무 것도
가져갈 수 없다. 죽을 때 부유한들 무슨 이익이 되겠는가. 내 것이 어디 있는가.
우리는 이 우주의 선물을 신이 주신 선물을 잠시 맡아서 관리하는 것일 뿐이
다. 그 기간이 끝나거나 관리를 잘못하면 곧바로 회수당한다. 이것이 우주의 리
듬이다.
내가 좋아하는 옛 시조가 있다.
십 년을 경영하여 초가삼간 지어내니
나 한 칸 달 한 칸에 청풍 한 칸 맡겨 두고
강산은 들일 데 없으니 둘러보고 보리라.
요즘은 뚝딱하면 하루 아침에 다 지어내는데 십 년을 벼르고 별러 그것도 초
가 삼 칸을 지었다는 것이다. 나 혼자 살기 위해 지은 것도 아니다. 나는 그 중
에서 한 칸만 차지하면 되는 것이다. 나 한 칸 달 한 칸에 맑은 바람에게도 나
머지 한 칸을 주었다. 집이 비좁으니까 강과 산을 들여 놓을 수가 없었다. 그래
서 주위에 둘러보고 두겠다는 것이다.
이런 시조야말로 청빈의 절제된 아름다움을 노래한 것이다.
문명은 사람을 병들게 한다. 그렇지만 자연은 사람을 소생시켜 준다. 사람을
거듭나게 한다. 자연과 더불어 살 때 사람은 시들지 않고 삶의 기쁨을 누릴 수
있다.
어떤 선사는 그의 오두막을 두고 이렇게 노래한다.
벽이 무너져 남북이 트이고
추녀가 성글어 하늘이 가깝다.
쓸쓸하다고 말하지 말게.
바람을 맞이하고 달을 먼저 본다네
집이 다 허물어지고 낡았기 때문에 바람을 맞이하고 달을 먼저 보는 즐거움을
누릴 수 있다는 것이다. 집이 낡아 추녀 벗겨진 지붕 사이로 하늘이 다 보이자.
사람들이 와서 을씨년스럽고 말한다. 그러나 이 선사는 말하고 있다. 쓸쓸하다고
말하지 말게. 집이 다 허물어진 덕분에 달을 먼저 볼 수 있지 않은가.
스스로 선택한 청빈은 단순한 가난이 아니라 삶의 어떤 운치이다.
세상이 달라지기를 바란다면 우리들 한 사람 한 사람의 모습이 달라져야 한
다. 내 자신부터 달라져야 한다. 한 사람 한 사람의 삶의 모습이 달라져야 한다.
그래야만 세상이 달라진다. 내 자신이 세상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우리들 한 사
람 한 사람이 세상이 일부이다.
우리 앞에는 항상 오르막 길과 내리막길이 놓여 있다. 이 중에서 하나를 선택
해야 한다. 각자 삶의 양식에 따라서 오르막 길을 오르는 사람도 있고 내리막길
을 내려가는 사람도 있다.
오르막 길은 어렵고 힘들지만 그 길은 인간의 길이고 꼭대기에 이르는 길이
다. 내리막길은 쉽고 편리하지만 그 길은 짐승이 길이고 구렁으로 떨어지는 길
이다.
만일 우리가 평탄한 길만 걷는다고 생각해 보라. 십년 이십 년 한 생애를 늘
평탄한 길만 간다고 생각해 보라. 그 생이 얼마나 지루하겠는가. 그것은 사는 것
이라고 할 수 없다. 오르막 길을 통해 뭔가 뻐근한 삶의 저항 같은 것도 느끼고
창조의 의욕도 생겨나고 새로운 삶의 의지도 지닐 수 있다. 오르막 길을 통해
우리는 거듭 태어날 수 있다. 어려움을 겪지 않고는 거듭 태어날 수 없다.
3
가난한 삶
산에서 살아 보면 누구나 아는 일이지만, 겨울철이면 나무들이 많이
꺾이고 만다.
모진 비바람에도 끄떡 않던 아름드리 나무들이,
꿋꿋하게 고집스럽기만 하던 그 소나무들이 눈이 내려 덮이면
꺾이게 된다. 깊은 밤 이 골짝 저 골짝에서
나무들이 꺾이는 메아리가 울려올 때 우리들은 잠을 이룰 수가 없다.
정정한 나무들이 부드러운 것에 넘어지는 그 의미 때문일까.
산은 한겨울이 지나면 앓고난 얼굴처럼 수척하다.
- 법정 스님 수상집 <영혼의 모음> 중에서
십 년 전 내가 법정 스님을 뵈러 불일암우로 찾아갔던 것은 사실 어떤 깨달음
의 말씀이나 진리의 가르침을 듣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나는 이미 인도와 외국
의 여러 가르침들로 머리가 포화 상태였고 사실 무지의 문제가 아니라 과다한
지식의 문제에 걸려 넘어지고 있었다. 이제까지 해오던 명상서적 번역일도 그만
둘까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그런 상황에서 나는 문득 차를 타고 남도 지방에 내려갔고 발길을 그분의 처
소로 돌린 것이다. 경지를 시험하기 위한 선 문답이나 심도 깊은 사상 철학을
논하기 위해 그 무더운 여름날에 그 곳까지 찾아 간 것은 물론 아니었다.
나는 다만 오두막 옆 밭둑에 서 계신 스님의 모습이나 방문 앞 섬돌에 놓인
그분의 신발 정도를 한번 보고 싶었을 따름이다. 한 인간이 가진 존재와 향기를
직접적으로 경험하고자 한 것이다.
유태교 신비학파의 한 수도자는 이렇게 고백하고 있다.
‘내가 메즈리츠의 늙은 랍비를 찾아갔던 것은 그에게서 율법을 배우고자 함
이 아니었고, 다만 그가 신발 끈을 매는 것을 구경하기 위해서였다.’
스님께서도 어느 글에선가 운문사에 다녀오신 뒤 그 곳의 섬돌 위에 놓여 있
던 백 서른 켤레의 흰 고무신들을 인상 깊게 적으신 적이 있다. 어찌 보면 백
마디의 설법이나 현명한 발언보다 문 앞에 놓인 그분의 신발 한 켤레가 더 많은
속내 이야기를 전할 수 있다.
그 동안도 그렇고 이 책을 엮으면서도 여러 차례 스님을 뵙는 자리에서 나는
사실 그 분으로부터 어떤 삶의 지혜로운 경구나 깨달음의 설교를 장황하게 들은
적이 한 번도 없다. 오히려 그분이 들고 다니는 오래된 가방 겨울이면 쓰시는
낡은 털모자 정구화처럼 생긴 검은색의 단순한 신발로부터 더 많은 걸 느낀다.
한 번은 서울 길상사에서 오셔서 식사를 하시고는 반찬의 많은 가짓수와 풍성
함을 지적하셨다. 사실 그다지 많은 음식이 아니었다. 그리고 누군가 요즘 절에
서는 다 이렇게 먹는다고 하자 그분은 세상의 절이 모든 절이 그렇다 해도 이
곳에서는 그렇게 하지 말아야 한다고 단호히 못박으셨다.
인간은 최소한 얼마만큼을 소유해야 인간으로 살아갈 수 있을까. 또 역설적으
로 얼마만큼 이상을 소유하면 인간성을 상실하게 되는 걸까. 스님을 만나면 이
매우 중요한 질문에 대한 살아 있는 척도를 보는 듯하다.
랍비의 신발끈 얘기를 했던 그 수도자는 자신의 스승을 가리켜 이렇게 말했
다.
‘보라. 저기 경전과 율법보다도 더 살아 있는 경전이 오고 있지 않은가.’
감히 말하지면, 오늘날 우리에게 넘쳐나는 것은 경전과 율법이며 우리에게 턱
없이 부족한 것은 그 경전과 율법이 그대로 실천된 삶이지 않은가.
- 엮은이
가난한 삶
아기 예수의 탄생이 오늘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지 함께 생각해 볼 기회
입니다. 탄생은 한 생명의 시작일 뿐 아니라 낡은 것으로부터 벗어남이기도 합
니다.
가난한 자와 버림받은 자들 곁에 계셨던 그분 자신이 이 세상에서 가장 가난
하고 버림받은 자임을 우리는 상기해야 합니다. 우리 사회가 지금 당면하고 있
는 온갖 시련과 고통 그리고 갈등과 분열은 어디서 온 것일까요? 그 누구도 아
닌 우리들 자신이 뿌려서 거두고 있는 분수 밖의 욕심 바로 그 열매입니다.
우리는 다시 태어나야 합니다. 낡은 껍질을 벗고 새롭게 움터야 합니다. 마음
이 가난한 사람은 복이 있나니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 아무것도 가지고 오지 않았고 또한 아무것도 가지고 갈 수 없습니다.
본래 무일물 마음의 문이 열려야 그 안에서 영혼의 메아리가 울립니다.
오늘 우리 곁에 오신 하느님의 아들께 비옵니다. 마음 속 깊이 좌절의 상처를
입은 이들에게 위로를 주시고 오만해지기 쉬운 이들이 겸손과 포용의 덕을 지니
도록 깨우쳐 주소서. 그리고 이 나라가 지금 겪고 있는 시련과 고통에서 하루빨
리 벗어나 사람답게 살아갈 수 있도록 이끌어 주소서. 아멘(성탄 메시지 중에서)
나는 이 길상사가 가난한 절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요즘은 어떤
절이나 교회를 물을 것 없이 신앙인의 분수를 망각한 채 호사스럽게 치장하고
흥청거리는 것이 이 시대의 유행처럼 되고 있는 현실입니다.
절은 더 말할 것도 없이 안으로 수행하고 밖으로 교화하는 청정한 도량입니
다. 진정한 수행과 교화는 호사스러움과 흥청거림에서는 결코 이루어질 수 없습
니다. 풍요 속에서는 사람이 병들기 쉽지만 맑은 가난은 우리에게 마음의 평화
를 이루게 하고 올바른 정신을 지니게 합니다.
이 길상사는 가난한 절이면서도 맑고 향기로운 도량이 되었으면 합니다. 불자
들만이 아니라 누구나 부담없이 드나들면서 마음의 평안과 삶의 지혜를 나눌 수
있었으면 합니다.(길상사 개원 법문에서)
신앙 생활은 끝없는 복습이다. 신앙 생활에는 예습이 없다. 하루하루 정진하고
익히는 복습이다. 영적인 체험은 복습의 과정을 통해 얻어진다. 종교적인 체험이
란 하루하루 비슷하게 되풀이되는 복습의 과정을 통해서 얻어진다. 복습은 단순
한 반복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이다. 어제의 정진은 어제로서 끝나고 오늘은 오
늘대로 새로운 시작인 것이다.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을 사바세계라고 한다. 사바세계가 무슨 뜻인가. 그것은
산스크리트에서 온 것으로 우리말로 하자면 참고 견뎌 나가는 세상이란 뜻이다.
우리가 사는 세계는 참는 땅이라는 것이다.
참고 견디면서 살아가는 세상이기 때문에 거기에 삶의 묘미가 있다, 모든 것
이 우리 뜻대로 된다면 좋을 것 같지만 그렇게 되면 삶의 묘미는 사라진다.
이 몸이라는 것은 물 불 공기 흙 네 가지로 이루어졌다. 또 인간의 존재는 반
야심경에 나오듯 오온 곧 색수상행식 물질적 요소와 정신적 요소가 합쳐져 만들
어진 유기적 존재이다. 본래부터 있었던 게 아니라 어떤 인연이 닿아 이런 형상
을 갖추고 나온 것이다. 또 인연이 다하면 흩어지고 만다.
그렇기 때문에 이 몸 자체가 무상한 것이다. 늘 변하는 것이다. 어느 것도 고
정되여 있지 않다. 나를 오랜만에 본 신도나 스님들은 아이구 스님두 이제 많이
늙으셨네요 한다. 중이라고 안 늙는 재간이 있겠는가. 부처도 생로병사라 하지
않았는가. 그것이 우주의 질서이다.
그러나 영혼에는 생로병사가 없다. 거죽은 생로병사가 있다지만 거죽 속의 알
맹이는 태어남도 없고 늙음도 없으며 병듦도 없고 죽음도 없다.
보왕삼매론은 말하고 있다.
‘몸에 병 없기를 바라지 말라. 몸에 병이 없으면 탐욕이 생기기 수비다. 그래
서 성인이 말씀하기를 병고로써 양약을 삼으라 하셨느니라.’
병을 앓을 때 신음만 하지 말고 그 병의 의미를 터득하라는 말이다. 몸이 건
강했을 때 생각해 보지 못했던 일들을 병을 앓을 때 생각해 보라는 것이다. 내
가 하루하루를 어떻게 살아왔는가. 내게 주어진 인생을 어떻게 살아왔는가. 스스
로 자기 성찰할 수 있는 게기로 삼으라는 것이다.
병 자체가 죽을 병이 아니라면 그 병을 통해서 새로운 눈을 떠야 한다. 좋은
약으로 삼아야 한다. 사람의 몸은 허망한 유기체이다. 지금 우리가 이 자리에 함
께 모여 있지만 이 다음 다른 순간 또 어떻게 될지 모른다.
예측할 수 없는 존재이다. 본래 그런 것이다. 그러므로 이 몸 가지고 늘 건강
하기를 바라지 말라고 보왕삼매론은 일깨우고 있다. 이 말은 즉 건강했을 때 내
게 건강이 주어졌을 때 살라는 뜻이다. 허송세월하지 말라는 것이다. 인생을 무
가치한 곳에 쏟아 버리지 말라는 뜻이다.
오늘날 우리는 얼마나 허약한가. 옛날 농사짓고 살던 흙을 딛고 살던 시절에
는 흙으로부터 많은 기운을 받아들일 수 있었다. 흙의 교훈을 몸소 익힐 수가
있었다. 그래서 그렇게 허약하지 않았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는 가진 것도 많고 아는 것도 많으며 여러 편리한 시설 속
에 살고 있는데 체력과 의지는 자꾸 떨어진다. 그것은 흙으로부터 자꾸 멀어지
기 때문이다. 대지로부터 멀어지기 때문에 허약해지는 것이다.
모든 것이 선지식이다. 배우려고 하는 사람에게는 둘레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선지식이다. 좋은 일은 좋은 일대로 언짢으면 언짢은대로 우리의 삶에 교훈을
주고 있다. 좋은 일은 본받고 언짢은 일을 통해서도 우리는 공부할 수 있어야
한다. 이 세상을 고해라고 하지 않은가. 고통의 바다라고 사바세계가 바로 그 뜻
이다. 우리가 이 고해의 세상 사바세계를 살아가면서 모든 일이 순조롭게 풀리
기만 바랄 수는 없다. 어려운 일이 생기기 마련이다. 어떤 집안을 놓고 보더라도
밝은 면도 있고 어두운 면도 있다.
삶에 곤란이 없으면 자만심이 넘치게 된다. 잘난 체하고 남의 어려운 사정을
모르게 된다. 마음이 사치해지는 것이다. 그래서 보왕삼매론은 ‘세상살이에 곤
란 없기를 바라지 말라’고 일깨우고 있다. 또한 ‘근심과 곤란으로써 세상을
살아가라’고 말한다.
자신의 근심과 걱정을 밖에서 오는 귀찮은 것으로 생각하지 말아야 한다. 그
것을 삶의 과정으로 생각해야 한다. 자신에게 어떤 걱정과 근심거리가 있다면
회피해선 안 된다. 그걸 딛고 일어서야 한다. 어떤 의미가 잇는가. 왜 이런 불행
이 닥치는가. 이것을 안으로 살피고 딛고 일어서야 한다.
저마다 이 세상에 자기 짐을 지고 나온다. 그 짐마다 무게가 다르다. 누구든지
이 세상에 나온 사람들은 남들이 넘겨볼 수 없는 짐을 지고 있다. 그것이 그 인
생이다. 따라서 세상살이에 어려움이 있다고 달아나서는 안 된다. 그 어려움을
통해서 그걸 딛고 일어서는 새로운 창의력을, 의지력을 키우라는 우주의 소식으
로 받아들여야 한다.
성인이 말씀하기를 ‘장애 속에서 해탈을 얻으라’고 했다. 장애가 없는 건
어디에도 없다. 한 평생 세상을 살다 보면 무수한 장애물이 있다. 지금가지 우리
가 이 자리에 오면서 얼마나 많은 장애물을 헤치고 왔는가. 그러므로 인생이란
일종의 장애물 경주이다. 아직 끝나지 않은 경주이다.
해탈이란 무엇인가.그런 장애물을 넘어서 안팎으로 자유로워진 상태, 안팎으로
홀가분해진 상태, 이것을 해탈이라 부른다. 장애라는 것은 해탈에 이르는 디딤돌
이다. 발판이다. 그런 장애가 없으면 해탈도 있을 수가 없다.
장애 없길 바라선 안 된다. 장애는 해탈의 길로 이어진 길목이다. 그러므로 장
애를 거부하지 말고 그걸 받아들이라고 옛 성인은 말하고 있다. 장애 없이는 해
탈이 불가능하다.
또 성인은 말씀하기를 ‘작은 이익으로써 부자가 되라’고 하셨다. 작은 것으
로 만족할 줄 알아야 한다는 뜻이다. 행복의 비결은 결코 크고 많은 데 있지 않
다. 그러나 인간의 섦은 경제만이 전부가 아니다. 우리는 지금 너무 그런 일에만
치우치고 있다.
오늘날 경제가 어려운 것은 일찍이 우리가 큰 그릇은 만들어 놓지 않고 자꾸
욕심껏 담기만 하려고 한 결과이다. 이 불황은 우리들 마음이 그만큼 빈약하다
는 증거이다. 그릇을 키우려면 눈앞의 이익에 매달리지 말고 마음을 닦아야 한
다. 개체를 넘어서 전체를 생각해야 한다. 소욕지족, 적은 것으로써 만족할 줄
알아야 한다. 그래야 넉넉해 진다.
저마다 자기 나름대로의 꽃이 있다. 다 꽃씨를 지니고 있다. 그러나 옛 성인이
말했듯이, 역경을 이겨내지 못하면 그 꽃을 피워낼 수가 없다. 하나의 씨앗이 움
트기 위해서는 흙 속에 묻혀서 참고 견디어 내는 인내가 필요하다. 그래서 사바
세계, 참고 견디는 세계라는 것이다.
여기에 감추어진 삶의 묘미가 있다.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이 사바세계라는
사실을 다시 한번 기억하기 바란다. 극락도 지옥도 아닌 사바세계, 참고 견딜 만
한 세상, 여기에 삶의 묘미가 있다.
어떤 어려움에 부딪쳤을 때 그것을 전체로 생각해선 안 된다. 막다른 길이라
고 생각해선 안 된다. 우리 전생애의 과정에서 볼 때 그것은 통과해야 할 하나
의 관문이다. 한생애를 두고 그건 관문이 한두개가 있는 것이 아니다. 몇 고비가
잇다. 그런 관문을 하나씩 통과할 때마다 정신적인 연륜이 쌓여가는 것이다. 육
체적인 나이만 먹는 것이 아니고 그런 어려운 관문을 거칠 때마다 정신적인 나
이가 쌓여간다. 그것을 통해 새로운 눈이 열린다. 그래야 인간이 성숙해진다.
눈앞의 일만 갖고 너무 이해관계를 따져선 안 된다. 전생애의 과정을 통해서
늘 객관적으로 살필 수 있어야 한다. 우리가 고뇌에서 벗어나려면 여러 가지 방
법이 있겠지만 우선 만족할 줄 알아야 한다. 작은 것을 갖고도 만족할 줄 알아
야 한다.
인간의 행복은 큰 데 있지 않다. 지극히 사소하고, 일상적인, 조그만 데 있다.
아침 햇살에 빛나는 자작나무의 잎에도 행복은 깃들어 있고, 벼랑 위에 피어 있
는 한 무더기 진달래 꽃을 통해서도 하루의 일용할 정신적인 양식을 얻을 수 있
다. 지극히 사소하고 일상적인 것 속에 행복의 씨앗이 들어 있다. 빈 마음으로
그걸 느낄 수 있어야 한다.
우리는 크고 많은 것에 정신 파느라고 소중한 것을 놓치고 있다. 그동안 우리
는 너무 잘 살려고만 했기 때문에 작은 것을 갖고는 만족할 줄 모른다. 많이 가
진 사람은 많이 가진 대로, 적게 가진 사람은 적게 가진 대로 만족할 줄을 모른
다.
고뇌에서 벗어나고자 한다면 먼저 만족할 줄 알아야 한다. 만족할 줄 아는 것
은 부유하고 즐거우며 평온하다. 그런 사람은 맨땅 위에 누워 있을 지라도 지극
히 편안하고 즐겁다. 그러나 만족할 줄 모르는 사람은 설령 극락이나 천상에 있
을지라도 흡족하지 않을 것이다. 만족할 줄 아는 사람은 겉으론 가난한 듯하지
만 안으론 부유하다. 왜냐하면 자기 현실에 만족하고 있기 때문이다.
똑같은 상황 속에 살면서도 어떤 사람들은 만족할 줄 알고 어떤 사람들은 늘
불만을 갖는다. 만족할 줄 알면 긍정적으로 받아들여서 모든 게 긍정적으로 일
이 풀린다. 그러나 만족할 줄 모르고 거기서 다시 또 뭔가를 하려고 하면 자기
앞에 돌아온 몫까지도 걷어차 버린다.
하나가 필요할 때 하나로써 만족해야지 둘을 가지려 하지 말아야 한다. 그러
면 그 하나마저도 잃게 된다. 그건 허욕이다. 하나로써 만족할 수 있어야 한다.
행복은 그 하나 속에 있다. 둘을 얻게 되면 행복이 희석되어서 그 하나마저도
잃는다.
흔히 이렇게 말하면 그러다 언제 잘 살겠느냐고 하겠지만, 이런 어려운 시대
에는 만족하며 살아야 한다. 그래야 마음의 평화를 잃지 않는다.
차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다기를 많이 사용한다. 몇 해 전에 중국 대만에서 유
학하는 스님이 내가 작은 것을 좋아하는 줄 알고 조그마한 다기를 하나 사왔다.
‘선’이라고 음각이 되어 있는, 아주 작고 깜찍한 물건이었다. 다기는 크면 안
좋다. 손 안에 들어와야 한다.
나는 그것을 아주 좋아하면서 사람들에게도 자랑하고 많이 사용했다. 그 뒤에
내가 인도로 일본으로 다니다가 대만에 갔더니 육교 밑에서 잔뜩 놓고 팔고 있
었다. 그래서 선물하려고 몇 개 사고 다시 내 몫으로 부처 ‘불’자를 쓴 걸 구
했다.
그걸 가져와 내 거처에서 쓰는데 처음 하나 가졌을 때의 그 소중함, 그 살뜰
함이 사라져 버리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걸 다른 사람에게 주고 나니까 그 마음
이 다시 회복되었다. 하나가 필요할 대는 하나만 가져야지 둘을 갖게 되면 그
하나마저 잃게 된다.
노자는 도덕경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죄악 중에서도 탐욕보다 더 큰 죄악은 없고, 재앙 중에서도 만족할 줄 모르
는 것보다 더 큰 재앙이 없으며, 허물 중에서도 욕망을 다 채우려는 것보다 더
큰 허물은 없다.’
죄악이라는 게 무엇인가? 분수에 지나친 욕망인 탐욕에서 온다. 그래서 경전
에서는 탐욕이 생사의 근본이라는 것이다. 탐욕은 자기 분수 밖의 욕심이다.
노자는 뒤이어 말한다.
‘따라서 넉넉할 줄 알면 항상 풍족하다.’
결국은 만족하면서 살라는 것이다.
이 세상에서 영원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어떤 어려운 일도, 어떤 즐거운 일도
영원하지 않다. 모두 한때이다. 한 생애를 통해서 어려움만 지속된다면 누가 감
내하겠는가. 다 도중에 하차하고 말 것이다. 모든 것이 한때이다. 좋은 일도 그
렇다. 좋은 일도 늘 지속되지 않는다. 그러면 사람이 오만해진다.
어려운 때일수록 낙천적인 인생관을 가져야 한다. 덜 가지고도 더 많이 존재
할 수 있어야 한다. 이전에는 무심히 관심갖지 않던 인간 관계도 더욱 살뜰히
챙겨야 한다. 더 검소하고 작은 것으로써 기쁨을 느껴야 한다.
우리 인생에서 참으로 소중한 것은 어떤 사회적인 지위나 신분, 소유물이 아
니다. 우리들 자신이 누구인가를 아는 일이다.
나는 누구인가. 스스로 물어야 한다. 이런 어려운 시기를 당했을 때 도대체 나
는 누구지, 나는 누구인가 스스로 물어야 한다. 우리가 지니고 있는 직위나 돈이
나 재능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것으로써 우리가 어떤 일을 하며 어떻게 살고
있는가에 따라서 삶의 가치가 결정된다.
우리가 만족할 줄 모르고 마음이 불안하다면 그것은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과
조화를 이루지 못하기 때문이다. 내 마음이 불안하고 늘 갈등 상태에서 만족할
줄 모른다면 그것은 내가 살고 있는 이 세상과 조화를 이루지 못하기 때문에 그
렇다. 우리는 우리 주위에 있는 모든 것의 한 부분이다.
저마다 독립된 개체가 아니다. 전체의 한 부분이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세상의 한 부분이다. 세상이란 말과 사회란 말은 추상적인 용어이다. 구체적으로
살고 있는 개개인이 구체적인 사회이고 현실이다. 우리는 보이든 보이지 않든,
혈연이든 혈연이 아니든 관계 속에서 서로 얽히고 설켜서 이루어진 것이다. 그
것이 우리의 존재이다.
한 마음이 청정하면 온 법계가 청정해진다는 교훈이 있다. 한 송이 꽃이 피어
나면 수천수만 송이의 꽃이 피어난다는 가르침이 있다. 이것을 추상적이라고 생
각하지 말아야 한다. 집안에서 그 집 어머니나 아버지 또는 자식, 한 사람의 마
음이 지극히 청정하면 메아리가 되어 모든 식구가 변화한다.
그러나 가정의 중심인 어머니의 마음이 불안하다고 해보라. 그냥 아버지한테
불안이 전달되고, 바로 자식들에게도 옮겨진다. 왜냐하면 우리는 서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한 뿌리에서 나누어진 가지들이기 때문이다. 한 뿌리에서 나누어
진 가지들이기 때문이다. 어느 한쪽 가지에 이상이 생기면 나무 전체에 이상이
생긴다.
4
지혜로운 삶의 선택
며칠 동안 비가 내리고 안개가 숲을 가리더니 수목들에 물기가 배었다.
겨울 동안 소식이 묘연하던 다람쥐가 엊그제부터
양지쪽 헌식돌 곁에 나와 내 공양 시간을 기다리고 있다.
지난해 늦가을 무렵까지 윤기가 흐르던 털이 겨울을 견디느라 그랬음 인지
까칠해졌다.
겨우내 들을 수 없던 산비둘기 소리가 다시 구우구우 울기 시작했고,
밤으로는 앞산에서 고라니 우는 소리가 골짜기에 메아리치고 있다.
나는 한밤중의 잠에서 자주 깨어 일어난다. 이런 걸 가리켜서 사람들은
봄의 시작이라고 한다. -법정 스님 수상짐 <서 있는 사람들>중에서
여러 해 동안 법정 스님을 뵙고 그분과 대화를 나누며 느낀 것은 그분이 가진
정신 세계가 저 티벳인들이나 아메리카 인디언의 지혜에 매우 근접하다는 것이
다. 그분의 얼굴 모습도 내가 여행중에 만난 티벳인과 인디언들을 많이 닮았을
뿐 아니라. 그 얼굴에서 느껴지는 정신이랄까 존재 같은 것이 나로 하여금 그
사람들을 떠올리게 한다.
내가 몇 해 전 시애틀 추장을 비롯해 여러 인디언들의 연설문을 모은 ‘나는
왜 너가 아니고 나인가’를 출간했을 때도 가장 많이 그 책에 대해 언급하신 이
는 스님이셨다.
아마도 스님이 늘상 강조하고 스스로 실천해 오신 것은 무소유한 삶의 지혜로
움일 것이다. 물건이든 일이든 불필요한 것들로부터 가능한 한 멀어지라는 것,
그 대신 자기 자신의 존재와 한 걸음이라도 가까워지라는 것, 하나가 필요할 때
하나만 가져야지 둘을 가지면 그 하나마저도 잃게 된다는 것......
북인도 라다크 지방에 사는 티벳 노인 칼장 뙤마는 말한다.
‘나는 바깥 세상에 사는 사람들이 식탁과 의자와 카펫을 갖고 편안하게 산다
고 들었다. 쌀과 설탕 등 행복에 필요한 모든 걸 갖고 있다고 들었다. 나는 짬파
(보리떡)와 툭파(죽)밖에는 먹을 게 없다. 하지만 나는 행복하다. 사실 나는 이가
다 빠져 많이 먹을 수도 없다 보다시피 당신들은 좋은 옷을 입었지만 내 옷은
누더기다. 그런데도 바깥 세상에는 많은 불행이 있다고 나는 들었다.’
서양 기자가 그 불행의 이유에 대해 묻자 가난하되 지혜로움을 잃지 않은 뙤
마 현인은 말한다.
‘아마도 당신들이 갖고 있는 좋은 옥과 가구와 재산들이 너무 많은 시간을
빼앗아 버려 당신들은 기도하고 명상할 시간이 없기 때문인지 모르겠다. 아마도
당신들이 가진 재산이 당신들에게 주는 것보다도 당신들로부터 빼앗는 것이 더
많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그런가 하면 오타와 족 인디언 검은 새(블랙 버드)는 말한다.
‘나는 무엇보다 나 자신과 만나고 싶다. 우리 인디언들은 삶에서 다른 것을
추구하지 않았다. 더 많은 물건, 더 큰 집은 우리가 원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런
것들은 겨울 햇살 속에 날아다니는 마른 잎과 같은 것이다.’
검은 새는 도 인디언들의 생활 방식에 대해 ‘우리는 매순간을 충실하게 살고
자 노력했으며, 자연 속에서 우리 자신을 돌아보는 일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하
루라도 우리가 들판의 한적한 곳을 거닐면서 마음을 침묵과 빛으로 채우지 않으
면 우리는 갈증난 코요테와 같은 심정이었다’고 고백한다.
굳이 티벳 현자와 인디언 노인의 말을 들추지 않더라도 인간의 고귀함과 삶의
진정성이 어디에 있는가를 우리는 감지한다. 그런데 삶의 여정에서 어느샌가 본
질과는 거리가 먼 것들이 우리의 삶을 채워 버렸다. 그리하여 이제는 그것들이
우리의 삶을 지탱하는 매우 필수적인 것이라고까지 여기게 되었다.
지난 십여 년 동안 나는 많은 영적 스승을 접하고 여러 명상센터를 순례했다.
그 도중에서 내가 깨달을 것은, 참된 스승은 우리에게 지식이든 에고든 무엇을
더 보태 주는 것이 아니라 현재 갖고 있는 것마저도 최대한으로 버리라고 요구
한다는 점이다.
어떤 것에도 스스로 소유당하지 말며, 자신의 삶을 살되 삶에 휘둘리지 말라
도 그 스승들은 일깨운다.
더 나아가 그 스승들은 스스로 본보기가 되어 신발 하나, 숟가락 하나까지도
최소한의 물질 속에서 최대한의 자기 존재를 누린다. 지혜로운 삶의 선택이 무
엇인가를 우리는 그들로부터 속속들이 배울 수 있다. 그들은 하찮은 소유물에
소유당하지 않는 기상, 삶을 천박하고 복잡하게 만들지 않는 기품을 간직하고
있다.
무소유한 삶, 자신을 늘 되짚어 보고 자연의 질서에 따르는 삶, 고구마 하나까
지도 오두막 근처에 내려오는 산짐승들과 나눠 먹는 삶, 그리고 저녁이면 문득
등불을 마주하고 앉는 여유로운 삶, 그것이 내가 지금가지 스님으로부터 배운
것이다.
오늘 내가 머리 깎고 출가해서 스님의 제자가 되지도 않았고, 그분으로부터
어떤 이름을 받은 것도 아니지만, 나 스스로 그분의 속가 제자인 양 그 삶을 바
라보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엮은이
지혜로운 삶의 선택
자연은 모든 생명의 원천이고 사람이 기댈 영원한 품이다. 또 자연은 잘못된
현대 문명의 유일한 해독제이다. 하늘과 구름, 별과 이슬과 바람, 흙과 강물, 햇
살과 바다, 나무와 짐승과 새들, 길섶에 피어 있는 하잘 것 없는 풀꽃이라도 그
것은 우주적인 생명의 신비와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다.
건성으로 보지 말고 유심히 바라보라. 그러면 거기에서 자연이 지니고 있는,
생명이 지니고 있는 신비성과 아름다움을 캐낼 수가 있다.
모든 것이 다 필요한 존재이다. 이 우주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다 필요한
것이다. 어떤 생물이 됐든 필요하기 때문에 생겨났다. 그런데 그것이 귀찮다고
해서 농약으로, 강한 살충제로 죽여 보라. 그 생물만 없어지는 게 아니고 그것이
연쇄반응을 일으켜서 우리에게 진짜 없어서는 안 될 이로운 것까지 모두 사라진
다.
오늘 이 생태계의 이변과 환경문제, 또 지구 온난화 문제, 이것이 다 어디에서
왔는가. 우리가 전체적인 흐름과 조화를 모르고 어떤 부분적인 것에 갇혀서 그
것만 지나치게 소비하고 낭비하고 혹사시키다 보니까 지구 자체가 인간들을 감
당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래서 여기저기 털어내고 재채기도 하느라고 지구는 지
진도 일으켰다가 또 사방에 불도 일으키는 것이다. 지구 표면에 사는 인간들이
마치 물것처럼 하도 귀찮게 구니까 털어내느라고 지구가 몸살을 앓고 있는 것이
다.
지구가 무엇인가. 우리가 기대고 있는 생명의 바탕이다. 우리만 살고 지나갈
생명의 장소가 아니다. 영원히 존속되어야 할 생명의 터전이다. 그런데 20세기
후반에 들어와 우리가 너무도 지구를 함부로 대했기 때문에 그 보상으로써 지금
과 같은 여러 재난과 이변이 오는 것이다.
세상을 돌아보면 인간인 내 자신이 우울하고 착잡해진다. 도대체 인간이란 무
엇인가. 인간이 짐승보다 나을 게 어디 있는가. 삶의 가치를 어디다 두고 살아야
할 것인가. 일찍이 세상을 떠난 우리의 조상들이 오늘의 우리를 보고 주저없이
당신네 후손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이런 물음을 스스로 던지게 된다.
흔히 우리가 짐승만도 못하다고 이야기한다. 그러나 짐승의 입장에서 보면 억
울한 일이다. 짐승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인간이 지금 이렇게 타락하고 있지
않은가. 새삼스레 인간 존재에 대한 물음이 제기되지 않을 수 없다. 일찍이 흙을
가까이 하고 살던 농경사회에서는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일들이 일어나고
있다.
미국의 철학자 마르쿠제는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를 풍요로운 감옥에 비유
하고 있다. 감옥 속에 냉장고와 세탁기가 갖춰져 있고 텔레비전 수상기와 오디
오가 놓여 있다. 그 속에서 살고 있는 우리들은 자신이 그 감옥에 갇혀 있다는
사실조차 까맣게 모르고 있다는 것이다.
이런 풍요로운 감옥에서 벗어나려면 어떤 것이 진정한 인간이고, 사람은 무엇
을 위해 살아야 하며, 또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지 근원적인 물음 앞에 마주서
야 한다. 그런 물음과 대면하지 않는다면 진정한 인간의 삶이라고 할 수 없다.
항상 자신의 삶이 어디로 가고 있고, 무엇을 향해 가고 있는가 물을 수 있어야
한다.
사람은 무엇보다도 사람답게 떳떳하게 살아야 한다. 사람이 사람답게 살기 위
해선 첫째, 자기 자신에 대한 각성이 전제되어야 한다. 자기 자신의 각성, 자기
존재에 대한 각성이 먼저 이루어져야 한다. 그 각성을 통해서 비로소 마음이 열
린다.
마음이 열리지 않으면 이미 열려져 있는 세상을 내가 받아들일 수 없다. 다시
말해 세상과 내가 하나를 이룰 수 없다. 세상과 내가 하나를 이루지 못하면 세
상에서 살고 있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사는 것이 아니다. 세상이라는 파도 위에
서 겉도는 것에 불과하다. 마음이 열려야만 세상과 내가 하나를 이룰 수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기 바란다. 마음이 열려야만 평온과 안전을 이룰 수 있다.
나는 누구인가. 스스로 물으라. 나는 누구인가. 자신의 속얼굴이 드러나 보일
때까지 묻고 물어야 한다. 건성으로 묻지 말고 목소리 속의 목소리로 귀 속의
귀에 대고 간절하게 물어야 한다. 해답은 그 물음 속에 들어 있다. 그러나 묻지
않고는 그 해답을 이끌어낼 수 없다. 나는 누구인가. 거듭거듭 물어야 한다.
모든 것은 세월의 풍상에 씻겨 시들고 허물어져 간다. 거죽은 늘 변하기 마련
이다. 변하지 않는 것은 없다. 불교 용어로는 ‘무상하다’는 말이 있다. 모든
것은 무상하고 덧없다. 항상하지 않고 영원하지 않다. 늘 변한다는 것이다. 이것
이 우리의 실상이다.
만일 이 세상이 잔뜩 굳어 있어서 변함이 없다면 숨이 막힐 것이다. 변하기
때문에 환자가 건강을 되찾을 수 있는 것이고, 오만한 사람이 겸손해질 수도 있
는 것이다. 어두운 면이 밝아질 수도 있는 것이다.
문제는 어떻게 변해 가느냐에 달려 있다. 자신이 중심을 들여다봐야 한다. 중
심은 늘 새롭다. 거죽에 살지않고 중심에 사는 사람은 어떤 세월 속에서도 좌절
하거나 허물어지지 않는다.
나는 누구인가. 이 원초적인 물음을 통해서 늘 중심에 머물러야 한다. 그럼으
로써 자기자신에 대한 각성을 추구해야 한다.
사람이 또한 사람답게 살기 위해선 나눠 가질 줄 알아야 한다. 이웃은 나와
무관한, 전혀 인연이 없는 타인이 아니다. 그들은 내 분신이다. 또 하니의 몸이
다. 왜냐하면 한 뿌리에서, 생명의 커다란 한 뿌리에서 나누어진 가지가 바로 이
웃이기 때문이다. 내 자신은 그 한가지에 지나지 않는다. 내 이웃이란 또다른 가
지이다. 나눠 가짐으로써 내 인간의 영역이 그만큼 확산된다.
열린 눈으로 사물을 대해야 한다. 모든 일은 내가 공들여 뿌려서 거두는 것이
지 거저 되는 일은 없다. 이것은 우리들이 일상적인 일을 통해서 수시로 경험하
는 일이다. 이 세상에 저절로 되는 일은 없다. 내가 뿌려서 내가 거두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우주의 질서이다. 이런 우주의 질서에 귀를 기울일 수 있어야 한다.
내가 며칠 전에 겪은 일이다. 나는 다른 일도 그렇지만 농사일에 서툴다. 채마
밭이 있어서 이것저것 심었는데 밖에 나들이갔다 돌아왔더니 봄에 뿌린 씨앗들
이 다들 시원치가 않고 고추와 케일과 해바라기, 이 세 가지만 아주 건강하게
자라 있었다.
묵은 밭이라 풀매기도 번거롭고 해서 암스텔담 갔을 때 고흐 미술관에서 구해
온 해바라기 씨앗을 그곳에 뿌려 놓았었다. 그래서 요즘 해바라기가 가득 피어
있어서 풍경이 볼 만하게 되었다.
고추은 처음 장에서 모종을 갖다 심었는데 갑자기 냉해가 닥쳐 얼어 죽었다.
내가 사는 곳이 해발 한 8백 미터쯤 되는 것이라서 그렇다. 그래서 다시 스무
포기 정도를 사다 심었다.
그런데 며칠 전 고추를 따면서 새삼 느낀 점이 있다. 내가 고추를 돌본 것은
단지 모종을 두 번 심어 주었고 풀 조금 매주었고, 지난 여름 몹시 가물었을 때
장에서 비닐 호수를 사다가 물 준 일밖에 없었다. 그리고 모른 체했는데 고추밭
에 가보니까 고추가 그토록 많이 열려 있었다. 스무 포기에서 한 자루가 넘는
고추를 따냈다.
그래서 고추 보기가 참 부끄러웠다. 전혀 손질도 안해 주고 모른체했는데, 단
지 내가 해준 거라곤 가뭄에 물 좀 주었고 김 좀 매주었을 뿐인데 이렇게 많은
열매가 주렁주렁 매달린 것이다. 이것이 흙의 은혜다. 또 생명의 신비이다.
농경사회에선 이런 일들을 수시로 경험했기 때문에 자연이 질서와 도리를 삶
의 원리로 받아들였다. 그러나 우리는 시장에 가서 편리하게 사다 먹으니까 생
명의 신비와 자연이 순리로부터 자꾸만 멀어져간다.
사람이 사람답게 살기 위해선 또한, 작은 것과 적은 것으로도 만족할 줄 알아
야 한다. 작은 것과 적은 것이 귀하고 소중하고 아름다운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모두가 크고 많은 것만을 추구한다. 그러다 보니까 늘 갈증 상
태에 놓여있다. 소유물은 우리 가 그것을 소유하는 이상으로 우리 자신을 수유
해 버린다. 내가 무엇인가를 가졌을 때 그 물건에 의해 내가 가짐을 당하는 것
이다.
내가 고등학교 다닐 때의 일이다. 문화사 시간에 H.G.웰즈가 쓴 세계문화사에
관한 책을 세계사 선생님한테 들었다. 그런데 친구집에 갔더니 그 책이 있었다.
그때부터 그걸 갖고 싶어서 몇 번을 친구에게 부탁했다 . 그책을 나한테 팔으라
고. 친구는 그 책을 읽지도 않으면서 팔지 않는 것이었다. 나는 그것이 눈에 아
른거려 잠이 오지 않았다. 그러니까 세계문화사라는 내용보다도 책을 어떻게 하
면 가질 수 있을까 하는 것에 골몰한 것이다. 얼마 후에 헌책방에 가서 그걸 샀
는데 한 절반 읽다가 말아버렸다.
소유란 그런 것이다.
행복의 척도는 필요한 것을 얼마나 많이 갖고 있는가에 있지 않다. 불필요한
것으로부터 얼마나 벗어나 있는가에 있다. 홀가분한 마음, 여기에 행복의 척도가
있다. 남보다 적게 갖고 있으면서도 그 단순과 간소함 속에서 삶의 기쁨과 순수
성을 잃지 않는 사람이야말로 삶을 살 줄 아는 사람이라는 말을 거듭 새겨 두기
바란다.
내가 잘 아는 스님이 머무는 방에 가 보면 방석 하나 달랑 있고 죽비 있고 한
쪽 구석에 찻그릇 정도뿐이다. 그런 걸 볼 때마다 얼마나 넉넉한지 모른다. 그
방을 거쳐서 나오기만 해도 내 안에서 향기로운 바람이 일어나는 것 같다.
맑은 가난이나 청빈이라는 말은 이제 거의 들어볼 수 없게 되었다. 맑은 가난
은 인간의 고귀한 덕이다.
과잉 소비와 포식 사회가 인간을 병들게 한다. 우리는 얼마나 소비를 많이 하
는가.사실 소비자라는 말은 인간을 모독하는 말이다. 소비자란 말은 쓰레기를 만
드는 존재라는 뜻이다. 그것은 인간성을 모독하는 말이다.
무소유란 아무것도 갖지 않았다는 것이 아니다. 궁색한 빈털터리가 되는 것이
아니다. 무소유란 아무것도 갖지 않는 것이 아니라 불필요 한 것을 갖지 않는다
는 뜻이다. 무소유의 진정한 의미를 이해할 때 우리는 보다 홀가분한 삶을 이룰
수가 있다.
우리가 선택한 맑은 가난은 넘치는 부보다 훨씬 값지고 고귀한 것이다. 이것
은 소극적인 생활 태도가 아니라 지혜로운 삶의 선택이다.
사람이 사람답게 살기 위해선 무엇보다 자연의 도리를 삶의 원리로 삼아야 한
다. 자연의 도리와 질서를 우리 삶의 질서로 삼아야 한다. 우리 자신이 자연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자연의 질서를 거스르는 것이 얼마나 무서운 죄악인가를 알아야 한다. 나는
가끔 차를 타고 지나가다가 골프장을 만들기 위해 산을 허무는 걸 보면 내 팔과
몸이, 어느 한 부분이 달아나는 것처럼 아프다. 자연의 신음소리를 그대로 내가
듣는다. 몇 사람이 즐기기 위해서 자연을 그렇게 허물고 있다.
우리들 자신이 자연의 일부라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인간은 생태계적인 순
환에서 벗어날 수 없다. 우리들 인간의 행위가 곧 자연계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
치게 되고, 그 행위는 결과로서 우리 곁으로 되돌아온다. 보라. 식수 문제, 공기,
오염된 음식 문제, 이 모든 것이 인과관계이다.
우리가 뿌린 씨가 그 열매로서 우리에게 온 것이다. 그것이 우주의 메아리이
다.
오늘의 운명은 자연이 낳은 이자만을도 모자라서 자연이 축적에 놓은 자본까
지 갉아먹고 있다. 더 많이 만들고 더 많이 소비하는 산업 구조가 문제이다. 자
원은 한정되어 있는데 언제까지 더 많이 만들고 더 많이 소비할 것인가.
농경사회에서는 쓰리게가 없었다. 땅에서 나온 건 다시 땅으로 되돌아가는 비
료의 기능을 하게 되어 있다. 그런데 산업사회에 와서 화학제품과 공업제품이
땅과 지하수를 더럽히고 있다. 이것들은 땅에 들ㅇ가도 삭질 않는다.
우리가 보다 인간다운 삶을 이루려면 될 수 있는 한 생활용품을 적게 사용하
면서 간소하고, 단순하게 살아야 한다. 그것이 진정한 사람의 삶이다.
내 개인적인 희망이 있다면, 어떻게 하면 보다 단순하고 간소한 삶을 이룰 것
인가 하는 것이다. 단순하고 간소한 삶을 통해서 내게 주어진 본질적인 사명을
누릴 수 있고, 안팎으로 자유로워질 수가 있기 때문이다.
내가 단순하고 간소하게 살아가는 데 도움을 주는 이들은 좋은 친구이다. 그
러나 내가 단순하고 간소하게 살려고 하는데 자구만 뭔가 갖다 주는 사람은 나
에겐 달갑지 않은 친구이다.
내가 아무것도 갖이 않았을 때 온 세상을 차지할 수 있다. 우리가 무엇인가를
가졌다고 할 때 크건 작건 그것의 노예가 된 것이다. 그것으로부터 소유를 당하
는 것이다. 그러므로 부자유해진다.
꽃이나 새는 자기 자신을 남과 비교하지 않는다. 저마다 자기 특성을 마음껏
드러내면서 우주적인 조화를 이루고 있다. 비교는 시샘과 열등감을 낳는다.
남과 비교하지 않고 자기 자신을 삶에 충실할 때, 그런 자기 자신과 함께 순
수하게 존재할 수 있다. 사람마다 자기 그릇이 있고 몫이 있다. 그 그릇에 그 몫
을 채우는 것으로 자족해야 한다. 스스로 만족 할 줄 알아야 한다. 내 그릇과 내
몫을 알아야 하는데 그걸 모르고 남의 몫을, 남의 그릇을 자꾸 넘겨다 보려고
한다.
소유를 제한하고 자제하는 것이 우리 정신을 보다 풍요롭게 한다. 그리고 우
리의 생활 환경을 덜 훼손시키는 결과를 가져온다.
거듭 말하지만 무엇보다도 단순한 삶이 중요하다. 그리고 우리들 자신을 거듭
거듭 안으로 살펴봐야 한다.
내가 지금 순간순간 살고 있는 이 일이 인간의 삶인가, 지금 나답게 살고 있
는가, 스스로 점검을 해야 한다. 무엇이 되어야 하고 무엇을 이룰 것인가를 스스
로 물으면서 자신의 삶을 만들어 가지 않으면 안 된다.
누가 내 인생을 만들어 주는가. 내가 내 인생을 만들어 갈 뿐이다. 그런 의미
에서 인간은 고독한 존재이다 저마다 자기 그림자를 거느리고 휘적휘적 지평선
위를 걸어가고 있지 않은가. 자기를 만들기 위해서.
단순한 삶이 마음을 평온하게 하고 근원적인 눈을 뜨게 하다. 단순한 삶을 이
루려면 투철한 자기 억제와 자기 질서를 가져야 한다. 보지 않아도 좋을 것은
보지 말고, 듣지 않아도 좋을 것은 듣지 말고, 읽지 않아도 좋을 것은 읽지 말
며, 먹지 않아도 좋을 음식은 먹지 말아야 한다. 그래서 될 수 있는 한 가려 가
면서 적게 보고, 적게 듣고, 적게 입고, 적게 먹어야 한다. 그래야 인간이 성숙해
지고 승화될 수 있다.
보다 적은 것이 보다 귀한 것이고, 결과적으로도 넉넉한 것이다. 거듭 말하지
만 이런 생활 태도를 소극적인 생활 태도라고 잘못 알아선 안 된다. 그것은 지
혜로운 삶의 선택이다. 행복의 조건은 결코 크거나 많거나 거창한 데 있지 않다.
작은 일을 갖고도 우리는 얼마든지 행복해질 수 있다. 별이 빛나는 밤하늘을 보
면서도 행복해질 수 있고, 저녁 노을을 보면서도 하루의 행복을 누릴 수 있다.
우리가 너무 거창한 데서, 큰 데서, 야단스러운 데서 행복을 찾으려고 하기 때
문에 우리에게 주어진 그런 행복도 놓치고 만다. 행복의 조건은 지극히 일상적
이고 작은 일 속에 있다. 우리가 그걸 찾아내면 되는 것이다. 조촐한 삶과 드높
은 영혼을 지니고 자기 자신답게 살 줄 안다면 우리는 어떤 상황에서라도 행복
할 수 있다.
사회에서 흔히 말하는 무한경쟁을 치르지 않고서도, 초인류가 되지 않고서도,
우리는 얼마든지 잘 살 수 있다. ‘풍요로운 감옥’에서 벗어나려면 무엇보다도
정신이 늘 깨어 있어야 한다. 자신의 삶에 대한 투철한 각성 없이는 그 감옥에
서 벗어날 기약이 없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누구인가. 자신이 지금 깨어 있는
지 잠들어 있는지 수시로 물어야 한다.
인도의 시인 까비르는 이렇게 노래한다.
'물 속의 물고기가 목말라 한다는 말을 듣고 나는 웃는다.'
물 속에 사는 물고기가 목말라 한다는 것이다. 그 소리를 듣고 웃는다는 것이
다.
'물 속의 물고기가 목말라 한다는 말을 듣고 나는 웃는다.
진리는 바로 그대 안에 있다.
그러나 그대 자신은 이것을 알지 못한 채
이 숲에서 저 숲으로 쉴새없이 헤매고 있다.
여기, 바로 지금, 이 자리에 있는 진리를 보라.
그대가 원하는 곳이면 어디든지 가보라.
이 도시로 저 산속으로.
그러나 그대 영혼을 찾지 못한다면
세상은 여전히 환상에 지나지 않으리.'
사람의 본성은 더 말할 것도 없이 본래부터 맑고 향기롭다. 본래 청정한 우리
마음을 깨닫고, 저마다 지닌 귀하고 소중한 그 덕성의 씨앗을 한 송이 꽃으로
피워야 할 것이다.
까비르는 말한다. 그대가 원하는 곳이면 어디든지 가보라고. 이 도시로 저 산
속으로. 그러나 그대 영혼을 찾지 못한다면 세상은 여전히 환상에 지나지 않으
리라.
저마다 의미를 채우는 삶이 되어야 한다. 의미를 하나하나 채워 나가지 않으
면 어떤 화려한 인생이라 할지라도 마침내 빈 껍질로 남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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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의 조건
가끔은 자기가 살던 집을 떠나 볼 일이다.
자신의 삶을 마치고 떠나간 후의 그 빈자리가 어떤 것이라는 것을
실감할 수 있을 것이다.
암자에 돌아오니 둘레에 온통 진달래 꽃이 만발이었다.
군불을 지펴 놓고 닫겻던 창문을 활짝 열어, 먼지를 털고 닦아냈다.
이끼낀 우물을 치고 마당에 비질도 했다.
표정과 생기를 잃었던 집이 부스스 소생하기 시작했다.
사람이 살아야 집도 함께 숨을 쉬면서 그 구실을 하는 모양이다.
-법정 스님 수상집<텅 빈 충만> 중에서
언젠가 네팔의 히말라야에서 가져온 작은 등잔 하나를 법정 스님게 선물한 적
이 있다. 그것을 드리면서도 망설였던 기억이 난다. 등잔이 보잘 것 없어서가 아
니었다. 그 단순한 곡선과 소박한 모양에 누구나 갖고 싶어하는 히말라야 등잔
이지만, 스님의 초소에 그것이 번잡한 물건이 되지나 않을까 염려스러웠기 때문
이다.
스님은 어느 자리에선가 '단순하고 간소한 생활에 보탬이 되어 주는 사람은
나의 벗이 될 수 있지만, 무엇을 자꾸만 갖다 주어 내 단순과 간소함을 깨는 사
람은 벗이라 칭할 수 없다' 고 말씀하신 적이 있다. 실로 이 시대를 사는 누구에
게서도 들어 보기 어려운 소중한 발언이다.
스님은 이 땅에 살면서도 저기세와 수도세를 내지 않으신다. 전기와 수도가
아예 들어오지 않는 곳, '문패도 번지수도 없는 곳'에서 거의 자급자족하며 사시
기 때문이다. 그런 가운데 찻그릇이 하나만 늘어도, 책이 몇 권만 쌓여도 가진
것이 너무 많다고 말씀하신다. 존재의 순수성에 때가 묻는 걸 원치 않으시는 것
이다.
한번은 말씀 도중에 카톨릭 베네딕토 기숙사의 규칙을 예로 드신적이 있다.
어느 수도원에 가보니까 그곳에서는 일주일에 한 번씩인가 보름에 한 번씩인가
자기가 갖고 있는 사물을 다 공개하더라는 것이었다. 수도자로서 진짜 갖고 있
어야 할 것인지 아닌지를 스스로 판단해서 정리정돈하라는 의미의 규칙이었다.
스님은 그것이 참으로 좋은 규칙이라고 하셨다.
등잔을 드리고 나서 두어 달 뒤, 스님은 문득 그 등잔에 대한 얘기를 꺼내셨
다. 밤에 그것을 켜놓고 바라보고 있으니 히말라야 산중에 와 있는 듯한 느낌이
들더라고. 그 말씀을 듣고서야 내 염려했던 마음이 걷힐 수 있었다.
더불어 내가 드린 네팔 등잔에 대한 화답으로 스님은 흙으로 구워만든 독특한
등잔 하나를 내게 선물하셨다. 에스키모의 짐처럼 생긴 그 등잔은 안에다 촛불
이나 등불을 켤 수 있고 위쪽에 둥근 구멍이 뚫려 있어서 불을 켜면 천장에 보
름달이 떠오르는 미학이 담겨 있었다. 나 역시 발으로는 전깃불을 소등하고 지
내는 습관이 붙어서 그 등잔은 내 방에 전에 없는 운치를 더해 주었다.
우리는 이제 갖지 못한 것보다, 이미 갖고 있는 것 때문에 불편해졌다. 그럼으
로써 존재 자체의 자유자재함을 잃었다. 인간의 혼을 갖고 태어나서는 전기와
전화, 가전제품 같은 하찮은 도구에 소유당해 버렸다. 그럴수록 ‘텅 빈 충만’
은 느낄 수 없게 되었다.
어느 수도원에는 이런 팻말이 붙어 있다고 하지 않은가.
‘침묵에 보탬이 되지 않는 말이면 하지 말라.’
그것을 스님이 늘상 쓰시는 말투로 바꾸면 이렇다.
‘단순하고 간소한 생활에 보탬이 되지 않는 물건이면 어떤 것이든 소유하지
말라.’
-엮은이-
행복의 조건
침묵은 인간의 기보적인 존재 양식이다. 태초에 침묵이 있었다. 언젠가 명동에
있는 카톨릭 여학생관에서 무슨 강론이 있었는데, 그때 나는 가벼운 기분으로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내가 만일 성서를 편찬했다면 태초에 말씀이 계시기 전
에 무거운 침묵이 있었노라고 기록했을 것이라고, 그러자 어떤 남자 신도가 불
쑥 일어나더니 그게 아니라며 태초에 말씀이 있어야 하다고 주장하는 것이었다.
인간의 혼을 울릴 수 있는 말씀이라면 무거운 침묵이 배경이 되어야 한다. 침
묵은 모든 삼라만상의 기본적인 존재 양식이다. 나무든 지승이든 사람이든 그
배경엔 늘 침묵이 있다. 침묵을 바탕으로 해서 거기서 움이 트고 잎이 피고 꽃
과 열매가 맺는다.
우리는 안에 있는 것을 늘 밖에서만 찾으려고 한다. 침묵은 밖에서만 있는 것
이 아니다. 어떤 특정한 시간이나 공간에 고여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늘 내
안에 잠재되어 있다.
따라서 밖으로 쳐다보려고만 해서는 안 된다. 안으로 들여다보는데서 침묵은
자기 정화의 , 또는 자기 질서의 지름길이다. 온갖 소음으로부터 우리 영혼을
지키려면 침묵의 의미를 몸에 익혀야 한다.
오늘날 우리에게 주어진 과제는 잡다한 지식의 홍수에서 어떻게 놓여날 수 있
을까 하는 것이다. 정보와 지식의 홍수에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 또 하나는 넘
쳐나는 물량을 어떻게 감당할 것인가. 그 다음은 삶의 가치를 어디에 둘 것인
가 하는 것이다.
정보와 지식은 선별해서 받아들여야 한다. 선별하지 않으면 정보와 지식의
소용돌이에 휘말린다. 그러다 보면 내가 내 인생을 스스로 살지 못하고 다른
의지에 의해 삶이 끌려다닌다는 데 문제가 있다.
가정에서나 사회에서나 또는 여행길에서도 우리들은 조용히 자기 내면을 관찰
할 기회가 별로 없다. 이것은 외부적인 소음 때문이다. 마침내는 거기에 중독
된 나머지 늘 새로운 정보와 지식을 요구하게 된다.
내가 산중에 있다가 밖에 나올 때 문득 느기는 것이 저질 문화의 홍수다. 저
질스럽게 쏟아져 나오는 문화의 홍수에 우리가 휘말려 있다는 것을 느끼게 된
다. 서울이고 지방이고 이것은 예외가 아니다.
이러한 저질 문화의 홍수에 맹종할 게 아니라 분명한 자기 질서를 갖고 그것
을 극복할 수 있어야 한다. 우리가 진정한 인간이 되려면 지금까지 받아들여온
것들을 맹목적으로 받아들일 게 아니라 참으로 받아들여야 할 것만을 가려서 받
아들여야 한다.
잡다한 정보와 지식의 소음에서 해방되려면 우선 침묵의 의미를 알아야 한다.
침묵의 의미를 알지 못하고는 그런 복잡한 얽힘에서 벗어날 길이 없다. 내 자
신의 침묵의 세계로 들어가 봐야 한다.
우리가 얼마나 일상적으로 불필요한 말을 많이 하는가. 의미없는 말을 하룻
동안 수없이 남발하고 있다. 친구를 만나서 얘기할 때 유익한 말보다는 하지
않아도 될 말들을 얼마나 많이 하는가.
말은 가능한 한 적게 해야 한다. 한 마디로 충분할 때는 두 마디를 피해야
한다. 인류 역사상 사람답게 살다간 사람들은 모두가 한결같이 침묵과 고독을
사랑한 사람들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시끄러운 세상을 우리들 자신마저 소음이
되서 시끄럽게 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무엇인가 열심히 찾고 있으나, 침묵 속에 머무는 사람들만이
그것을 발견한다. 말이 많은 사람은 누구를 막론하고, 그가 어떤 일을 하는 사
람이든간에 그 내부는 비어 있다.
말이 적은 사람, 침묵을 소중히 여길 줄 아는 사람에게 신뢰가 간다. 초면이
든 구면이든 말이 많은 사람한테는 신뢰가 가지 않는다. 나도 이제 가끔 많은
사람들을 만나게 되는데 말수가 적은 사람들한테는 오히려 내가 내 마음을 활짝
열어 보이고 싶어진다.
사실 인간과 인가니으 만남에서 말은 그렇게 중요하지 않다. 꼭 필요한 말만
할 수 있어야 한다. 안으로 말이 여물도록 인내하지 못하기 때문에 밖으로 쏟
아내고 마는 것이다. 이거시은 하나의 습관이다. 생각이 떠오른다고 해서 불숙
말해 버리면 안에서 여무는 것이 없다. 그렇기 때문에 그 내면은 비어 있다.
말의 의미가 안에서 여물도록 침묵의 여과기에서 걸러 받을 수 있어야 한다.
불교 경전은 말하고 있다. 입에 말이 적으면 어리석음이 지혜로 바뀐다고. 말
하고 싶은 충동을 참을 수 있어야 한다. 생각을 전부 말해 보리면 말의 의미가,
말의 무게가 여물지 않는다. 말의 무게가 없는 언어는 상대방에게 메아리가 없
다.
오늘날 인간의 말이 소음으로 전략한 것은 침묵을 배경으로 하지 않기 때문이
다. 말이 소음과 다름없이 다루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들은 말을 안해서
후회되는 일보다도 말을 해버렸기 때문에 후회되는 일이 얼마나 많은가.
인간은 강물처럼 흐르는 존재이다. 우리들은 지금 이렇게 이 자리에 앉아 있
지만 끊임없이 흘러가고 있다. 늘 변하고 있는 것이다. 날마다 똑같은 사람일
수가 없다. 그렇기 때문에 함부로 남을 판단할 수 없고 심판할 수가 없다.
우리가 누군가에 대해서 비난을 하고 판단을 한다는 것은 어떤 낡은 자로써,
한 달 전이다 두 달 전 또는 며칠 전의 낡은 자로써 현재의 그 사람을 재려고
하는 것과 같다. 그 사람의 내부에서 어떤 변화가 일어나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렇기 때문에 타인에 대한 비난은 늘 잘못되 넋이기 일쑤이다. 우리가 어떤
판단을 내렸을 때 그는 이미 딴사람이 되어 있을 수 있다.
말로 비난하는 버릇을 버려야 우리 안에서 사랑의 능력이 자란다. 이 사랑의
능력을 통해 생명과 행복의 싹이 움트게 된다.
우리는 넘치는 물량 속에 살고 있다. 백화점이나 슈퍼마켓에 가면 얼마나 물
건들이 많은가. 한때 너무 가난하게 살았기 때문에 우리는 늘 그 앞에서 흔들
린다. 자기 억제 능력이 없으면 그 앞에서 우리는 그냥 무릎을 꿇고 만다.
이렇게 물량이 넘치다보니까 전에 없던 낭비벽이 생겼다. 어느덧 불필요하게
사들이기 시작한 것이다. 또 어떤 의미에서 과시적인 소비를 하고 있다. 남도
가지고 있으니 나도 가져야 한다는 심리에서 물건을 사들인다. 물건을 함부로
다루기 때문에 물건에 대한 고마움을 모른다. 새로 사면 되니까, 옛날 같으면
양말도 꿰매서 신을 걸 지금은 내던져 버린다. 그리하여 검소하고 소탈한 인간
의 기품이 자구만 허물어져 가고 있다.
물건을 만들어 파는 이들은 높은 이익을 남기기 위해 눈에 보이는 외부의 형
태에만 관심을 갖는다. 인간 존재 자체에 대해서는 거의 무관심하다. 그들은
독같은 상품을 자꾸 대형화시키고 자꾸 비싼 값으로 만들어낸다. 값사고 유익
한 물건은 이윤이 적다는 이유로 더 이상 만들지 않는다. 그렇게 함으로써 우
리에게 선택의 압력을 가한다.
이러한 상황을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까. 이것은 세계 지성들이 다같이 걱정
하는 바다. 지성들뿐이겠는가. 사람이라면 누구나 걱정하지 않을 수 없는 그런
현상이다. 세계의 지성들이 한결같이 이야기하고 있는 것은 인간의 철저한 내
적 변화만이 그릇된 가치의식을 바로잡을 수 있다는 것이다.
내적 변화는 생활의 질서에서 얻어진다. 우리는 될 수 있는 한 적게 갖도록
노력해야 한다. 더욱 적을수록 더욱 귀하다. 더욱 사랑할 수 있다. 넘치는 모
자라는 것만 못하다. 우리에게는 모자라는 것도 있어야 한다. 그래야 갖고자
하는 희망이 있다.
가령 가게에 새로운 옷이 나왔다고 해서 단박에 사버리면 그걸로 끝이다. 한
며칠 입다가 시들해진다. 그러나 지금 형편이 안 좋거나 설령 돈이 있다고 하
더라도 이 다음으로 미루어 보라. 월말에 또는 이 가을이 지날 때. 겨울로, 새
봄으로, 그 가게 앞을 지날 때마다 가슴이 부푼다. 그 옷이 아직 거기에 있는지
없는지. 그것은 행복의 조건이 될 수 있다. 필요하다고 해서 당장에 사버리면
그걸로 끝이다.
소유하고 싶은 것이 있더라도, 필요한 것이 있더라도 절대적으로 필요한 생활
필수품이 아니면 자구 뒤로 미뤄 보라. 그러면 세월이라는 여과 장치를 통해
정말로 내게 필요한 것인지, 없어도 좋은 것인지 그 기간에 판단이 선다. 그것
이 행복의 조건이다. 그저 필요하다고 그때그때 잔뜩 사들여 보라. 그것은 추
한 삶이다. 결국에는 물건 더미에 깔려 옴짝 못하게 된다. 구하지 안항도 좋았
을 그런 물건들이 우리의 집안을 지배하고 있지 않은가.
오늘 시간이 있어서 미술관에 갔는데, 그곳에 200호에 가까운 작품들이 걸려
있었다. 너무 크다. 이제는 작은 소품을 만나기 어렵다. 분명히 작은 것이 아
름다운데도, 우리 주위엔 거대주의가 지배하고 있다.
행복의 조건은 우리 곁에 늘 깔려 있다. 들길을 가다가 청초하게 피어 있는
한 무더기 구절초를 통해서도 우리는 얼마든지 행복해질 수 있다. 또 시장골목
을 지나치든가 무슨 건물 앞을 지나가는데 환하게 웃는 미소를 만난다면 그 미
소를 통해서도 적어도 하루의 행복은 보장된다.
큰 것을 바라기 때문에 우리 둘레에 그렇게 널려 있는 무수히 많은 행복과 고
마움을 스스로 걷어차고 있다.
사람은 삶을 제대로 살 줄 알아야 한다. 소유에 집착하면 그 집착이 우리들
의 자유를, 우리들의 자유로운 날개를 쇠사슬로 묶어 버린다. 그것은 또한 자기
실현을 방해한다.
무엇을 갖고 싶다는 것은 비이성적인 열정이다. 비이성적인 열정에 들뜰 때
그것은 벌서 정신적으로 병든 것이다.
우리들의 목표는 풍부하게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풍성하게 존재하는 데 있다.
삶의 부피보다는 질을 문제삼아야 한다. 사람은 무엇보다도 삶을 살 줄 알 대
사람일 수가 있다. 채우려고만 하지 말고 텅비울 수 있어야 한다. 텅 빈 곳에
서 영혼의 메아리가 울려나온다.
인간의 궁극적인 목표는 자유에 있다. 자유에 이르기 위해서 인간의 청정한
본성인 사랑과 지혜에 가치 척도를 둬야 한다. 그리하여 모든 것으로부터 자유
로워질 수 있어야 한다. 물질이나 정신이나, 밖으로나 안으로나 자유로워져야
한다. 또 온갖 관계로부터 자유로워져야 한다. 심지어 우리가 믿는 종교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어야 한다. 어느 것 하나에라도 얽매이면 자주적인 인간 구실
을 할 수 없다.
무슨 일을 하지 말라는 소리가 아니다. 그 일을 하되 그 일에 얽매이지 말라
는 것이다. 얽매이면 그 일의 노예가 되어 버린다. 그 일을 하되 얽매이지 않
으려면 저마다 자신의 청정한 본성에, 곧 지혜와 사랑에 가치의식을 두어야 한
다.
제자가 스승에게 묻는다. 해탈이 무엇입니까. 그러자 스승이 되묻는다. 누
가 너를 일찍이 묶어 놓았느냐. 이것이 답이다. 누가 너를 일찍이 묶어 놓았는
가. 인간은 본래로부터 자유로운 존재이다. 그런데 일상적인 생활 습관이 잘못
들어 그 소용돌이에 스스로가 말려들었기 때문에 어떻게 해볼 수가 없는 것이
다.
우리들 안에 영성이 있고 불성이 있다. 집에서 살림을 하든 밖에서 일을 하
는 모든 것이 하나의 삶의 소재이다. 사실 딸로 참선하고 염불할 필요가 없다.
우리들 심성 자체가 지극히 신령스럽기 때문이다.
우리가 순수하게 집중하고 몰일할 때 영성과 불성이 드러난다. 사람들은 대
개 일시적인 충동과 변덕과 기분과 습관 등에 의해 지배당하고 있다. 일시적인
흐름에서 벗어나려면 자기 자신을 맑게 들여다 보는 그런 훈련이 필요하다.
인생은 거듭거듭 새롭게 시작할 수 있어야 한다. 선 자리에서 내인생을 심화
시킬 것에 마음을 둬야 한다. 어제보다 오늘이 더 행복한지 아닌지, 수시로 따
져 봐야 한다.
어제와 오늘이 똑같다면 그 자리에서 맴돌고 있는 것이다. 한 달 전의 나와
한 달 후의 내가 똑같다면 나 스스로를 그렇게 가두고 있는 것이다.
변화가 없으면 누구를 막론하고 삶이 침체된다. 삶에 나날이 변화를 가져오
도록 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들 일상이 진부하고 지루하고 따분해진다.
삶은 결코 고정되어 있지 않다. 늘 유동적인 상태이다. 그렇기 때문에 인생은
강물처럼 흐르는 존재라고 말한다.
모든 것은 ‘되어 가는’ 과정 속에 있다. 이미 되어 버린 것이 아니다.
삶은 늘 가변성을 지니고 있다. 그것이 우주의 실상이다. 위로 오르든 날든
떨어지든 되어가는 어디에도 매달리지 말아야 한다. 매달려 버리면 형성되어
가는 과정이 정지해 버린다.
우리들 자신을 안으로 항상 성찰해야 한다. 안으로 되살펴야 한다. 무엇이
되어야 하고 무엇이 될 것인가를 스스로 만들어 가야 한다.
누구나 언젠가는 죽어야 한다. 나도 마찬가지다. 잘 사는 사람은 한 번 죽지
만, 잘못 사는 사람은 수백 번 죽는다. 그렇기 때문에 내인생을 아무렇게나 탕
진해 버릴 수 없는 것이다.
행복은 늘 단순한 데 있다. 가을날 창호지를 바르면서 아무 방해받지 안혹
창에 오후의 햇살이 비쳐들 때 얼마나 아늑하고 좋은가. 이것이 행복의 조건이
다.
그 행복의 조건을 도배사에게 맡겨 버리면 자기에게 주어진 즐거움을 포기하
는 것이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우리가 해야 한다. 도배가 되었든 청소가
되었는 집 고치는 일이 되었든 내 손으로 할 대 행복이 체험된다. 그것을 남한
테 맡겨 버리면 내게 주어진 행복의 소재가 소멸된다.
행복하려면 조촐한 삶과 드높은 영혼을 지닐 수 있어야 한다. 몸에 대해선
얼마나 애지중지하는가. 얼굴에 기미가 끼었는가 말았는가. 체중이 얼마나 불
었는가 줄었는가에 최대 관심을 기울인다. 그러나 우리들 정신의 무게가, 정신
의 투명도가 어떻다는 것에는 거의 무관심하다.
내 정신이 깨어 있어야 한다. 깨어 있는 사람만이 자기 몫의 삶을 제대로 살
수 있다. 자기 분수를 헤아려 거듭거듭 삶의 질을 높여갈 수 있다.
가치 있는 삶이란 무엇인가. 욕망을 충족시키는 삶은 결코 아니다. 그건 한
때일 뿐이다. 욕망은 새로운 자극으로 더 큰 욕망을 불러일으킨다. 욕망을 채워
가는 삶은 결코 가치 있는 삶이라고 할 수 없다.
가치 있는 삶이란 의미를 채우는 삶이다. 그리고 내게 허락된 인생이, 내 삶
의 잔고가 어디즘에 왔는지, 얼마나 남아 있는지 스스로 확인할 수 있어야 한다.
거듭거듭 새롭게 시작할 수 있어야 한다. 날마다 새롭게 피어나는 꽃처럼 그렇
게 살 수 있어야 한다.
6
자기 안을 들여다보라
요즘 내가 사는 곳에는 돌배나무와 산자두가 활짝 문을 열어 환한
꽃을 피워내고 있다.
돌배나무는 가시가 돋쳐 볼품없고 쓸모없는 나무인 줄 알았더니 온몸에
하얀 꽃을 피우는 걸 보고 그 존재를 새롭게 인식하게 됐다.
산자두 역시 해묵은 둥치로 한겨울의 폭설에 꺽이고 비바람에 찢겨져
대수롭게 여기지 않았었는데, 가지마다 향기로운
꽃을 달고 있는 걸 보고 나서야 가까이서 그 둥치를 쓰다듬고
자주 눈길을 보내게 됐다.
-법정 스님 수상집<새들이 떠나간 숲은 적막하다>중에서
법정 스님이 ‘맑고 향기롭게’모임을 시작하신 지도 몇 해가 흘렀다. 왜 그
런 머리 무거운 일을 시작하셨냐는 질문에 그분은‘중이 밥값을 하기 위해서’
라고 간단히 말씀하신다.
그런데 주위에서 간혹 이런 얘기도 들리는 모양이다. ‘맑고 향기롭게’가 그
동안 어떤 표시나는 일을 했느냐고. 과연 기록으로 남을 만한 어떤 성과를 올
렸느냐고.
그런 지적을 하는 이들도 나름대로 일리가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 흔한
언론 매체나 현수막을 동원해서 큰 행사를 연 적이 없으니까. 사무실조차도 몇
해 동안 서울 비원 앞의 달랑 한 칸짜리 오피스텔로 만족하셨다. 책상 세 개와
나무의자 몇 개가 비품의 전부였다.
사무실 안에 스님 자신을 위해서 딸로 방을 갖지도 않으셨다. 운영위원이나
실무자들이 어떤 큰 일을 계획하고 안건을 내놓을 때마다 스님은 그 대부분을
취소시켰다. 소란스럽고 떠들썩함은 오히려 인간의 존재가 가진 맑음과 향기를
사라지게 하기 대문이다. 처음에는 ‘맑고 향기롭게 운동’이라고 했지만 ‘운
동’이라는 단어까지도 생색내는 일이라 해서 빼 버리셨다.
실무자들은 고충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맑고 향기롭게’를 시작하셨으면
서 막상 어떤 일이라도 벌일라치면 스님이 좀처럼 허락하지 않으셨기 때문이다.
심지어 사무실 직원들이 쓰기 위해 세피아 소형차를 사려고 했다가 크게 혼이
난 것은 유명한 일화가 되었다. 그것보다 더 작은 차로도 충분하다는 것이었다.
따라서 일을 벌이길 좋아하고 거창한 행사를 도모하는 사람들은 그곳에 어울
리지 않았다. 그 대신 그분은 작고 소중한 만남과 시간들을 계획하겼다. 몇 그
루의 나무를 심거나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을 위한 조촐한 모임, 환경에 대한 자
각을 위한 생태계 현장 답사 등이 소리없이 진행되었다. 어떤 외적인 행사나
슬로건을 통해서가 아니라 스님은 그분 자신의 존재로써, 그리고 한 달에 한 편
회보지에 싣는 글로써 삶의 진정한 맑음과 향기로움을 전하고자 하셨다.
선가에는 ‘한 송이 꽃이 피어나면 수천수만 송이의 꽃이 피어난다’는 말이
잇다. 한 존재의 맑음과 향기로움이 갖는 울림은 우주 전체에 메아리가 된다고
그분은 믿으신다. 우리들 자신이 한 송이 꽃으로 매순간 새롭게 피어날 수 있
어야 한다는 것이다.
돌이켜 보면 지금까지 많은 사람들이 ‘맑고 향기롭게’와 맺어져 산에도 가
고 수선화, 원추리, 할미꽃, 두메부추 같은 꽃들도 심어 보고 오염된 강물도 찾
아가서 거기에 비친 자신의 얼굴들을 들여다보았다. 카톨릭의 수녀들과 원불교
의 정녀, 불교의 비구니, 이 세 곳의 수도자들이 모여 작은 합창회도 열었다.
그 울림은 작지만 멀리 오래도록 퍼져나갔다.
자기 안을 들여다보라
내가 불일암에서 17년이나 살다 보니 삶이 단조로워졌다. 새롭게 뭔가를 시
작해 보고 싶어서 떠난 곳이 강원도 산골이다. 물론 아는 사람이 빈집을연결해
줘서 인연 닿는 대로 가서 살게 된 것이다. 처음엔 불편했지만 문명의 이기가
들어오지 않는 게 오히려 다행이었다.
전기와 전화기 없어 처음엔 아주 답답하고 일의 능률도 오르지 않았다. 하지
만 얼마 지나니까 그렇게 편할 수가 없었다. 이제는 바같에 나오면 전등불이
너무 발게 느껴지고 전화벨 소리가 신경에 거슬릴 정도가 되었다.
수행 생활하면서도 이름이 알려져 너무 번다하게 살다가 이제 자연에 묻혀 사
니 내 안에 낀 때가 벗겨지는 것 같다. 또 자연으로부터 얻는 교훈과 배움이
많아서 그렇게 살고 있다.
나는 지금 문패도 번지수도 없는 곳에 살고 있다. 물론 내가 사는 환경이 궁
핍하고 원시 상태이기 때문에 자랑할 것은 못 되지만 우선 순수한 내가 존재할
수 있어서 좋다. 나는 그냥 그곳에 잠시 있을 뿐이다. 나그네처럼 있는 것이다.
수행자에게 영원한 거처가 어디 있는가. 나그네처럼 잠시 머물러 있는 것이다.
오래 전, 내가 서울 봉은사 다래헌에 머물 때 아는 스님이 묵화 한점을 그려
준 적이 있었다. 그림이 마음에 들어 압정으로 벽에다가 붙여 놓고 보았다. 그런
그림은 격식없이 그린 것이기 때문에 족자같은 데 가둬 놓으면 그림이 죽는다.
그냥 그대로 꽂아 놓고 보아야 한다.
그림의 글이 고고봉정림 심심해저행, 때로는 높이높이 산 위로 솟아오르고 때
로는 깊이깊이 바다 밑에 잠기라는 교훈이었다. 옛 선사의 게송이다.
세상 속에서 번잡하게 살다보면 너무 노출이 되기 쉽고 세상물이 든다. 그러
므로 우리들 자신이 좀 묻혀서, 좀 덜 노출된 채 자기의 잠재력을 깊이깊이 바
다 밑에 잠기려는 일과 상통한다.
신앙인과 수행자들은 시시각각 자기 자신이 서 있는 자리를 살필 수 있어야
한다. 자기 반성을 해야 한다.
절에 가면 선방 앞 섬돌에 이런 표찰이 붙어 있다. 조고각하 비칠‘조’,돌아
볼‘고’,다리‘각’,아래‘하’,이 말이 무슨 말인가. 자기가 서 있는 자리를 살
피라는 뜻이다. 자기가 서 있는 ,지금 자기의 현실을 살피라는 것이다.
섬돌 위에다가 그런 표찰을 붙여 놓은 것은 신발을 바르게 벗으라는 뜻도 되
지만, 그건 지엽적인 뜻이다.
본질적인 뜻은 그런 교훈을 통해서 혀재 자기가 서 있는 자리,그 현실을 되돌
아보라는 것이다.
지금까지 우리가 절에서든 교회에서든 보고 듣고 배운 것이 얼마나 많은가.
이 보고 듣고 배운 것만 갖고도 부처나 성인이 되고도 남는다. 보는 것, 배우는
것, 듣는 것, 그 자체만 갖고는 대단한 것이 아니다. 종교적인 의미가 없다. 그것
이 일상 생활에 실행이 되어야 하고, 스스로 실천할 수 있어야 한다.
종교는 이론이 아니다. 팔만대장경이라 해도 그것은 이론서에 불과하다. 가이
드북일 쁜이다. 그것을 가지고 실제 여행을 떠나야 한다. 자기가 그렇게 살아야
만 한다. 행위 없는 이론은 공허한 것이다.
나 자신도 이 얘기를 하면서 반성을 한다. 오늘 이 자리에 나오면서 나는 이
런 생각이 들었다. ‘지금 내가 거길 뭐하러 가지?’ 지금도 강원도에는 눈이
온다. ‘눈 오는 날, 거길 뭐하러 가지?’ 물론 일요 법회가 있어서 가긴 하지만
나 스스로 자문을 했다.‘도대체 이렇게 내가 나가는 게 어떤 의미가 있는가?
내가 뭣 때문에 대중 앞에 나가서 떠드는가?’
그래서 나는 속으로 무척 자기 저항을 느낀다. 나는 그렇게 살지도 못하면서
괜히 남 앞에 가서 이래라 저래라 떠드는 게 마음에 저항이 된다는 말이다.
종교는 한 마디로 사랑의 실천이다. 이웃과 사아을 나누는 일이다. 보살행, 자
비행은 깨달은 후에 오는 것이 아니다. 순간순간 하루하루 익혀 가는 정진이다.
하루하루 한 달 한 달 쌓은 행의 축적이 마침내는 깨달음으로 드러나는 것이다.
새삼스럽게 몰랐던 것을 아는 것, 이것은 깨달음이 아니다. 본래 자기 마음 가운
데 있는 꽃씨를 일상적인 행을 통해서 가꾸어 나가명 그것이 시절 인연을 만나
꽃 피고 열매 맺는 것, 이것이 진정한 깨달음이다.
본래 우리 마음 가운데 깨달음이 갖추어져 있다. 본래 밝은 마음이다. 헛눈 파
느라고, 불필요한 데 신경쓰느라고 제 빛을 발하지 못할 뿐이다. 참선도 행이다.
참선을 하든 염불을 하든 경을 읽든 모두가 일종의 행이다. 닦는 행인 것이다.
행을 통해 본래 자기 마음의 빛이 드러난다. 행하면서 하루하루 살다 보니까 그
결과가 깨달음으로 드러나는 것이다.
부처의 전생 얘기를 보면 주로 두 가지다. 보시와 인욕이다. 남에게 베풂, 어
려움을 나눔, 눈도 뽑아 주고, 필요하다면 팔도 잘라 주고, 자기가 가진 모든 것
을 다 줘 버린다. 상징적인 얘기이지만 모든 것을 아낌없이 베푼다. 또 우리가
상상할 수도 없을 정도로 인욕, 곧 욕된 것을 참는다.
그 결과 부처는 금생에서 깨달음을 얻었다고 하지 않는가. 행의 결과인 것이
다.
우리는 스스로 물어야 한다. 내가 기독교 신자로서 불료 신자로서 과연 그 가
르침대로 하루하루를 살고 있는지 아닌지 스스로 반문해야 한다.
신앙인들은 그런 물음을 스스로 가져야 한다. 그런 물음이 없으면 앞으로 나
아감이 없다. 스스로 물어야 한다. 누가 나에게 붇는 것이 아니라 내 스스로가
내 행위에 대해서, 내 발끝을 돌아보듯이 자신의 삶에 대해서 스스로 물음을 던
져야 한다.
화엄경의 보살명난품에 보면 이런 구절이 나온다.
‘듣는 것만으로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알 수 없다. 행하는 것, 그것이 도를 구
하는, 진리를 구하는 진실한 모습이다.’
듣는 것만으로 이룰 수 있다면 우리는 이미 충분히 들었다. 이절 저 절을 다
니면서, 또는 이 교회 저 성당을 기웃거리면서 많은 것을 들었다. 그러나 그걸
갖고 완성되는 것은 아니다. 듣는 것은 대단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신문이나 잡
지 보는 것과 하나도 다르지 않다. 문사수, 들을‘문’, 생각‘사’, 닦을 ‘수
’. 들었으면 스스로 생각해야 한다. 자기 것을 만들어야 한다. 스스로 생가가하
라는 것은 자기를 여과시키라는 뜻이다. 자신의 체로 걸러 받음이다. 그리고 나
서 행하라는 것이다. 그것을 일상에 옮기라는 것이다.
같은 경전에 또 이런 비유가 있다.
‘맛있는 음식을 보고서 먹지 않고 굶주리는 사람이 있듯이 듣기만 하는 사람
들도 그와 같다. 온갖 약과 치료법을 잘 알고 있는 의사도 병에 걸려 낫지 못하
듯이 듣기만 하는 사람들도 그와 같다.’
보라. 의사도 병에 걸려 죽지 않는가.
‘가난한 사람이 밤낮없이 남의 돈을 세어도 자신은 한 푼도 차지 할 수 없듯
이 듣기만 하는 사람들도 그와 같다.’
이것은 하나의 비유이지만, 옛날 인도에서는 부자들이 아마 가난한 사람들을
기켜서 돈을 세게 한 모양이다. 돈을 세봤자 거기서 팁이나 일당이나 받았지, 실
제적인 자기 것은 없다는 말이다.
듣는 것만으로는 부처의 가르침을 알 수 없다. 그것을 자기 것으로 만들고 스
스로 행할 수 있어야 한다. 이것이 도를 구하는 진실한 모습이다.
사십이장경이란 경전이 있다, 인도로부터 최초에 중국에 들어왔다고 전해지는
경전 중 하나다. 이 사십이장경에 보면 이런 표현이 있다.
‘많이 듣는 것으로써 도를 사랑한다면 도는 끝내 얻기 어렵다. 뜻을 굳게 지
켜 진리를 받들어 행함으로써 그 도는 크게 이루어진다.’
불교의 모든 경전에 보면 신수봉행이란 말이 있다, 믿고 받아서 받들어 행한
다는 뜻이다. 모든 경전 끝에 가서, 신수봉행하라, 이런 부처님의 설법을 잘 듣
고 일상생활에서 그대로 행하라고 말한다, 그렇게 살라고 한다. 그렇지 않으면
아무 이익이 없다고 한다.
나 자신도 많이 반성하지만, 신앙인들은 많이 알려고 하지 말아야 한다, 그렇
게 되면 자기 안이 시끄러워질 뿐이다. 자기 본심대로 사는 것이 최선의 삶이다.
본심, 우리의 근본 바탕은 똑같다. 부처나 보살이나 내 자신이나 다 똑같다. 불
성은 똑같은 것이다. 그러나 누구에게도 의존하지 말고, 듣는 것에 너무 팔리지
말고, 드는 것에 너무 팔리지 말고, 자기 본성대로 살아야 한다. 볼래 천진한 그
마음을 지키는 것이 으뜸가는 정진이다.
금강경에 보면 ‘법도 오히려 버려야 하는데 하물며 법 아닌 것이랴!’라는 구
절이 있다. 진리도 버려야 할 것이데 하물며 진리 아닌 것이랴! 바깥에서 들려오
는 소리에 너무 의존하지 말아야 한다는 뜻이다.
설령 부처의 말이라 해도 ,그런 그 사황에서 그렇게 얘기된 것이다. 오늘 내가
그 얘기를 들었다면 오늘 상황에 맞도록 그와 같이 살라는 것이다. 그 가르침을
통해 오늘의 현실을 살아야 한다 .
작은 선이라도 좋으니 하루 한 가지씩 행해야 한다. 작고 미미한 것일지라도,
남이 알아 주지 않을지라도, 그것을 행해야 한다. 그것이 내 삶의 질서이다. 하
루 한 가지씩 작은 선이라도 행해야 한다.
그 일상적인 행을 통해서 지기 자신을 거듭거듭 일으켜 세워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늘 넘어진다. 그것은 이웃을 향한 행을 통해서 가능한 것이지,경전을 많
이 봤다고 해서, 법문을 많이 들었다고 해서 행해지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세상을 살아 가면서 하룻동안에 한가지 착한 일을 듣거나 행할 수 있
다면 그날 하루는 헛되이 살지 않고 잘 산 것이다. 참으로 사람의 도리를 다했
든가, 하루 한가지라도 이웃에게 덕이 되는 행동을 했는가 안했는가에 의해서
그날 하루를 잘 살았는가 못 살았는가를 판가름 할 수 있다. 여기에서 삶의 의
미와 가치가 결정된다.
거듭 말하거니와 작은 선이라도 좋으니 하루에 한 가지씩 행해야 한다. 그 실
행을 통해서 우리 자신을 거듭거듭 일으켜 세워야 한다.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
면서 하룻동안에 한 가지라도 착한 일을 듣거나 행할 수 있다면 그날 하루는 결
코 헛되이 살지 않고 잘 산 것이다. 이 말을 거듭 명심해야 한다.
만남은 시절 인연이 와야 이루어진다고 선가에서는 말한다. 그 이전에 만날
수 있는 씨앗이나 요인은 다 갖추어져 이었지만 시절이 맞지 않은 면 만나지 못
한다. 만날 수 있는 잠재력이나 가능성을 지니고 있다가 시절 인연이 와서 비로
소 만나게 된다는 것이다.
만남이란 일종의 자기분신을 만나는 것이다. 종교적인 생각이나 빛깔을 넘어
서 마음과 마음이 접촉될 때 하나의 만남이 이루어진다. 우주 자체가 하나의
마음이다. 마음이 열리면 사람과 세상과의 진정한 만남이 이루어진다.
나는 가끔 카톨릭의 장익 주교님을 만난다. 그분을 만날 때 우리사이에는 자
신이 무슨 승려라거나 상대방이 사제라거나 하는 의식이 전혀 없다. 그런 것 없
이 마음을 터놓고 만나다 보니 전혀 벽도 없고또 종교간의 거리도 간단히 뛰어
넘을 수 있다. 또 우리는 만나서 거의 종교적인 이야기는 하지 않는다. 한 사람
의 수행자로서, 또 한사람의 사제로서, 서로가 인간적으로 만나며 그 만남 속에
서 모든 것이 융화된다.
모든 종교에는 독단적인 요소가 있다. 독단적이고 배타적인 요소가 끼어들면
인간 교류 자체가 불가능하다. 종교간에 벽이 허물어지려면 우선 대화가 있어야
하고, 대화를 가지려면 독단적인 울타리를 넘어 마음을 활짝 열 수 있어야 한다.
그렇게 하면 모든 종교가 지니고 있는 공통적인 윤리, 공동선 같은 것이 서로
통할 수 있다.
몇 해 전 로마에 갔을 때 장익 주교님이안내해 몇 군데 성지를 순례한 적이
있었다. 수비야코의 베네딕토 성인 , 내가 좋아하는 아시시의 프란치스코 성인들
의 유적지들을 돌아보는데 마치 인도 불교성지 순례할 때의 그런 성스러움, 옛
성인들에 대한 존경심 같은 것이 우러나왔다. 여러 가지로 많이 배우고 나 자신
을 돌아볼 수 있는 계기였다.
이런 비유가 있다. 히말라야에 오르는 길은 여러 루트가 있다. 길은 달라도 다
정상으로 통하는 르트들이다. 그런데 자기가 오르는 루트만이 가장 옳다고 고집
하게 되면 결국에는 히말라야에 못 오른다는 것이다.
우리는 어떤 종파적인 종교를 통해서 마침내 보편적인 종교의 세계에까지 나
아가야 한다. 종파적인 종교라는 것은 나무로 치면 가지와 같은 것이다. 따라서
어느 한 가지만을 전부라고 고집하면 나무 전체를 알 수 없다. 마하트마 간디가
즐겨 쓰던 비유이다.
종파적인 벽이나 독단적인 요소만 극복할 수 있다면 모든 종교를 하나로 보는
경지에 이를 수 있다. 오늘날 세계적으로 분쟁이 일고 있는 종교적인 갈등은 종
파적인 벽을 넘어서지 못하기 때문이다.자기들이 믿는 종교만이 유일한 구원의
길이라 믿고 다른 종교를 무시하기 때문에 생겨난 결과이다.
진정으로 불교를 알려면 불교로부터 자유로워져야 한다. 불교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면 진정한 불교를 알 수 없다. 부처에 얽매이면 참부처를 불 수 없고, 보살
에 얽매이면 진짜 보살행을 할 수 없다.
참선하는 사람은 오로지 참선만이 전부이고 염불해서는 깨닫지 못한다고 주장
한다. 또 염불하는 사람은 염불만이 오로지 지름길이며 참선해서는 구제받을 수
없다고 말한다. 자기가 하는 일에 확고한 신념을 갖는 건 좋다. 또 그래야만 한
다. 하지만 그것만이 오직 전부라고 고집한다면 전체를 보지 못한다.
인도 고전인 리그 베다에 이런 표현이 나온다.
‘진리는 하나인데 현자들은 여러 가지로 말한다.
기독교적인 사랑과 불교적인 자비는 사실 똑같은 것이다. 사랑은 가볍고 자비
는 무거운 것이 아니다. 다만 그 문화적인 배경과 지역적인 특수성에서 다른 표
현이 생겨난 것일 뿐이다.
그 말을 통해서 우리의 삶으로 바로 나아가야 하는 것이지, 말 자체에서 집착
하게 되면 듯은 놓치고 모순에 빠진다.
인도 고전인 리그 베다에 이런 표현이 나온다.
‘진리는 하나인데 현자들은 여러 가지로 말한다.
기독교적인 사랑과 불교적인 자비는 사실 똑같은 것이다. 사랑은 가볍고 자비
는 무거운 것이 아니다. 다만그 문화적인 배경과 지역적인 특수성에서 다른 표
현이 생겨난 것일 뿐이다.
그 말을 통해서 우리의 삶으로 바로 나아가야 하는 것이지, 말 자체에서 집착
하게 되면 듯은 놓치고 모순에 빠진다.
열반경에서도 이렇게 말하고 있다.
‘말을 따르지 말고 뜻을 따르라’
7
진정한 인간의 길
산에서 사는 사람들이 산에 대한 향수를 지니고 있다면,
속 모르는 남들은 웃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산등들은 누구보다도 산으로 내딛는 진한 향수를 지닌다.
산에는 높이 솟은 봉우리만이 아니라 깊은 골짜기도 있다.
나무와 바위와 시냇물과 온갖 새들이며 짐승, 안개,구름,바람,산울림,
이밖에도 무수한 것들이 한데 어울려 하나의 산을 이루고 있는 것이다.
산은 사철을 두고 늘 새롭다.
그 중에도 여름이 지나간 가을철 산은 영원한 나그네인 우리들을
설레게 한다. -법정 스님 수상집<무소유>중에서
내가 그동안 법정 스님에게서 배운 중요한 한 가지는, 인생을 살아가면서 가
능하면 무엇이든 ‘하지 말라’는 것이다. 그 대신 지금 이 순간 자기 자신의
존재를 소중히 느끼라는 것이다.
불일암에 계실 때도 그랬지만 강원도 산중으로 거처를 옮기신 다음부터는 한
달에 한두 번 서울의 ‘맑고 향기롭게’사무실이나 시내에 나오시는 게 고작이
었다. 그때마다 많은 사람들이 어떤 사무와 계획을 갖고 스님을 기다렸다. 원고
청탁과 인터뷰 요청에서부터 숱한 일거리들이 그뿐께 어떤 요구를 해왔다.
그럴 때마다 스님은 거의 모든 경우를 거절하셨다. 때로는 곁에 있는 사람이
무안할 정도로 가차없이 자르시는 걸 볼 수 있었다. 그래서 그분이 지나치게 차
갑거나 또는 몰인정하지 않은가 하는 평을 들을때도 있었다.
장안의 이름 높던 요정 대원각의 넓은 땅을 주인 할머니가 스님께 기증해 ‘
길상사’라는 이름의 절로 만드는 과정에서도 그분은 몇 해 동안 망설이셨고 수
차례 결정을 번복하시기까지 했다. 절이 개원을 하고 언론이 크게 주목했을 때
도 스님은 그 흔한 방송 인터뷰 한 번 응하지 않으셨다.
막상 절이 개원되고 첫 법회가 열렸을 때 그분은 이렇게 선언을 해 좌중을 당
황시켰다.
‘나는 이 절이 부유해지거나 화려해지거나 번잡한 행사들을 별여나간다면 아
무 미련없이 이 절을 떠날 것이다.나는 이 절이 소박하고 가난한 절이 되기를
바란다.‘
그것은 그럴듯한 법문에서가 아니라 이 사회의 불교 사찰들과 그 구성원들에
대한 강력한 요구였다.그리고 스님은 그곳이 단순한 절로서가 아니라 일반 사람
들 모두를 위한 정신적인 쉼터,자기를 돌아보
는 장소가 되기를 바라셨다.
길상사의 창건주이자 회주이면서도 스님은 절에 방 하나를 만들어 드리겠다는
요구를 한 마디로 뿌리치셨다.서울에 오시면 여러 이름있는 인사들도 만나야 하
니 방 하나쯤은 격조 있게 지니셔야 한다는 주
위의 권유를 마다하고 사무실 한 켠의 딱딱한 의자에서 사람들을 만나셨다. 그
리고는 하룻밤도 머뭄이 없이 곧 산중의 홀로 있는 공간 속으로 떠나가셨다.
어쩌다 날이 저물고 시간이 늦어져도 스님은 기어이 무리를 떠나 자신의 거처
로 돌아가셨다.그렇게 인파와 차량의 행렬을 뒤로 하고 떠나는 그분의 모습을
바라볼 때마다 감히 방해할 수 없는 어떤 기상
같은 것이 느껴졌다.
길상사 개원 후 처음 맞이한 사월 초파일에는 홀연히 다른 나라로 여행을 떠
나 버리셨다.
그 모든 것이 삶의 가치,존재의 의미를 허투루 써 버리지 않으려는 자세이다.
어느 장소에 가도 오래 앉아 있는 법이 없고,스님의 말마따나 어느 조직체에도
깊이 몸담는 법이 없으며,여기저기 돌아다니며
설교하지 않으셨다.
이 책을 엮으면서 한 가지 놀란 것은 승려 생활 수십 년인데도 불구하고 법문
을 하거나 강연을 한 횟수가 너무도 적어 한 권의 책을 엮기에도 빠듯하다는 점
이었다. 일본의 자연농법가 후쿠오카 마사노부는 <짚 한 오라기의 혁명>이라는
저서에서‘나는 가능하면 무엇을 어떻게 안 할까를 고민했다’고 고백하고 있
다.농사를 짓는 사람이 가능하면 무엇을 할까가 아니라 무엇을 안 할까를 고민
했다는 것이다.그것은 게으름을 피우려는 것이 아니라‘더 큰 자연의 질서 속에
서 이루어지는 농사’에 접근하기 위한 노력이었다.
하지 않고 나서지 않고 꾸미지 않는 무위 자연의 삶의 태도가 스님의 일상 생
활에서 실천되고 있음을 나는 본다.그 대신 그분은 더 소중한 것,이를테면 우리
가 죽으면 나무가 되고 대지가 되고 바람이 된다는 것을 일깨워 준다.또한 우리
가 살아 있을 때도 나무이고 대지이고 바람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라고 가르친
다.
내가 믿건대,여기 모아 놓은 스님이 이 짤말한 어록집은 끝없이 행위를 추구
하고 더 발전하고자 하고 속도 지향적이며 연거푸 생산하고 소비하는 우리의 문
명에 대한 강력한 해독제이다.우리는 본질로부터 달아나 쓸데없는 것에 몸과 마
음이 파묻히려는 습관적인 병에 걸려있지 않은가.
- 엮은이
진정한 인간의 길
이 세상 모든 것은 그것이 우리 눈에 보이기 전에 눈에 보이지 않는 상태로
있다. 눈에 보이는 세계는 그 모습을 드러내기 전에 눈에 보이지 않는 상태로
존재한다. 오늘 이 자리에 모인 우리들도 여기 오기 전까지는 보이지 않는 상태
로서 저마다 존재했다. 그런데 맑고 향기로운 음악회가 있다고 해서 이렇게 한
자리에 나타난 것이다. 그러므로 안 보이는 상태가 원인이고, 보이는 것은 하나
의 결과이다. 눈에 안 보이는 것이 영원한 것이고, 눈에 보이는 것은 늘 변하면
서 일시적인 것이다.
이 몸이란 무엇인가. 이 육체라는 것은 마치 콩이 들어찬 콩깍지와 같은 것이
다. 수만 가지로 그 겉모습은 바뀌지만 생명 그 자체는 소멸되지 않는다. 모습은
여러 가지로 바뀌나 생명 그것은 절대로 사라지지 않는다. 생명은 우주의 영원
한 원리이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근원적으로 죽음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변화하는 세계가
있을 뿐이다. 이미 죽은 사람들은 어떻게 존재하는가. 그들은 다른 이름으로 어
디선가 존재하고 있다. 따라서 원천적으로 사람을 죽일 수는 없는 것이다. 불멸
의 영혼을 어떻게 죽이겠는가.
이 우주에 가득찬 에너지는 다른 것끼리는 서로 밀어내고 같은 것끼리는 서로
끌어당긴다. 선하게 대할 때 우주의 선한 요소들이 딸려오고 악하게 대하면 파
괴적인 요소들이 몰려든다. 따라서 어떤 삶이 되는가 하는 것은 우리가 마음을
어떻게 갖느냐에 달려 있다. 동물은 자연의 목소리인 본능의 지배를 받는다. 하
지만 사람은 자신의 생각에 지배를 받는다.
요즘 세상을 돌아보라. 요즘뿐이 아니다. 인류사 이래 그런 일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최근에 와서 우리가 상상도 못했던 그런 일들이 얼마나 많이 벌어지
고 있는가. 부모가 자식을 죽이고, 자식이 부모를 죽인다. 일찍이 우리가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일이다. 또 보라. 유사종교 광신자들의 작태 같은 것을. 그것은 비
단 일본만이 아니다. 세계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다.
인간 존재 자체에 대해 새삼스럽게 의문을 갖지 않을 수가 없다. 도대체 사람
이란 무엇인가. 사람이 이럴 수가 있는가.
우리가 몸으로 움직이는 동작과 입으로 하는 말과 마음으로 하는 생각 모두가
업이 된다. 업이라는 것은 하나의 행위이다. 좋은 없을 쌓으면, 곧 좋은 행도오
가 좋은 말씨와 좋은 생각을 가지면 좋은 결과가 얻어진다. 좋지 않은 행동이나
말이나 생각을 지니면 어두운 업을 짓게 된다. 이것이 자주 되풀이되다 보면 거
기에 힘이 생긴다. 그것을 업력이라고 한다. 또는 업장이 되는 것이다.
업력이 커지면 이성의 힘으로써 도저히 억제할 수 없는 그런 관성법칙 같은
것이 생겨난다. 내 힘으로 어떻게 억제할 수 없는, 자제할 수 없는 그런 힘을 갖
게 되는 것이다. 업력이라는 것, 업장이라는 것이 그렇다.
우리가 수도하고 또는 수행하는 것은 무엇인가. 업을 맑히는 일이다. 흔히 번
뇌를 끊는다거나 욕망을 끊는다고 말한다. 그것은 끊을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
니다. 욕망을 끊는다, 번뇌를 끊는다, 말로는 끊을 것 같지만 끊을 수 있는 성질
의 것이 아니다. 단지 질적인 변화가 있을 뿐이다. 말하자면 에너지의 전환이다.
업의 전환이다. 탐욕으로 흐르는 일을 베푸는 일로 전환하는 것이다. 또 남을 미
워하고 화내는 에너지는 연민의 정과 자비심으로 전환될 수 있다. 어리석음은
한 생각을 돌이킴으로써 지혜로 전환될 수 있다.
내 마음이 지극히 맑고 청순하고 평온할 때 중심이 잡힌다. 내 중심이 잡히는
것이다. 다시 말해 온전한 내 마음을 지니게 되는 것이다. 중심이 잡히지 않을
때는 늘 흔들린다. 정서가 불안정하다는 것은 중심이 잡히지 않은 것이다. 어느
쪽으로 기울고 있음이다. 그렇기 때문에 마음에 없는 일도 저지르게 되고 불쑥
불쑥 어떤 충동에 우리가 휘말리게 되는 것이다. 이 ‘불쑥’이라는 한 생각이
천당도 만들고 지옥도 만든다. 따라서 한 생각을 어떻게 갖는가 이것이 갈림길
이다.
세상의 기업체나 정부 관료들은 ‘무한경쟁 시대다’,‘일류가 아니면 살아남
지 못한다’는 등의 광고를 한다. 이런 구호들을 곰곰이 생각해 봐야 한다. 막연
히 국제 경쟁력을 강조하기 위한 구호라고 생각해서는 안된다. 사람이 어떻게
무한히, 끝없이 경쟁만 할 수 있는가. 그런 구호에 속아서는 안 된다. 어떻게 경
쟁만 하고 살 수 있는가. 물론 삶의 요소에 경쟁도 있지만 경쟁하지 않고 사는
그런 경우도 있다. 일류가 아니면 살아남지 못한다니, 우리는 일류가 아니다. 나
자신도 일류가 아니다. 삼류 사류도 있고 아류로도 살고 있다. 다들 살아남고 있
는 것이다.
어떤 의미에서 일류는 빨리 죽는다. 빨리 넘어져 버린다. 어떻게 일류만 존재
하는가. 어떻게 일류만을 용납하는가. 또 그들은 말한다. ‘정복할 것인가, 정복
당할 것인가’이건 협박이다. 누구를 우리가 정복하는가. 왜 우리가 정복을 당하
는가. 이런 말에 속지 말아야 한다. 그것은 한때의 구호일 뿐이다. 이런 극도의
이기주의를 우리가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이것이 우리의 과제다.
한국에 와서 스님이 되어 십여 년 동안 착실하게 수행하고 있는 외국 스님들
이 몇 사람 있다. 그 사람들과 여행을 하면서 한국 스님들의 좋은 점과 나쁜 점,
우리 국민들의 좋은 점과 고쳐야 할 점을 기탄없이 애기해 달라고 한 적이 있
다. 그러자 한 영국 스님이 말했다. ‘한극 사람들은 개인적으로 앞서려고만 하
지 양보와 겸양, 이런 자비심이 부족하다.’또 따뜻한 눈빛을 만나기 어렵다고
했다. 서울이고 시골이고 가봤자 따뜻한 눈빛을 만나기 어렵다는 것이다. 옳은
지적이다. 이 말을 들으면서 내 자신이 그렇구나, 이건 바로 내 얼굴이다, 오늘
의 내 모습이고 우리 사회의 얼굴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 생애에서 마지막 순간까지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가 이웃에 대해서 따뜻
한 마음을 얼마나 가졌는가, 또 그 따뜻한 마음의 본질이 무엇인가를 아는 일이
다. 우리가 이웃에 대해서 한생애 동안 따뜻한 마음을 얼마나 지녔는가, 얼마나
친절히 대했는가, 또한 그 따뜻한 마음의 본질이 무엇인가를 아는 일이다.
친절과 사랑은 우러나는 것이다. 우리 마음 속에서 우러나오는 것이다. 사람은
친절과 사랑 안에서 성장한다. 자비를 베풀라, 사랑해라, 여러 말이 있지만 친절
하다는 것, 이것이 인간의 미덕이다.
얼마전에 이런 책을 읽었다.
종업원 여남은 명 있는 작은 제과점이 있었다. 그 제과점에 열아홉살된 여자
종업원이 있었다. 어느날 어떤 손님이 이 아가씨에게 시집을 하나 주고 갔는데,
그 시집에 이런 구절이 실려 있었다.
‘조그만 가게임을 부끄러워하지 말라. 그 조그만 가게에 당신의 인정의 아름
다움을 가득 채우라’
그 가게는 형식보다 기본적인 생각을 중요시하는 가게였다. 인정을 잃으면 생
각과 행동이 기계적으로 된다. 슈퍼마켓에 가보라. 사람이 완전히 기계이다. 단
순한 돈과 물건의 교환 장소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인정이 배어 있는 곳은
다르다. 만일 인정이 배제된 거래가 참거래라면 굳이 사람이 지켜설 일이 없다.
자동판매기에 맡기면 된다. 여러 계층의 사람을 만나서 그들과 따뜻한 마음을
주고받기 때문에 거기서 우리가 일하는 기쁨을 찾아낼 수가 있는 것이다. 인간
관계가 단지 사고파는 일에 그친다면 너무 야박하고 삭막하다.
그래서 이 가게에서는 ‘조그만 가게임을 부끄러워하지 말자. 그 조그만 가게
에 당신의 인정의 아름다움을 가득 채우자’는 싯구절에 영향을 받아 다들 친절
한 마음씨로 손님을 대했다.
하루는 이 열아홉살 먹은 아가씨가 맨 늦게 가게 정리를 하고 문을 닫고 밖으
로 나오는데 지붕 위에 눈을 잔뜩 뒤집어쓴 웬 승용차 한대가 멈칫멈칫 무슨 가
게를 찾는 것 같았다. 저만치 가다가 뒤돌아보니까 그 차는 자신의 제과점 앞에
멈춰서는 것이었다. 그래서 아가씨는 달려갔다. 달려가서 노크를 하니까 차창이
열리면서 어떤 남자가 이런 애기를 했다.
‘내가 몇백 리 밖에서 오는 길인데 내 어머니가 지금 암으로 병원에 입원해
계십니다. 담당 의사를 만났더니 하루이틀밖에 못 살 테니까 만날 사람 만나게
하고 자시고 싶은 음식이 있으면 자시게 하라고 했읍니다.’ 그 소리를 듣고 아
들이 어머니한테 ‘어머니, 자시고 싶은 음식이 뭡니까?’하자 어머니는 ‘예전
에 어느어느 도시에 가니까 아주 맛있는 제과점이 있더라. 그 집 과자가 생각나
는구나’하고 말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아들은 ‘그건 어려운 일이 아니니까 제가 당장 갔다오겠습니다.’하
고 아침에 출발했다. 그런데 눈이 많이 와서 고속도로에 차가 잔뜩 밀리는 바람
에 밤 10시나 되어 도착하게 되었다. 가게가 정확히 어딘지도 모를 뿐더러 짐작
되는 제과점은 이미 문이 닫혀 있었다. 실망하던 차에 아가씨를 만나게 된 것이
다.
설명을 듣고 제과점 아가씨가 말했다. 내가 이 가게 종업원이니까 잠깐만 기
다리시라고. 아가씨는 안으로 들어가 불을 켜고 난로까지 켠 다음 그 손님을 들
어오게 했다. 그리고는 어떤 과자인지도 모르지만 병석에 누워 계신 분이니까
소화가 잘될 것, 부드러운 걸로 자기가 골라 드렸다.
과자를 싸드리면서 아가씨는 눈길에 조심해서 가시라고 인사를 했다. 손님이
값이 얼마냐고 묻자 아가씨는 돈을 안 받겠다고 말했다. 왜 돈을 안 받느냐고
놀라서 쳐다보자 제과점 아가씨가 이런 애기를 했다.
‘이 세상에서 마지막에 저의 가게 과자를 잡숫고 싶다는 손님께 모처럼 저희
가 드리는 성의입니다. 그 대신 혹시 과자가 더 필요할지도 모르니 명함을 두고
가십시오.’
손님은 감격한 채 떠났고, 그 아가씨는 자기 지갑에서 따로 과자값을 꺼내 자
기가 대신 그날 매상에 추가시켰다. 그날 밤 그녀는 꿈을 꾸었는데, 노인이 과자
를 먹다가 목이 메어서 고생하는 불길한 내용이었다.
다음날 출근하자마자 마음이 집히는 데가 있어 명함의 연락처로 전화를 걸었
다. 그러자 그 어머니가 돌아가셨다는 것이었다. 귀로에 길이 막혀 예정보다 늦
게 도착을 했는데, 아들이 도착하기 30분 전에 돌아가셨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 어머니가 맑은 정신으로 숨을 거두면서 마지막으로 한 말이 ‘그 가게 참 좋
은 가게로구나’라는 것이었다.
그 말을 전해 듣고 아가씨는 물었다. 장례식이 언제냐고. 그래서 내일이라고
하니까 이 아가씨는 자세한 애기도 하지 않고 주인한테서 휴가를 얻었다. 그리
고는 따로 공장에 가서 장례식에 가지고 갈 과자를 주문했다. 자기가 과자값을
내고. 그 길로 장례식에 참석을 했다. 과자를 갖고 장례식에 간 것이다.
어제 과자를 사 갔던 그 손님이 깜짝 놀랐다. 그 고마웠던 아가씨가 장례식에
까지 찾아온 것이다. 영단에 향을 사르고 이 아가씨는 마음속으로 말했다.
‘처음 뵙는 손님, 이 세상에서 마지막으로 우리 가게의 과자를 먹고 싶다고
말씀하신 분, 미처 시간을 대지 못해 서운하셨겠어요. 좋아하시는 과자를 떠나시
는 길에 갖고 가시라고 인사차 왔습니다.’
이렇게 축원을 했다.
이 글을 읽으면서 나는, 비록 조그만 가게이지만 그 제과점 아가씨의 모습에
서 앞치마를 두근 천사와 보살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상인의 길은 곧 인간의 길이다. 단지 물건만 사고파는 것이 아니라 인간에게
필요한 상품이기 때문에 인정이 오고가야 한다. 다시 말해 사고파는 차디찬 그
런 거래가 아니라 인정이 오고갈 수 있는 인간의 길이 되어야 한다.
그 책에 보면 이런 구절이 나온다.
‘당신의 오늘 일은 단 한 사람이라도 당신에게 고맙습니다라고 마음으로부터
인사를 하고 싶어하는 그런 친구를 만드는 일이다.’오늘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가 하면, 내가 있는 일터에서 단 한 사람이라도 나에게 고맙습니다라고
마음으로부터 인사를 하는 친구를 만드는 일이라는 것이다.
이웃을 기쁘게 해주면 내 자신이 기뻐진다. 이웃을 괴롭히면 내 자신이 괴롭
다. 이것이 마음의 메아리이다. 사랑이 무엇인가. 남녀간의 그렇고 그런 것만이
사랑이 아니다. 동정과 이해심을 지니는 것이다. 나 아닌 타인에게, 내 가족이든
친구이든 남모르는 사람에게까지 동정과 이해심을 지니는 것이다. 자연스럽게
이웃을 돕는 일이다. 마음으로부터 우러나서 거드는 일이다.
사랑을 어렵게 생각하지 말라. 지극히 일상적이고 사소한 마음씀이다. 낯선 이
웃에게 너그러워지는 일이다. 낯선 이웃에게도 우리가 너그럽게 대하는 것, 그것
이 사랑이다. 따뜻한 미소를 보내는 것, 이것도 사랑이다. 부드럽고 정다운 말씨
를 쓰는 것, 이것도 사랑이다.
우리의 마음만 열리면 늘 그렇게 살 수가 있다. 마음이 겹겹으로 닫혀 있기
때문에 그런 씨앗을 내 자신이 지니고 있으면서도 그걸 펼쳐 보이지 못하는 것
이다. 너는 너, 나는 나, 그렇게 단절되어서 살고 있다.
바로 이런 일상적인 실천들이 사랑이며 친절이다. 다시 말하면 사람으로서 그
도리를 다하는 것이 친절이고 사랑이다. 사랑이 없는 지식은 자칫 파괴수단으로
전락한다. 그래서 그 자신까지도 파멸시키고 만다.
삶이란 우리가 누구에게서 배우는 것이 아니다. 교과서에서 배우는 것이 아니
다. 우리가 순간순간 내 눈으로 직접 보고 귀로 듣고 이해하면서 새롭게 펼쳐가
는 어떤 기운 같은 것이다.
우리가 산다는 게 세 끼 밥 먹고 직장 왔다갔다 출퇴근길에 고생하며 사는
것, 이것이 사는 게 아니다. 그건 숨쉬는 것일 뿐이다. 삶은 누구에게서 배우는
게 아니라. 직접 내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순간 순간 이해하면서 새롭게 펼쳐
가는 것이다.
아름다움이 무엇인지 이해하는 가운데서 우리는 사랑을 알게 된다. 아름다움
에 대한 이해는 곧 우리 가슴에 평화를 이룬다. 우리가 살아가는 데 가장 중요
한 것은 좀더 친절해지는 것이다. 내일은 오늘보다 더 친절해지는 것이다. 그 다
음날은 더 친절해지는 것이다. 왜냐하면 친절에 한도가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
이다.
이런 사랑이야말로 모든 삶에 기초가 된다. 우리가 더 친절하고 사랑한다면
우주가 확장된다. 보이는 것만이 우주가 아니다. 끝없는 우주이지만 우리가 보다
더 친절하고 사랑한다면 우리들의 우주가 그만큼 확장이 된다. 이웃에게 좀더
친절하고 우리 서로 사랑하자.
8
수도자가 사는 집
올 봄은 순수하게 홀로 있는 시간을 마음껏 누릴 수 있었다.
홀로 있을수록 함께 있다는 말씀이 진실임을 터득하였다.
홀로 있다는 것은,
어디에도 물들지 않고 순진무구하며 자유롭고 홀가분하고
부분이 아니라 전체로서 당당하게 있음을 뜻한다.
살 만큼 살다가 이 세상을 하직할 때, 할 수 있다면 이런 오두막에서
이다음 생으로 옮아가고 싶다. - 법정 스님 수상집 <버리고 떠나기> 중에서
여름 장마가 찾아와 산에 물이 불었다. 전에 없던 개울이 생겨나고 쏜살같은
급류가 오솔길을 무너뜨리고 쏟아져 내리기 시작했다. 마침 시중에 볼일이 있어
오두막을 나선 스님은 예기치 않게 그 급류와 맞닥뜨리게 되셨다.
개울은 제법 폭이 넓어 간단히 뛰어넘기가 어려웠다. 자칫 발을 헛디뎌 급류
에 휘말렸다간 목숨을 잃을 판이었다. 발 아래로 꿈틀거리며 흐르는 거센 물줄
기를 바라보며, 그 순가 스님은 문득 크게 무서워지셨다고 한다. 이러다가 죽을
수도 있겠구나 하고.
그리고 다음 순간 ‘아, 아직도 내게 소멸의 두려움이 있구나’하는 생각이
들어 한동안 그 급류 앞에 서서 자기를 되돌이키셨다고 한다.
이 이야기를 나는 스님과 오랜 교분이 있으신 청학 스님으로부터 전해 들었
다. 그러면서 청학 스님은 그분이 저토록 홀로 산중에 사시는 것에 대해 무척
염려하셨다.
그동안 스님을 만나오면서 내가 받은 인상은 그분이 자신의 감정과 느낌에 매
우 충실하다는 것이다. 많은 것으로부터 훌쩍 벗어나 있고, 그토록 이름이 나 있
으면서도 명성이나 명예 따위를 썩은 감자처럼 여기시지만, 한 순간 스스로에게
다가오는 작은 느낌들을 모른 체하지 않으신다는 것이다.
스님은 자주 인간은 외로움을 느낄 수 있어야 한다고 강조하신다. 가끔은 옆
구리에서 시장기 같은 외로움을 느껴야 자신의 존재에 더 많이 접근할 수 있다
는 것이다.
사실 우리는 생의 초월을 꿈꾸지만 막대기처럼 무뎌진 인간이 되고자 함은 아
니다. 감정에 휘둘리지 않되 오히려 눈과 귀, 오감 등을 활짝 열고 자신의 안팎
에서 일어나는 일에 반응하는 것이 명상의 목적이다.
스승의 죽음에 슬피 우는 임제 선사에게 다른 제자가 생사 해탈을 위해 공부
하는 자가 어찌 그렇게 죽음 앞에서 초연하지 못하느냐고 질책하자, 임제 선사
가 이렇게 말했다고 하지 않는가.
‘물론 나도 죽음이 없고 태어남이 없다는 것은 안다. 하지만 스승을 오랫동
안 보아 온 내 두 눈이 이제 더 이상 그분의 모습을 볼 수 없음을 슬퍼하며 눈
물을 흘리는데 나더러 그 눈물을 틀어막고 있으란 말인가.’
여름 장마비가 내려 산중에 급류가 생겨났다. 오두막을 나서 그 급류 앞에 서
있는 스님의 모습이 눈에 보인다. 물론 그분은 급류도 뛰어넘고 자기 소멸의 두
려움도 쉽게 뛰어넘으실 것이다.
하지만 솔직히 내 심정을 말하면 나 역시 그분이 저토록 홀로 산중에 살고 계
시는 것이 때때로 걱정스럽고, 이제 연세가 어떻게 되셨나 하고 따져 볼 때도
있다.
- 엮은이
수도자가 사는 집
선정 삼매가 충만하길 빕니다.
건성으로 앉아 있지 말고 지금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낱낱이 살펴보십시
오.
마음과 몸을 편안하게 하고 순간순간 기쁨이 배어 나오도록 해야 합니다. 정
진은 의무적인 행위가 아니라 침묵 속에 떠오르는 삶의 향기입니다. 중심이 잡
히면 말이 필요없게 됩니다.
즐겁게 정진하는 것이 안거입니다. (여여선당에 보낸 편지에서)
서상대사의 <선가귀감>에 이런 법문이 있다.
‘출가하여 수행자가 되는 것이 어찌 작은 일이랴.
편하고 한가함을 구해서가 아니며, 따뜻이 입고 배불리 먹으려고 하는 것도
아니며, 명예나 재산을 구해서도 아니다.
오로지 생사의 괴로움을 벗어나려는 것이며, 번뇌의 속박을 끊으려는 것이고,
부처님의 지혜를 이으려는 것이며, 끝없는 중생을 건지려고 해서다.’
이것이 바로 출가 정신이다.
인도의 위대한 시인 까비르는 이렇게 노래한다.
‘너는 왔다가 가는 한 사람의 나그네, 재산을 모으고 부를 자랑하지만 떠날
때는 아무것도 가지 못한다. 너는 주먹을 쥐고 이 세상에 왔다가 갈 때는 손바
닥을 펴고 간다.’
우리가 불행한 것은 물질적인 결핍이라든가 신체적인 장애 때문이 아니다. 행
복할 수 있는, 행복을 받아들일 수 있는 따뜻한 가슴을 잃어 가기 때문이다. 새
로 핀 꽃을 보고 그 꽃에 매료당하는 것은 가슴의 영역이지 머리의 영역이 아니
다.
생명의 신비는 가슴으로 받아들인다. 또 가슴에서 온다. 삶의 부피나 덩이만
생각하고 삶의 질을 놓쳐 버리는 사회는 불행한 사회다.
명상을 왜 하는가. 본래의 청정한 마음을 드러내기 위해서다.
<선가귀감>은 말하고 있다.
‘바른 법을 찾는 것이 곧 바르지 못한 일이다.’
이것을 깊이 새겨둬야 한다. 무엇인가 인위적으로, 억지로 바른 법을 찾느라고
노력하는 것 자체가 바른 법에서 멀어지는 일이라는 것이다.
또한 같은 경전은 말하고 있다.
‘중생의 마음을 버리려고 할 것 없이 다만 제 성품을 더럽히지 말라.’
억지로 바른 법을 찾으려고 하는 것 자체가 이미 바르지 못한 일이다. 오히려
본래의 진실한 마음을 지키는 것이 중요하다. 따로 부처를 구한다고 해서 그것
이 얻어지는 게 아니다. 본래 청정한 마음, 진실한 마음을 지키는 것, 이것이 최
고의 정진이다.
정진이라는 것이 밤잠을 안자고 탐구하는 그것이 아니고, 본래 청정한 그 마
음을 지키는 것, 본래 때묻지 않은 맑은 마음을 지키는 것 이라고 서산대사는
말하고 있다.
명상은 조용히 지켜보는 일이다.
사물의 실상을 조용히 지켜보고 내 내면의 흐름을, 내 생각의 실상을 조용히
지켜보는 일이다. 안팎으로 지켜보는 일이다.
보리달마는 ‘관심일법 총섭제행’이라고 말했다. ‘마음을 살피는 이 한 가
지 일이 모든 현상을 거둬 들인다’는 뜻이다.
지식은 기억으로부터 온다. 그러나 지혜는 명상으로부터 온다. 지식은 밖에서
오지만 지혜는 안에서 움튼다.
안으로 마음의 흐름을 살피는 일, 우리는 이것을 일과 삼아서 해야 한다. 모든
것이 최초의 한 생각에서 싹튼다. 이 최초의 한 생각을 지켜보는 것이 바로 명
상이다.
까비르의 시에 이런 구절이 있다.
‘꽃을 보러 정원으로 가지 말라.
그대 몸안에 꽃이 만발한 정원이 있다.
거기 연꽃 한 송이가 수천 개의 꽃잎을 안고 있다.
그 수천 개의 꽃잎 위에 앉으라.
수천 개의 그꽃잎 위에 앉아서
정원 안팎으로 가득 피어 있는 아름다움을 보라.’
안으로 살피하는 소리이다. 수천 개의 꽃잎 위에 앉으라, 수천개의 꽃잎 위에
앉아서 정원 안 팎으로 가득 피어 있는 아름다움을 보라, 그 아름다움을 묵묵히
지켜보라는 뜻이다.
진정으로 세상을 살 줄 아는 사람은 한 해가 지난다고 해서 더 늙지 않는다.
수행자는 그런 덧없는 세월을 한탄할 게 아니라 그 세월속에서 우리가 얼마나
덧없이 살고 있는가, 무가치하게 살고 있는가를 되돌아봐야 한다.
나는 설이 되면, 해가 바뀌면 늘 그렇게 한다. 과연 내가 한 해 동안 내게 주
어진 시간을 얼마만큼 잘 썼는가. 그것이 과제처럼 내 앞에 다가온다. 어떤 때는
고맙게 여길 때도 있고, 어떤 때는 우회스러워질 때도 있지만, 늘 새롭게 시작하
는 마음으로 한 해를 맞는다.
출가자는 자기가 무엇 때문에 출가했고, 어떤 것이 진정한 출가자의 본분이고
삶의 태도인가를 생각한다면 이백오십가지 계율을 낱낱이 챙기지 않는다 하더라
도 그 생활 자체가 좋은 본보기가 될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내 자신도 늘 그것을 반성하고 있지만, 진정한
출가 정신을 가지려면 가난해야 한다. 옛 수도자들은 다 가난했다. 풍족한 그것
이 우리에게는 하나의 도전이다. 모든 것이 풍부한 이런 세상에 수도자들이 살
때 그것을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이 풍요로운 물질을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는
하나의 과제다.
그러므로 출가자는, 수도자는 우선 가난해야 한다. 가난이 기본이다. 가난해야
그 속에서 진정한 수행이 이루어지고 그 정신이 맑아진다.
옛 수행자들의 덕이란 무엇인가, 청빈의 덕이다. 청빈의 덕을 우리가 몸과 마
음에 익힐 때 수행자의 대열에 들 수 있는 것이지, 머리만 깎고 먹물 못만 입었
다고 해서 불제자라고 할 수는 없다.
절집안은 청정이 생명이다. 청정이란 오염되지 않은 본래 순수한 그런 상태를
말한다. 무엇보다 청정성의 회복이 가장 시급하다.
수도자가 세상의 흐름에 대해 너무 어두워도 안 될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너
무 세상 흐름에 편승하는 것도 수도자답지 않다. 개인의 능력이나 희망에 따라
새로운 정보에 대한 지식들을 갖추는 것은 바람직하다. 그래야 그 사회를 알고,
그 사회를 바르게 이끌 테니까.
그러나 내 개인적인 바람은 신라시대나 고려시대처럼 좀 고색창연한 그런 수
도자가 많이 나왔으면 좋겠다. 그것만으로도 이 닳아빠진 현대 사회에 큰 기여
가 될 것이다. 어설프게 현대화의 물결에 편승해서 마치 수도자도 아니고 속인
도 아닌 양 이리 뛰고 저리 뛰다 보면 거기서 무엇이 얻어지겠는가.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든 상관없이 불철주야 외곬으로 파고드는 그런 수행자
역시 소중하다. 왜냐하면 그도 한 몫을 하고 있지 때문이다.
세상이란 무엇인가. 바로 우리의 얼굴이고 우리 삶의 터전이다. 우리가 마음의
수양을 하고 개인의 수행을 한다는 것도 결국은 자기로부터 시작해서 세상에 도
달하라는 것이다. 자기 자신에만 멈추라는 것은 아니다.
맑은 영혼이 빠져 나간 얼굴, 그것은 빈 껍질이다. 혼이 없는 얼굴은 빈 껍질
이다. 숨쉬는 시체에 불과하다. 맑은 영혼이 깃들지 않은 미모는 마치 반짝이는
유리로 해박은 눈과 같다. 유리로 어떻게 사물을 식별하고 감상할 수 있는가.
아름다운 얼굴을 가지려면 영혼을 맑고 아름답게 가꿔야 한다. 얼굴이란 무엇
인가. 얼의 꼴이라는 뜻히다.‘얼’을 아름답게 가꾸면 그 꼴인 얼굴은 저절로
아름다워진다.
나는 이틀이든 사흘이든 집을 비우고 나올 때는 휴지통을 늘 비워 버린다. 거
기에 거창한 비밀이 있어서가 아니고 끄적거리다 남은 종이쪽이거나 휴지조각
같은 것들인데 일단 불에 태워 버리고 나온다. 내가 집을 떠나왔다가 다시 돌아
가지 못할 때 남긴 물건들의 추한 꼴을 남한테 보이기 싫어서다. 그래서 그때그
때정리해 치운다.
이제 곧 가을이고 조금 있으면 나무들이 잎을 다떨어뜨린다. 계절의 변화를
보고 ‘아, 세상이 덧없구나. 벌써 가을이구나. 어느덧 한 해도 두달밖에 안 남
았네’ 하고 한탄하지 말라. 계절이 우리에게 주는 의미가 어디에 있는가. 우리
눈에 보이는 낙엽이나 열매들이 내 하루하루 살아가는 삶에 어떤 의미를 가져다
주고 있는가.
비본질적인 것, 불필요한 것은 아깝지만 다 버려야 한다. 그래야 홀가분해진
다. 나뭇잎을 떨어뜨려야 내년에 새 잎을 피울 수 있다. 나무가 그대로 묵은 잎
을 달고 있다면 새 잎도 피어나지 않는다. 사람도 마찬가지다. 매순간 어떤 생
각, 불필요한 요소들을 정리할 수 있어야 한다.
그렇게 해야 새로워지고 맑은 바람이 불어온다. 그렇지 않으면 고정된 틀에서
벗어날 수 없다. 순간순간 새롭게 피어날 수 있어야 살아 있는 사람이다. 맨날
그 사람, 똑같은 빛깔을 가지고 있는 사람, 어떤 틀에 박혀 벗어날 줄 모르는 사
람은 살아있는 사람이라고 할 수 없다.
낡은 것으로부터, 묵은 것으로부터, 비본질적인 것으로부터 거듭거듭 털어 버
리고 일어날 수 있어야 한다.
수도자는 앉는 자세가 일반 사람들과 달라야 한다. 늘 허리를 바짝 펴야 한다.
허리를 바짝 펴면 정신이 가장 맑아진다. 허리가 삐딱하면 정신이 죽어 있는 것
이다. 남의 흉을 많이 보는 사람은 허리가 삐딱해진다는 말이 있다. 허리를 바짝
펴면 남 흉볼 여력이 없다. 허리를 바짝 펴면 눈이 저절로 자기 코끝으로 온다.
자기 허물만 살피는 것잉지 남의 허물은 보이지 않는 것이다.
인간은 누구나 어디에도 기대서는 안 된다. 오로지 자신의 등뼈에 의지해야
한다. 자기 자신에, 진리에 의지해야 한다. 자신의 등뼈 외에는 어는 것에도 기
대지 않는 안정된 마음이야말로 본래의 자기이다.
우리가 산다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기약할 수 없는 것이다. 내일 일을 누가
아는가. 이 다음 순간을 누가 아는가. 순간순간을 꽃처럼 새롭게 피어나는 습관
을 들여야 한다. 매순간을 자기 영혼을 가꾸는 일에,자기 영혼을 맑히는 일에 쓸
수 있어야 한다.
우리 모두가 늑는다. 그리고 언젠가 자기 차례가 오면 죽는다. 그렇지만 우리
가 두려워할 것은 늙음이나 죽음이 아니다. 녹슨 삶을 두려워해야 한다. 삶이 녹
슬면 모든 것이 허물어진다.
우리가 순간순간 산다는 것은 한편으론 순간순간 죽어간다는 소식이다. 죽음
을 두려워할 것이 아니라 녹스는 삶을 두려워해야 한다.
단순한 삶을 이루려면 더러는 홀로 있는 시간을 가져야 한다. 사람은 홀로 있
을 때 단순해지고 순수해진다. 이때 명상의 문이 열린다.
홀로 있으려면 최소한의 인내력이 필요하다. 홀로 있으면 외롭다고 해서 뭔가
다른 탈출구를 찾으려는 버릇을 버려햐 한다. 그렇지 않으면 모처럼 자기 영혼
의 투명성이 고이려다가 사라져 버린다.
홀로 있지 못하면 삶의 전체적인 리듬을 잃는다. 홀로 조용히 사유하는, 마음
을 텅 비우고 무심히 지켜보는 그런 시간이 없다면 전체적인 삶의 리듬 같은 것
이 사라진다. 삶의 탄력을 잃게 된다.
명상은 안으로 충만해지는 일이다. 안으로 충만해지려면 맑고 투명한 자신의
내면을 무심히 들여다보는 습관을 들여야 한다. 다시 말하면, 명상은 본래의 자
기로 돌아가는 훈련이다. 명상은 절에서, 선방에서만 하는 게 아니다. 마음을 활
짝 열기 위해서 겹겹으로 둘러싸인, 겹겹으로 얽혀 있는 내 마음을 활짝 열기
위해서 무심히 주시하는 일이다.
연꽃은 아침 일찍 봐야 한다. 우후가 되면 벌써 혼이 나가 버린다. 연꽃이 피
어 날 때의 향기는 다른 꽃에선 맡을 수 없을 정도로 신비롭다. 그리고 연잎에
맺힌 이슬방울, 그것은 어떤 보석보다도 아름답다. 또는 비오는 날 이렇게 우산
을 받고 연못가를 배회하고 있으면 후둑후둑 연잎에 비 떨어지는 소리가 들린
다. 명상은 바로 마음을 열고 ‘연잎에 비 떨어지는 소리’를 듣는 일과 같다.
사랑이 우리 가슴 속에서 싹트는 순간 우리는 다시 태어난다. 이것이 진정한
탄생이라고 부활이다. 사랑이 우리 가슴 속에서 태어나는 순간, 다시 말해 겹겹
으로 닫혔던 우리 마음이 활짝 열리는 순간 우리는 다시 태어나게 된다. 사랑과
거듭남의 의미가 여기에 있다.
9
적게 가져야 더 많이 얻는다.
얼어붙은 대지에 다시 봄이 움트고 있다.
겨울 동안 죽은 듯 담잠하던 숲이 새소리에 실려 조금씩 깨어나고 있다.
우리들 안에서도 새로운 봄이 움틀 수 있어야 한다.
다음으로 미루는 버릇과 일상의 늪에서 허우적거리는 그 타성에서
벗어나 새로운 시작이 있어야 한다.
인간의 봄은 어디서 오는가?
묵은 버릇을 떨쳐버리고 새로운 시작에서 새 움이 트는 것이다.
- 숫타니파타 강론집<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처럼>중에서
지난 해 여름, 나는 위장에 병이 생겨 큰 고생을 했다. 오랜 여행과 불규칙한
식사 등으로 몸의 조화가 깨어진 것이다. 수술까지도 고려해야 할 중병에 걸리
자 주위에서 여러 조언과 충고가 잇따르기 시작했다. 건강을 잃으면 공부도 아
무 소용없으니 몸을 소중히 하라는 충고가 가장 많았고, 종흔 약과 의사를 추천
하는 조언들도 있었다. 그렇게 인도로 티벳으로 돌아다니더니 드디어 병에 걸렸
구나 하는 질책 어린 시선들도 있었다.
법정 스님도 내 병에 대해 소식을 들으신 모양이었다. 제자인 덕조스님을 통
해 불현듯 연락이 왔다. 당장 내가 입원하기로 한 병원엘 찾아오시겠다는 것이
었다.
나는 극구 만류했다. 건강한 모습도 아닌 병들고 허약한 모습을 그 분께 보이
고 싶지 않아서였다. 그래서 아예 연락처를 감춰 버리자 스님을 계속 수소문을
하셨다.
어찌 보면 그 당시 내게 필요한 것은 충고나 명약이 아니었다. 갑자기 삶이
큰 기로에 놓여져 있을 때 내 옆에 잠시라도 있어 줄 누군가가 필요했다.
나는 아직도 그때의 그 고마움을 스님께 전하지 못하고 있다. 그 이후로 나를
볼 때마다 내 얼굴부터 살피고 늘 건강을 물으신다. 만나서도 묻고 헤어질 때도
염려하신다. 그러면 그 따뜻함과 인간애가 어느새 내게 명약이 되는 걸 느낀다.
다행히 나는 수술하지 않고도 몸이 쾌유되었고, 그래서 또다시 여행도 떠날
수 있고 이 책 엮는 일을 할 수 있게 되었다.
‘나눔이란 누군가에게 끝없는 관심을 기울이는 일’이을 그분이 내게 보여
주었다.
스님이 불일암이나 강원도 산중에 홀로 계시는 것을 두고 어떤 이들은 유자적
한 생활을 누린다고 여길지 모른다. 그러나 스님과의 개인적인 대화를 통해 나
는 홀로 있는 생활 속에서도 그분이 주위의 살아 있는 생명체들에 끊임없는 관
심을 기울이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겨울밤이면 물을 찾는 산짐승들을 위해 미
끄러운 눈길을 걸어내려가 얼어붙은 개울에 구멍을 만들어 두는 일은 감동적이
기까지 하다.
또 한 번은 출판사에서 책의 인세를 받으시면서 언젠가 집수리를 해준 어느
인부의 불우한 사정을 챙겨 주어야 한다고 말씀하시는 것을 엿들은 적이 있다.
스님은 자주 알베르 카뮈의 말을 인용하신다.
‘우리들 생의 저녁에 이르면 우리는 이웃을 얼마나 사랑했는가를 두고 심판
받을 것이다.’
카뮈는 또 이렇게 말했다.
‘무엇이 우리의 삶을 증언해 줄 것인가. 우리의 작품인가. 철학인가. 아니다.
우직 사랑만이 우리의 존재를 증명해 줄 뿐이다.’
- 엮은이
적게 자져야 더 많이 얻는다.
내가 사는 데는 아직도 얼음이 얼어 있고 눈이 잔뜩 쌓여 있는데 이곳 남쪽에
오니까 꽃이 피어 있다.
내가 아마도 욕심이 많기 때문에 무소유를 그렇게 강조하게 된 듯하다. 내가
늘 가만히 반성해 본다. 지금도 내가 가진 것이 너무 많다. 오두막 살림에서 보
면 다기도 한두 벌이면 될 텐데 서너 벌 있고, 또 읽을 책도 한두 권이면 족한
데 그것도 오십여 권이 넘는다. 또 생활도구도 이것저것 가진게 많다. 그렇기 때
문에 나 스스로 무소유를 주장하는 것이다.
소유란 이런 것이다. 우리가 소유한 것만큼 편리한 것도 있지만 소유로부터
소유를 당하는 측면이 있다. 부자유해지는 것이다. 우리가 애지중지 아끼던 것이
파손됐거나 또는 잃어 버렸을 때 정신적인 상처도 동시에 뒤따른다. 가진 것만
큼 집착이 커지기 때문에 그렇다.
물론 사람이 살아가는 데 필요한 기본적인 것은 어쩔 수 없지만 갖지 않아도
좋을 것은 갖지 말아야 한다. 갖지 않아도 좋을 것을 우리는 얼마나 많이 갖고
있는가. 또 그렇기 때문에 우리들 의식이 그만큼 분산되고, 사람이 단순해지지
못하고, 더 불순해지는 것이다.
이런 함정에 빠지지 않기 위해선 가진 것이 적어야 한다. 가진 것이 적어야
마음이 편하다. 본래 무일물이라 하지 않는가. 아무것도 없이 이 세상에 와서,
아무것도 없이 떠날 뿐이다. 모든 것은 잠시 맡아 가지고 있는 것일 뿐이다.
잘 쓰기 위해서 많이 맡아 갖고 있는 것은 좋은 일이다. 선하게 쓸수 있으면
좋다. 그러나 잘 쓰지도 않고 묵혀 두는 건 죄악이다. 왜냐하면 남이 가질 몫까
지 차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될 수 있으면 가진 것이 적어야 마음이 홀가분하다.
내가 무소유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현재도 내가 가진 것이 너무
많다.
다시 말하고 싶은 것은, 이런 넘치는 세상일수록 가난의 덕을 배워야 한다는
것이다. 주어진 가난이 아니라 선택한 가난을 실천해야 한다. 성서에도 있듯이
마음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다고 했다. 가난에서 오는 복이라는 개념이 요즘은
거의 잊혀져 가고 있다. 사람을 이루고 있는 가장 밝은 요소가 복이다.
내가 ‘맑고 향기롭게 운동’을 시작하자 잘 아는 스님이 어떻게 그런 머리
무거운 일을 해나가겠느냐고 물은 적이 있다. 번거로운 일을 싫어하면서 어떻게
그런 마음을 냈느냐는 것이었다. 그래서 나는 ‘중이 밥값은 해야 되겠지’하고
대답했다. 하지만 내가 지금 관여하고 있는 이 일이 밥값을 하는 일인지 빚을
지는 일인지는 더 두고 보아야 알겠다.
과일에 씨앗이 들어 있듯이 우리는 태어나면서부터 하나의 씨앗을 지니고 나
온다. 그것을 불성 또는 영성이라고 이름한다. 그 씨앗을 움트게 하고 꽃피우는
것이 삶의 의미이고 보람이다.
영성과 불성의 씨앗을 움트게 하고 꽃피우려면 먼저 우리의 마음을 맑히는 일
이 전제되어야 한다. 흔히 마음을 맑혀라. 마음을 비우라는 말을 절에서 많이 한
다. 원래 종교적인 세계에서는 지극히 관념적인 그런 말들을 많이 한다.
자기 마음을 맑히라니 어떻게 맑힐 것인가. 마음을 비우라니 어떻게 비울 것
인가. 열심히 종교를 믿는 사람들을 보면 그렇지 않은 사람들보다 옹졸하고 막
혀 있어 더 배울 것이 없는 경우가 많다.
관념적인 것을 갖고는 마음이 맑아지지 않는다. 물론 참선이나 염불이나 기도
를 지극히 해서 마음을 맑힐 수도 있다. 그러나 이것은 한쪽에 불과하다. 자칫하
면 관념화되기 쉽다. 현실적으로 선행을 해야 한다. 선행을 함으로써 저절로 우
리들 마음이 열리고 맑아진다. 마치 시절 인연이 와서 연꽃이 피어나듯이 그렇
게 맑아진다.
불교에서는 말한다. ‘나쁜 짓 하지 말고 착한 일을 두루 하라. 그러면 저절로
그 마음이 맑아질 것이다. 이것이 바로 모든 부처들의 가르침이다.’법구경에도
나오고 여러 문헌에도 나온다 그러므로 마음을 맑힌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선을
행한다는 것이다.
한 사람의 마음이 맑아지면 그 둘레가 점점 맑아져서 마침내는 온 세상이 다
맑아질 수 있다. 인류 역사상 수많은 성인들, 예수나 부처같은 분들의 맑은 마음
이 메아리 되고 두루 비쳐서 오늘날까지도 사방을 맑게 비추고 있다. 만을 그런
분들이 존재하지 않았다면 현재 우리는 전혀 다른 삶의 모습을 하고 있을 것이
다.
내 마음 따로 있고 네 마음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마음은 하나이다. 한 뿌리
에서 파생된 가지가 내 마음이고 당신의 마음이다. 불우한 사람의 이야기를 들
으면 우리가 눈물짓는 것도 그 때문이다. 왜냐하면 같은 뿌리에서 나누어진 한
쪽 가지가 그렇게 아파하기 때문에 함께 아파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그것
이 마음의 메아리이다.
마음이 맑고 투명해야 평온과 안정을 갖는다. 마음의 평화로움과 안정이야말
로 행복과 자유에 이르는 지름길이다.
나눔이란 무엇인가. 이미 받은 것에 대해 당연히 지불해야 할 보상의 행위이
고 감사의 표현이다. 나눔으로써 이 세상을 제대로 건널 수 있다.
육바라밀(여섯 가지 지혜) 가운데 보시 바라밀을 첫째 가는 바라밀이라고 하
지 않는가.
바라밀이라는 것은 세상을 사는 일이다. 이쪽에서 저쪽으로 건너가는 일, 도달
하는 일, 나루를 건너는 일다. 다시 말하면 세상을 사는 문제이다. 그 중에서도
첫째 가는 것이 나눠 갖는 일, 보시하는 일이라는 것이다.
기쁨을 나누면 그 기쁨은 몇 곱으로 늘어난다. 반대로 괴로움과 슬픔을 나눠
가질 때, 그 괴로움과 슬픔은 몇 곱으로 줄어든다. 나눔에는 이렇듯 미묘한 율동
이 따른다.
관계는 일방적이지 않다. 서로 주고받으면서 이루어진다. 또한 그런 관계가 우
리들 자신을 만들어간다.
모든 것은 나이를 먹어가면서 시들고 쭈그러든다. 내 글만 읽고 나를 현품대
조하러 온 사람들이 가끔 깜짝 놀란다. 법정 스님하면 잘 생기고 싱싱한 줄 알
았는데 이렇게 별 볼 것 없고 바짝 마르고 쭈글쭈글하니 실망의 기색이 역력하
다. 그때마다 나는 속으로 미안해 한다.
거죽은 언젠가 늙고 허물어진다. 늘 새차일 수가 없다. 끌고 다니다 보면 고장
도 나고 쥐어박아서 찌그러들기도 한다. 육신을 오십 년, 육십 년 끌고 다니다
보면 폐차 직전까지 도달한다. 거죽은 언젠가는 허물어진다. 생로병사하고 생주
이멸한다.
그러나 보라, 중심은 늘 새롭다. 영혼에 나이가 있는가. 영혼에는 나이가 없다.
영혼은 시작도 없고 끝도 없는 그런 빛이다.
어떻게 늙는가가 중요하다. 자기 인생을 어떻게 보내는가가 중요하다. 거죽은
신경쓸 필요가 없다. 중심은 늘 새롭다. 거죽에서 살지 않고 중심에서 사는 사람
은 어떤 세월 속에서도 시들거나 허물어지지 않는다.
세상의 유행을 따르는 사람들은 빨리 시든다. 세상의 유행을 쫓다보면 끝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기 중심을 지니고 사는 사람들은 항상 새롭다. 그것은
영원한 것이고 중심이 잡혀 있기 때문에 그렇다.
우리가 지금 이 순간, 전존재를 기울여 누군가를 사랑하고 있다면, 이 다음에
는 더욱 많은 이웃들을 사랑할 수 있다. 이 다음 순간은 지금 이 순간에서 태어
나기 때문이다. 사람은 바로 지금 이 순간에서 피어난다. 지금이 바로 그때이지
시절이 따로 있는 것은 아니다.
맑고 향기롭게 살아가려면 될 수 있는 한 작은 것과 적은 것으로써 만족할 수
있어야 한다. 큰 것과 많은 것에는 살뜰한 정이 가지 않는다. 우리가 너무 크고
많은 것을 추구하다 보니 무뎌져서 작고 적은 것에 고마워할 줄을 모르게 되었
다.
내가 가끔 시내에 나오면 편지가 와 있다. 편지는 많이 받지만 답장을 자주
쓰지는 못한다. 지난 겨울 어느날 밖에는 눈이 오고 뒷골에선 노루 울음소리 들
려 내 마음도 소년처럼 약간 부풀어 올랐다. 그래서 묵은 편지를 뒤적이다 답장
을 몇 군데 써 보내야겠다는 생각이 일어 벼루에 먹을 갈았다.
마땅한 종이가 없어 뒤적이다가 도배하고 남은 종이 사이에서 화선지 두 장을
발견했다. 그것도 전지가 아니고 쪼가리였다. 그걸 오려서 편지를 몇 통 썼는데,
종이가 한정되어 있지 때문에 아주 조심스럽게 아껴 써야 했다. 자연히 종이의
고마움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보통 때믄 글씨도 크게 써서 끝내곤 했는데 그날
은 아주 잔글씨로 써서 몇 군데 띄워 보냈다. 그때 적은 것이 참 살뜰하고 고맙
다는 것을 느꼈다.
그 후에 무슨 일이 있어서 밖에 나갔다가 지물포에서 화선지를 스무 장 남짓
사갖고 왔다. 그랬더니 쪼가리 두 장 가졌을 때의 오붓하고 살뜰하고 고맙던 정
이 사라지고 말았다. 많은 것은 그런 것이다.
거듭 말하지만, 하나가 필요할 때 둘을 가지려 하지 말라. 둘을 갖게 되면 그
하나마저 잃게 된다. 모자랄가봐 미리 걱정하는 그 마음이 바로 모자람이다. 그
것이 가난이고 결핍이다.
내가 잘 아는 친구가 인도 여행을 갔는데 거리에서 파는 금속 공예품이 마음
에 들어 흥정을 시작했다고 한다. 가게 주인이 빤히 쳐다보더니 천 루피를 달라
고 하더라는 것이다. 우리 돈으로 치면 사만원 정도인데 인도에서 천 루피면 굉
장히 큰 돈이다. 사람 봐서 그렇게 부른 것이다.
그래서 친구가 백 루피만 하자고 십분의 일로 깎자 백오십 루피만 달라고 하
더라는 것이다. 그래서 다시 칠십 루피만 하자느니 어쩌느니 하면서 한참 옥신
각신하다가 그냥 나오려니까 주인은 할 수 없이 가져 가라고 했다. 천 루피짜리
를 칠십 루피에 산 것이다. 얼마나 기뻤겠는가.
그런데 값을 지불하고 나오려고 하니까 주인이 뒤에서 ‘아 유 해피?’하고
묻더라는 것이다. 당신 행복하냐고, 그렇게 싼 값에 물건을 사서 정말로 행복하
냐고. 이 말을 듣고 친구는 머리를 한 대 얻어 맞은 것 같더라고 했다. 그건 행
복하고는 상관이 없는 일이다. 그건 행복이 될 수 없다. 그러면서도 동시에 이렇
게 얘기하더라는 것이다.
‘당신이 행복하다면 나도 행복하다. 그러나 당신이 행복하지 않다면 그것은
내 문제가 아니라 당신의 문제다.’
그래서 그 친구가 거기서 행복에 대해 큰 교훈을 얻었다는 그런 얘기를 들었
다.
물건은 우리를 행복하게 해주지 못한다. 소유물은 오히려 우리를 소유해 버린
다. 필요에 따라 살되 욕망에 따라 살면 안 된다. 욕망과 필요의 차이를 분명히
알고 사람은 만족할 줄 알아야 한다.
부처가 마지막 설한 유교경에는 이런 구절이 나온다.
‘모든 고뇌에서 벗어나고자 한다면 만족할 줄 알아라. 만족할 줄 알면 항상
넉넉하고 즐거우며 평온하다. 그런 사람은 비록 맨땅 위에 누워 있을지라도 편
안하고 즐겁다. 그러나 만족할 줄 모르는 사람은 설령 천국에 있을지라도 그 뜻
에 흡족하지 않을 것이다.’
맑고 향기롭게 살려면 자연의 질서를 삶의 원리로 받아들여야 한다. 우리들
자신이 자연의 일부이며 소우주이다. 가령 날시가 찌뿌둥하고 저기압일 때 우리
몸도 쑤시고 결린다. 날씨가 화창하면 우리들 몸과 마음도 경쾌해진다. 이것은
우리가 자연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우리 몸 자체가, 정신적으로나 심리적으로 자
연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자연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아낌없이 무상으로 베풀어 주고 있다. 마치 어머
니가 어린 자식에게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아낌없이 베풀듯이 우리에게 주고
있다.
맑은 공기와 시원한 바람, 따뜻한 햇살, 기름진 흙, 천연의 생수와 강물, 침묵
에 잠긴 고요, 별이 빛나는 밤하늘, 아름다운 꽃과 새소리 등 온종일 주워 세도
모자랄 정도로 자연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거저 준다. 전혀 대가도 없이.
그러나 사람들은 그것을 받고도 고마운 줄을 모른다. 함부로 허물고 더럽히고
끝없이 학대하고 있다.
우리들 인간의 생활은 생태계적인 순환에서 벗어날 수 없다. 우리 삶 자체가
생태계 순환 속에 들어 있고, 우리들 인간의 행위가 자연계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며 그 행위는 다시 결과로서 우리에게 되돌아온다.
이런 현상이 인과법칙이고 우주질서이다.
들짐승들은 자신들이 사는 둥지를 결코 더럽히지 않는다. 사람들만이, 소위 문
명인이라는 인간들만이 자신들의 생활 환경을 끝없이 허물고 더럽힌다. 만신창
이가 되어 앓고 있는 자연의 신음소리는 곧 우리들 자신의 질병이다. 동시에 그
신음소리는 바로 우리들 자신의 신음소리이다.
우리들 자신이 자연의 일부인 소우주이기 때문이다. 자연이 허물어지고 오염
되면 우리가 기댈 곳이 어디인가. 그렇게 되면 우리들 자신의 영역이 허물어지
고 오염되는 것이다.
우리가 보다 인간다운 삶을 이룩하려면 될 수 있는 한 생활용품을 적게 사용
하면서 간소하게 살아야 한다. 우리가 쓰고 있는 모든 물건은 지구상의 한정된
자원의 일부이다. 이것은 우리들만의 것이 아니다. 우리들 당대에서 써버리고 탕
진할 그런 것이 아니다.
모든 물건은 공장에서 기계와 기름과 화공약품으로 생산되기 때문에 과도한
소비는 반드시 자연의 훼손과 환경의 오염을 가져온다. 신발 한 켤레, 옷 한 벌,
가전제품 한 가지, 가구 하나를 만들어 내는 데는 그만큼 매연과 산업 쓰레기와
더러운 물이 생긴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모든 생명력은 자기 자신을 스스로 정화하는 능력을 갖고 있다. 곧 자정 능력
을 갖고 있다. 그러나 일정한 한계를 넘으면 그 자정 능력을 상실하고 만다. 이
것이 생명력이다.
인간이나 자연 모두 마찬가지이다. 자연에게 너무 과다한 짐을 지우니까, 너무
착취하니까 자기를 정화할 수 있는 자정 능력을 잃어 버렸다.
그렇게 되면 인간의 삶 자체도 병들어 버린다. 우리들 스스로가 억제하고 조
절할 수 있는, 극복할 수 있는 그런 능력을 상실하게 된다.
꽃들은 자기 자신과 남을 비교하지 않는다. 배화는 매화의 특성을 지니고 있
고, 진달래는 진달래다운 특성을 지니고 있다. 저마다 최선을 다해 피어날 뿐 어
느 꽃에게도 비교하지 않는다. 비교는 시샘과 열등감을 낳는다.
비교하지 않고 자신답게 자신의 삶에 충실할 때 그는 순수하게 존재할 수 있
다. 사람이 사람답게 살기 위해서는 자기 나름의 삶의 질서가 필요하다. 물건을
사들여 한동안 간직하고 쓰다가 시들해지면 내다 버리고 다시 새것으로 사들이
는 이런 소모의 악순환에 사로잡혀 있는 한 내적인 평온이나 맑은 기쁨은 결코
얻을 수 없다.
크고 많은 것, 그것은 허한 것이다. 소유를 꼭 없어서는 안 될 것으로 제한하
고 자제하는 것이 우리 정신을 풍요롭게 하는 길이다. 적게 가져야 더 많이 얻
는다.
깨달음에 이르는 데는 오직 두 길이 있다. 하나는 자기 자신을 속속들이 지켜
보면서 삶을 거듭거듭 개선하고 심화시켜 가는 명상의 길이고, 다른 하나는 이
웃에 대한 사랑의 실천이다.
명상이라고 가만히 앉아 있는 것이 아니다. 자기 삶을 스스로 늘 지켜보는 일
이다. 그 다음은 사랑의 실천이다. 하나는 지혜의 길이고 다른 하나는 자비의 길
이다.
이 지혜와 자비의 길을 통해서 우리가 이 세상에 태어날 때부터 지녀온 그 씨
앗이, 불성과 영성의 씨앗이 맑고 향기롭게 꽃피어난다. 본래 청정한 우리 마음
을 명상과 나눔으로 맑혀야 한다. 그래서 우리가 몸담아 사는 세상을, 그리고 마
음을, 그 속에서 의지해 살다가 언젠가는 그 품으로 돌아가 영원히 안길 자연을
향기롭게 가꿔야 한다.
10 떠남을 위하여
그렇다, 우리는 날마다 죽으면서 다시 태어나야 하낟.
만약 죽음이 없다면 삶 또한 무의미해질 것이다. 삶의 배후에 죽음이
받쳐 주고 있기 때문에 삶이 빛날 수 있다.
우리는 순간순간 죽어 가면서 다시 태어난다.
그러니 살 때는 삶에 전력을 기울여 뻐근하게 살아야 하고,
일단 삶이 다하면 미련없이 선뜻 버리고 떠나야 한다.
우리는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 나그네인지 시시로 살펴보아야 한다.
-법정 스님 수상집 <인도 기행> 중에서
강원도 산골로 거처를 옮기면서 법정 스님은 <버리고 떠나기>란 제목의 수상
집을 내셨다. 그 글들 속에서도 드러나고 있듯이 강원도행은 세상으로부터의 도
피가 아니라 자신의 삶을 지키고 점검하기 위한 수도자다운 선택이었다.
이따금 스님과 마주앉은 자리에서 지난 여행에 대한 얘기를 나눌 때가 있다.
그러면 나는 그분과 내 자신이 여행한 경로들이 많이 일치하고 있음을 알고 놀
라곤 한다.
지난 해 겨울 스님은 네팔에 다녀오신 뒤, 카트만두 교외의 나가르콧 정상에
서 맞이한 일출의 장엄함을 말씀하셨다. 나 역시 나가르콧에서 바라보던 히말라
야의 아침 풍경을 두고두고 잊을 수가 없다. 그것은 어떤 사진기나 붓으로도 그
려내기 어려운 자연의 위대함이었다.
아울러 내가 곧잘 들러 명상음악을 구입하곤 하는 카트만두 시내의 필그림 서
점에 대해서도 언급하시는 것이었다. 그곳에서 스님은 네팔 엽서도 사고 인도
음악도 구하신 듯했다.
스님은 또 미국 캘리포니아에 가실 때마다 들르는 파라마한사 요가난다 명상
센터의 아름다움에 대해 자주 말씀하신다. 그곳은 아열대의 꽃들과 나무들과 호
수가 어우러져 있어서, 누구나 그 안에 발을 들여 놓는 순간 저절로 명상적인
분위기에 젖어드는 그런 장소이다. 명상 센터 앞으로는 끝없는 해안도로와 툭
트인 바다가 유혹한다.
나 역시 일 년에 한 달씩 미국에 가서 머물 때면 곧잘 그 명상 센터에 가서
앉아 있곤 했다. 그러면 갑자기 마음이 평온을 되찾고, 호수에 일렁이는 꽃 그림
자들 틈새에서 침묵의 무게가 느껴졌다.
또한 나는 크리슈나무르티가 생애 마지막까지 살았던 캘리포니아의 오하이 밸
리에 갔을 때, 그곳에 펼쳐진 귤밭 너머로 지는 저녁 석양을 넋을 잃고 바라본
기억이 있다. 그리고 크리슈나무르티가 강연 뒤에 바하의 음악을 즐겨 들었다는
방도 구경한 적이 있다. 놀랍게도 스님께서도 똑같은 경험을 말씀하시는 것이었
다.
남인도 마드라스의 스리 오로빈도 아쉬람과 그 옆의 넓다란 바다풍경, 바라나
시의 일렁이는 갠지스 강물, 네팔 포카라의 서늘한 아름다움까지도 스님과 나는
공유한다.
또한 신지학회 본부에 서 있는 거대한 바냔 나무, 스리랑카의 아누라다푸라에
있는 부처님 당시의 보리수, 샌프란시스코의 울창한 레드우드 숲에 대해서도 스
님과 대화를 나누었다.
그러면서 내심 나는 놀랄 수밖에 없다. 그분은 어디에도 안주하지 않으려 하
신다. 그것이 그 많은 여행지로 홀로 다니시는 주된 이유이다. 여행자이고 나그
네임을 숙명으로 여기고, 구차한 삶의 어느 구석에도 머물지 않으신다. 진정한
자유인의 행로가 아닐 수 없다.
불일암이나 강원도 산중에 홀로 계시지만, 그분은 또 갑자기 스위스의 산정이
나 북인도 다르질링의 칸체중가 히말라야 앞에 서 계신다. 그리고는 또 돌아와
산중의 얼음을 깨고 물을 길어오시는 것이다.
- 엮은이
떠남을 위하여
가을이 왔다. 가을은 흔히 독서의 계절이라고 말하지만, 나는 오히려 가을이
들어서니까 책이 읽히지 않는다. 다른 이유보다도 이 청청한 날씨 때문이다. 맑
은 공기와 푸르른 날씨 때문에 방안의 책상 앞에 버티고 앉아 있을 수가 없는
것이다. 나무 아래서 서성거리기만 해도 존재가 넉넉해지는데 굳이 좁은 방안에
들어앉아 책장을 넘기는 것이 마음에 차지 않는다.
독서의 계절이란 말이 적어도 나한테는 해당이 안 되는 듯하다. 그럼 가을은
무슨 말로 메울 수 있는가. 떠남의 계절이다. 가을에는 어디론가 훌쩍 떠나고 싶
어진다.
가을은 잎이 가지를 떠나고, 열매가 나무를 떠나는 계절이다. 사람이 길을, 먼
길을 떠나고 싶어지는 계절이다. 다시 말해 반복의 굴레에서 벗어나고 싶은 계
절이다. 따라서 여행은 목적지에 도달하는 일이기보다 일상의 굴레에서 벗어나
는 데 그 일차적인 의미가 있다.
가끔은 자기가 살던 곳을 떠나 볼 일이다. 떠나 보면 평소에 내가 어떻게 살
았는가를 객관적인 시각에서 볼 수 있다. 새삼스럼게 자기 존재의 무게를 헤아
릴 수가 있다.
떠나는 것을 불교적인 용어로 출가 또는 출진이라고 한다. 출가는 집에서 나
온다는 뜻이고, 출진은 티끌에서 벗어난다는 것, 곧 욕심에서 벗어난다는 뜻이
다.
어디로부터 떠나는가. 속박의 굴레에서 떠나고, 무뎌진 타성의 늪에서 떠나고,
집착하는 마음으로부터 떠난다. 이것이 곧 출가이다.
수도승이 되기 위해 입산 출가한 사람들을 보면, 살던 집을 버리고 똑같이 나
온 사람들인데 봄철에 온 사람들과 가을철에 온 사람들이 다르다. 계절적인 분
위기가 작용함인지, 들뜨기 쉬운 봄에 집을 나온 사람들은 뿌리내리지 못한 채
왔던 길로 되돌아가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가을이나 겨울철에 집을 나온 사람
들은 어지간해서는 물러갈 줄을 모른다.
사람들은 곧잘 내게 ‘왜 스님이 됐는가?’하고 묻는다. 신부들과 수녀들도
곧잘 이런 질문을 받을 것이다.
그 질문을 받을 때마다 나는 세상이 무상해서, 중생을 구제하기 위해서, 생사
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라고는 결코 말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런 뜻에서
출가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나는 나대로 살고 싶어서, 내식대로 살고 싶어서 출가를 했다. 자기식대로 사
는 것, 나대로 사는 것을 위해서다. 그것이 세상의 윤리권 밖에서 제멋대로 사는
것이 아님은 물론이다. 그만큼 무거운 짐이 내게 주어진 것이다.
어떤 출가의 경우라도 그것은 스스로 선택한 길이다. 선택당한 길이 아니고
선택한 길이다. 적어도 자살에 비길 만큼 철저한 자기 부정을 거쳐 선택한 길이
다.
무엇에 대한 부정인가.
비본질적인 것에 대한 부정이다. 철저한 부정 없이 긍정에 도달하기는 어렵다.
철저한 절망을 통해서, 자기 부정을 통해서 인간은 거듭날 수 있고 삶을 재구성
할 수 있다.
따라서 종교적 세계에서는 절망은 죽음에 이르는 병일 수가 없다. 오히려 절
망은 거듭날 수 있는 계기이고, 자기 인생을 재구성하기 위한 진통이다. 종교적
체험은 자기 부정을 통해서 얻어지는 대긍정에 그 의미가 있다.
떠난다는 것은 소극적인 도피가 아니라, 보다 높은 이상을 위한 적극적인 추
구이다.
인도 사람들은 고대 베다 시대부터 인생의 목적을 세 가지에 두었다.
첫째는 애욕 곧 육체적인 쾌락이고, 둘째는 재산 곧 물질적인 부이고, 셋째는
종교 곧 정신적인 자유이다.
육체적인 쾌락과 물질적인 부는 일상적으로 즐길 수 있는 것들이다. 성질은
다르지만 동물도 육체적인 쾌락이나 물질적인 부를 누리는 기능을 지니고 있다.
사람만이 유일하게 정신적인 자유를 갈구하는 기능을 갖고 있다.
또한 인도에서는 인생을 네 시기로 나누었다. 고대 인도인들뿐만 아니라 현대
의 일부 힌두교인들도 이 네 시기에 따라서 인생을 살고 있다.
그 첫번째 시기는 범행기라 하여, 스스의 집에서 살면서 베다 성전 등의 고전
과 학문을 배우는 시기이다. 그 다음은 가주기라 하여, 집에 머무는 기간이다.
집으로 와서 결혼을 하고 가정과 사회 생활을 영위하는, 시민적인 의무를 다하
는 기간이다.
세번째 시기는 임서기로 가산을 자식에게 넘겨 주고 숲속으로 들어가 검소한
종교 생활을 실천하는 기간이다. 경전이나 베다 서에 보면 아내와 함께 수행하
는 장면들이 묘사되고 있다.
네번째는 유행기로, 모든 집착에서 떠나 아무것도 가진 것 없이 걸식하면서
수행하는 기간이다. 자기 완성을 위한 노력을 계속해 가는 생애의 마지막 단계
인 것이다. 가진 것은 밥그룻, 지팡이, 물병뿐이다.
이러한 네 주기는 바라문들의 전통적인 행로였고, 후기에 와서 그 전통이 희
미해졌다.
출가는 네번째 시기인 유행기에 해당한다. 모든 집착과 구속에서 벗어나 자유
로운 길로 가는 것이 출가이다. 고타마 싯달타의 경우를 보라. 그에게 외적인 조
건은 풍족했다. 결혼을 해서 야소다라라는 아름다운 부인과 봄, 여름, 가을, 세
채의 궁전을 갖고 있었다. 다시 말해 물질적인 부와 세속적인 권력이 확실하게
보장된 삶이었다.
학자들은 싯달타의 출가 원인을 여러 가지로 말한다. 코살라와 마가다 왕국의
국가적이고 정치적인 불안 때문에 출가했다는 설도 있고, 중생을 구제하기 위해
서라고 불교도들은 말한다. 이것은 원인과 결과를 혼동한 것이다.
깨달음을 얻은 다음의 관점에서 보면 중생을 구제하기 위해서인 듯하지만, 사
실은 자기 하나의 무게를 어쩌지 못해 출가한 것이다. 외적인 여건은 풍요로웠
지만 내적인 상황은 자기 집을 뛰쳐나오지 않을 수 없을 만큼 절박했다. 그에게
는 자살에 견줄 만한 대결단이었다.
모든 것들이 갖추어진 풍요로운 조건 속에 살면서도 출가한 것을 두고 불교학
자들은 위대한 포기, 위대한 내던짐이라고 말한다.
흔히 고타마 싯달타의 출가를 유성출가, 성을 넘어서 출가했다고 표현한다. 카
필라 왕궁의 집착과 속박의 성을 넘어서 출가했다는 뜻이다. 표현을 달리하면
비본질적인 성이기 때문에 출가한 것이다.
사실 고타마 싯달타는 출가를 한 번만 한 것이 아니었다. 그는 여러 번의 출
가를 했다. 첫째로 그는 29세 때 처자와 왕궁을 버리고 출가했다. 육신의 출가이
다.
그후 그는 여기저기 스승을 찾아헤매고 길고 긴 구도 행각을 했다. 그 대표적
인 스승은 알라라 칼라마, 웃다카 라마풋다 두 사람이었다. 이들은 2천 5백 년
전 인도에서 최고로 꼽히는 수행자들이었다. 그 문하에 수천 명의 제자를 거느
리고 있던 대표적인 수행자들이었다.
싯달타는 그들 밑에서 피나는 수행 끝에 두 사람과 같은 경지에 도달했다. 스
승은 이보다 더 높은 경지는 없다면서 함께 교단을 이끌자고 하지만 싯달타는
만족하지 않고 그곳에서도 떠난다. 이것이 두번째 출가이다.
최고의 경지, 궁극의 경지라는 말을 들었을 때 그곳에서 나온다는 것은 실로
어려운 일이다. 우리는 대개 스승과 함께 주저앉는다.
간디 자서전은 말하고 있다.
‘세속적인 의미에서는 불완전한 스승도 용납될 수 있지만, 진리의 세계에서
는 불완전한 스승은 용납될 수 없다.’
진리의 세계에서는 완전한 스승만이 요구된다.
완전한 스승은 어디 있는가. 외부 세계에 완전한 스승은 없다. 자기 스스로가
완전한 스승이 될 수 밖에 없다. 자기 자신처럼 본인을 잘 알 수는 없다. 고타마
싯달타는 이렇듯 어디에도 완전한 스승이 없다는 것을 자각하고 스스로 혼자 완
전한 스승이 되려고 노력한다.
그 결과, 그는 보리수 아래서 가부좌를 하고 피나는 정진 끝에 마침내 깨달음
에 이른다. 이것이 세번째 출가이다. 모든 고뇌로부터 출가한 것이다. 이 출가를
위해서 그는 왕궁도 버리고 스승 밑에서도 벗어난 것이다.
출가의 결과는 무엇이었는가. 해후이다. 거기 만남이 있었다. 본질적인 자아와
의 해후가 이루어졌다. 비본질적인 일상의 자기에서 떠나 본래의 자기로 돌아온
것이다.
떠난다는 것은 곧 새롭게 만난다는 뜻이기도 하다. 만남이 없다면 떠남도 무
의미하다. 출가는 빈 손으로 돌아가는 길이 아니다. 크게 버림으로써 크게 얻을
수 있다. 크게 버리지 않고는 결코 크게 얻을 수 없다.
적게 버리면 적게 얻을 수밖에 없다. 어중간하게 버리면 어중간하게 얻는다.
이것이 소유의 법칙이다. 아무것도 갖지 않을 때 온 세상을 다 차지할 수 있다.
무엇인가를 가졌을 때 가진 것만큼 속박을 당한다.
크게 버릴 때 크게 얻을 수 있다는 것은 우리가 두고두고 생각해 볼 과제이
다. 그래서 출가를 가리켜 위대한 내던짐이라고 말하지 않는가.
이것은 역사 속의 어떤 한 사람의 예가 아니다. 오늘 우리가 어떻게 살 것인
가와 곧바로 연결될 수 있어야 한다. 예수의 자취가 2천년 전에 있었던 역사적
인 사실로 남아 있다면 아무 의미가 없다. 그 생애의 의미가 우리 자신의 삶과
하나가 될 때 우리는 거듭날 수 있고, 그리스도는 우리 안에서 다시 부활할 수
있다.
속박의 굴레에서 우리는 벗어나야만 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생명이 요구하는
필수적인 과제이기 때문이다. 타성의 늪에서 떨치고 일어서는 결단이 필요하다.
승려가 아니고, 신부나 수녀가 아닌 사람일지라도 저마다 자기의 일상 생활이
있다. 자기의 세계가 있다. 그 일상의 삶으로부터 거듭거듭 떨쳐 버리는 출가의
정신이 필요하다. 머리를 깎고 산이나 절로 가라는 것이 아니라, 비본질적인 것
들을 거듭거듭 버리고 떠나는 정신이 소중하다.
모든 인간의 보편적인 출가는 몇 가지로 나눌 수 있다.
첫째는 탐욕에서 벗어나는 일이다. 자기 그룻 밖의 욕망에서 벗어나는 일이다.
둘째는 미움에서 벗어나는 일이다. 후세 역사가들이 오늘의 시대를 뭐라고 표
현할 것인가. 아마도 증오의 시대라고 기록할 것이다. 서로 믿지 못하고 서로 미
워하지 않는가.
어떤 것이 진정한 인간의 조건인가. 그것은 증오가 아니라 사랑이다. 사랑이
충만할 때 그는 비로소 사람이며, 사랑이 메마르고 증오로 가득찰 때는 그는 사
람이 아니다.
사랑과 고통은 함께 있다. 막달라 마리아는 사랑과 고통이 같은 의미를 지니
고 있다는 것을 예수가 죽은 날 비로소 알았다고 한다. 사랑과 고통이 포개어져
있음을 비로소 체험한 것이다. 어머니의 사랑 역시 포근하고 따뜻한 것인 동시
에 그 속에는 아픔이 깃들어 있다. 그것이 자비이다. 자애로움과 슬픔이 함께 있
는 것이다.
셋째는 무지에서 벗어나는 일이다. 기독교에서 말하는 원죄를 불교적인 용어
로 바꾸면 무명이다. 밝음이 없다는 뜻이다.
인간이 인간일 수 있는 것은 자기 자신을 끊임없이 형성해 가는 데 있다. 자
기 자신을 출가시키려는 끝없는 노력에 있다. 이것을 영화 <빠삐용>의 주인공
이 우리에게 잘 보여 주고 있다. 알다시피 이 영화는 억울하게 갇힌 죄수 빠삐
용이 자유와 평화를 찾아서 끝없이 탈출하는 이야기이다.
빠삐용에게 실의와 좌절은 곧 죽음을 의미한다. 끝없이 탈출하려고 노력하고
있는 한 그는 절망하지 않는다. 그때 그는 죽은 것이 아니라 살아 있다. 그러나
절망과 실망, 좌절은 죽음을 의미한다. 벌레를 잡아먹으며 독방에 갇혀 있을 때
그는 좌절을 경험한다. 그때 죽음의 환상이 그에게 나타난다.
속박과 불의에서 벗어나려고 노력하는 존재만이 진정한 인간이다. 많은 죄수
가 있지만 그 사람들은 하나의 짐승에 불과하다. 그들은 노예이며, 인간이라고
할 수가 없다. 비굴한 노예가 아니면 나약한 짐승에 불과하다.
영화 <빠삐용>은 이 시대의 우리에게 많은 암시를 주고 있다. 너희들이 정말
인간인가. 인간답게 사는 길은 무엇인가. 더없이 메마르고 답답하게 살아가는 이
시대의 우리들에게 빠삐용은 바다를 건너 탈출하면서 이렇게 고함을 친다. 너희
들은 속박과 굴레의 성에서 어서 탈출하라. 그 늪에서 죽어 있지 말고 어서 출
발하라.
어떤 이유와 인연으로 출가한 구도자가 되었든, 가장 중요한 것은 순간 순간
을 사는 일이다. 현재의 이 순간 속에 자신을 불태우는 것, 그것이 곧 출가자의
자세이다. 사람이 불행하다는 것은 다른 의미가 아니다. 마지못한 삶, 순간 순간
을 무의미하게 흘려 버리는 삶, 그것이 불행한 삶이다.
꽃처럼 거듭거듭 피어나는 삶을 살아야 한다. 늘 새롭게 피어날 수 있어야 한
다. 즐겁게 살되 아무렇게나 살지 말아야 한다. 한 개인의 삶은 그 자신뿐만 아
니라 모두에게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출가는 일상적인 타성의 늪, 집착하는 마음에서 벗어나 본질적으로는 자기답
게 살기 위해서, 본래의 자아와 만나기 위해서 출발하는 일이다. 자기 혼자 도피
하기 위해 떠나는 것은 가출이지 출가가 아니다. 진정한 출가자가 되려면 그러
한 늪에서 벗어나 당당한 인간이 되어야 한다.
갇혀 있는 한, 그는 비겁한 짐승이거나 나약한 노예일 수밖에 없다. 그는 진정
한 인간이 아니다. 이것은 생존권의 문제다. 내가 내 인생을 사는 것이기 때문에
내 스스로 내 세계를 개척하지 않을 수 없다. 매 순간 속박과 굴레의 늪에서 탈
출하려고 노력하고 있을 때 그는 비로소 한 사람의 인간이 된다.
11
영원한 자유를 찾아서
찔레꽃이 구름처럼 피어오르고 뻐꾸기가 자지러지게 울 때면
날이 가문다.
어제 해질녁에는 채소밭에 샘물을 길어다 뿌려 주었다.
자라 오른 상추와 아욱과 쑥갓을 뜯어만 먹기가 미안하다.
사람은 목이 마르면 물을 마시고 갖가지 음료수를 들이키면서,
목말라하는 채소를 보고 모른 체할 수가 없었다.
오늘 아침에 보니 채소밭에는 생기가 감돌았다.
그 생기는 보살핌에 대한 응답이다.
- 법정 스님 수상집 <물소리 바람소리> 중에서
무더운 여름, 스님은 오두막 앞을 흐르는 개울에 땀을 씻으러 갔다가 그만 넘
어지셨다. 미끄러운 바위에 발을 헛디뎌 뒤로 나동그라진 것이다. 위험한 순간!
머리에서 많은 피가 흘렀지만 스님은 끝내 병원을 가지 않고 혼자서 치료를
하셨다. 그 이유에 대해 그분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아무도 모르는 곳에서 혼자 자유롭게 살고 있는데 병원을 찾게 되면 내 신
분과 거처가 노출되고 말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 병원을 찾지 않은 내 고
집을 나는 지금까지도 잘한 일로 여기고 있다.’
사실 그것은 대단히 위험한 상황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목숨까지도 자유와
맞바꾸지 않으려는 그 정신이 서늘하기까지 하다. 얼마 동안을 머리에 붕대를
붙이고 다니시면서도 끝내 병원을 찾지 않으셨다.
그후 스님은 사람들이 모인 자리에서 거듭 말씀하셨다.
‘죽음은 전혀 예기치 않은 순간에 뒤에서 덮칠 수가 있다. 죽음은 앞에서만
오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언제고 자신의 죽음에 대비하는 삶을 살 수 있어야
한다.’
고타마 붓다도 임종의 자리에 이르러 말했다고 하지 않는가.
‘생은 덧없으니, 부지런히 자신을 점검하라.’
한편 금세기의 성자로 일컬어지는 지두 크리슈나무르타는 이렇게 말하고 있
다.
‘오늘이 마지막 날인 것처럼 살자. 이 순간이 나에게 주어진 마지막 순간인
것처럼 살아야 한다.'
굳이 말하지 않아도 죽음은 삶의 종합이다. 내 자신이 알고 있거나 주위의 다
른 여러 사람들이 알고 있는 법정 스님에 관한 일화들을 돌아볼라치면 그분의
삶이 매순간 하나의 절정에 근접해 있음을 느낄 수 있다.
스님의 휘파람부는 솜씨는 일품이다. 불일암에 머무실 때는 아침에 휘파람을
불면 멀리 주암댐에서 날아온 호반새가 후박나무 위헤 앉아 화답을 하곤 했다.
또한 봄에 산을 내려오시다가 오솔길 복판에 솟아난 대나무 싹을 보면 손으로
뽑으며 이렇게 속삭여 주곤 하셨다.
‘미안하지만 여기는 너의 길이 아니구나.’
어린 죽순과 호반새와 길가의 구절초들과 대화를 나누는 그 모습은 생애 후반
에 이르러 수많은 동물들과 얘기를 했다는 프란치스코 성인을 연상시킨다. 달라
이 라마 역시 비가 오면 길가에 나와 있는 지렁이들을 손바닥에 들어 기도문을
외며, 풀섶으로 옮겨 준다고 나는 들었다. 그러한 성인들이 인간의 역사 속에 존
재한다는 것은 그 자체로 하나의 기쁨이다.
고백하건대, 법정 스님에 대해 내 자신이 속속들이 알지 못하고 그 분과 하룻
밤도 한 방에서 잠을 자본 적이 없지만, 그러한 ‘참인간’과 함께 동시대를 살
고 있다는 것이 내게는 숨통이 트이는 일이다.
- 엮은이
영원한 자유를 찾아서
나는 요즘 다산 정약용의 글을 읽고 있다. 다산이 유배지에서 두 아들에게 보
낸 편지를 읽노라면 그 속에 오늘의 지식인들에게 주는 메시지가 담겨 있음을
알 수 있다. 편지글을 통해 다산은 학문을 하는 사람들이 어떤 자세를 가져야
하는가를 역설하고 있다.
오늘날 학생들한테서는 학문의 진정한 의미나 지식인의 사명 같은 것은 거의
사라져 버렸다. 모두가 세속적인 일에 영합하고 있다. 유배지에 살면서도 다산은
고고한 기상과 기개가 조금도 꺾이지 않았다.
다산이 두 아들에게 보낸 편지 가운데 이런 구절이 있다.
‘남자는 모름지기 사나운 새나 짐승처럼 사납고 전투적인 기상이 있고 나서,
그것을 부드럽게 안으로 다스려 법도에 알맞게 행하면 유용한 인재가 될 수 있
다.’
먼저 사납고 전투적인 기상을 갖고 나서, 그 다음에 그것을 안으로 부드럽게
다스리라고 충고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다산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사나이 가슴 속에는 가을 매가 하늘 높이 치솟아오르는 듯한 기상을 품고,
천지를 조그맣게 보고, 우주를 가볍게 손으로 요리할 수 있다는 생각을 지녀야
한다.’
무릇 이런 기상을 지니고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고전을 배우는 것은 단순히 지적 호기심을 채우기 위해서가 아니다.
옛 거울에 오늘의 우리를 비춰 봄으로써, 현재의 새로운 나를 만들기 위해 고전
을 읽는다. 따라서 생명력을 지닌 고전은 세월이 흐를수록 빛을 발한다.
예전에 학문을 한 사람들은 그 나름의 기상이 있었다. 이른바 선비정신이 그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이런 것들은 사라지고 없다. 컴퓨터를 갖고, 많은 자료와
정보를 갖고 그것을 처리하느라 고심하고 있을 뿐이다. 거의 모두가 기계화된
인간이다.
어떤 사무실에 갔더니 일류대학을 나온 사람들이 모두 컴퓨터만 들여다보고
있었다. 그걸 보고 나는 깜짝 놀랐다. 이게 현대인들의 업무인가. 옛날에는 흙을
만지고, 나무 밑에서 서성거리고, 하늘도 보고, 이러면서 일들을 했다. 현재는 사
각 컴퓨터 앞에서 그것만 들여다보고 있다. 이런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다.
이것이 이른바 첨단의 학문 방법이다. 우리는 많은 정보와 지식을 통해서 이
세상을 살아야 하는 것으로 착각하고 있다. 따라서 이런 시대에는 사나이로서,
학자로서, 진실을 탐구하는 사람으로서 드높은 기상을 갖기가 어렵다.
임제 의현 선사의 어록을 통해서 구도자의 살아 있는 기상을 엿볼 수 있다.
임제는 9세기 사람으로, 이 시대는 당 왕조가 내리막길에 들어선 시대이다. 환관
들의 정권 쟁탈과 관리들의 파벌 싸움으로 나라가 극도로 어지럽던 때이다.
임제 선사의 성격을 잘 말해 주는 일화가 있다. 그는 소나무를 즐겨 심었다.
가는 곳마다 늘 틈만 나면 소나무를 심었다. 그의 스승인 황벽 희운이 물었다.
‘그대는 깊은 산골에 소나무를 심어서 무엇하려는가?’
임제는 대답했다.
‘첫째 산문을 장식하기 위해서이고, 둘째 뒷사람에게 표본이 되기 위해서입
니다.’
그러자 황벽이 말했다.
‘나의 종이 너에게 이르러 세상에 크게 떨치리라.’
구도자의 기상이 어떠해야 하는가를 일깨워 주는 임제 선사의 대표적인 일화
가 있다. 그가 교화의 길을 나서고 싶어 고향인 하북 지방으로 가려 할 때의 일
이다. 스승 황벽이 그를 불러 물었다.
‘어디로 가려 하는가?’
임제가 대답했다.
‘하북으로 돌아갈까 합니다.’
그러자 황벽이 시자를 불러 그들의 대스승인 백장선사의 선판과 궤안을 가져
오라고 일렀다. 선판과 궤안은 일종의 깨달음의 증표다. 이때 임제가 소리쳤다.
‘시자야, 불을 가져 오너라!’
그 깨달음의 증표를 불태워 버리겠다는 것이다. 증표가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
다. 진정으로 깨달음을 얻었다면 증명서가 필요할 리 없다. 문제는 깨달음 자체
에 있는 것이지 형식이 아니다. 임제의 이러한 드높은 기상을 알고 황벽은 이렇
게 말했다.
‘그대는 훗날 천하 사람들의 혀 끝에 자리잡고 앉게 되리라.’
임제는 전통적인 인습을 거부했다. 스승에 대한 불만에서가 아니라 수행에 자
기 확신이 섰기 때문에 다른 소도구가 필요없었다. 뒷날의 대혜 종고 역시 임제
선사와 기질이 비슷했다. 대혜는 스승인 원오의 저서인 <벽암록>을 사람들을
현혹시킨다 하여 불태워 버렸다. 스승에 대한 배반이 아니라 어떤 의미에서는
이것이 스승을 살리는 길이다.
선가에는 이런 말이 전해져 온다.
‘장부자유충천지 불향여래행처행.’
대장부는 하늘을 찌르는 기상이 있기에 부처와 여래가 가는 길이라 해서 따라
가지 않겠다는 것이다. 내 길을 내가 가겠다는 것이다. 부처의 복제품이 되지 않
겠다는 뜻이다.
조선시대의 사명 스님이 스승 서산 스님을 찾아 묘향산으로 갔을 때의 일이
다. 스승이 제자에게 물었다.
‘어디서 오는가?’
사명이 대답했다.
‘옛길을 따라서 옵니다.’
그러자 서산이 크게 꾸짖으며 말했다.
‘옛길을 따르지 말라. 오직 너의 길을 가라.’
현재에 사는 사람이 왜 옛길을 따르냐는 것이다. 진리를 탐구하는 사람에게는
이런 기상이 있어야 한다. 이것은 저절로 되는 일이 아니다. 밤잠을 안자고 탐구
할 때 그러한 기백과 기상이 저절로 몸에 배게 된다.
오늘날 학문하는 사람에게는 그러한 기상이 없다. 생각 자체가 삶의 기쁨이
되어야 하는데, 이 다음에 써먹기 위한 수단으로, 과정으로, 출세길을 위한 방편
으로 학문을 하기 때문에 기상이나 기백이 돋아날 리 없다. 사회적 신분이나 좋
은 자리를 얻기 위해 학문을 한다면 그는 졸장부에 불과하다
선가에는 흔히 ‘임제할 덕산방’이란 말이 있다. ‘할’은 고함이고, ‘방’
은 몽둥이이다. 할은 거부의 강력한 의사 표시이고, 방은 그 직접적인 행동이다.
이렇듯 임제는 틀에 박힌 형식과 전통적인 의식을 강력히 부정했다.
임제의 어록에 보면 곳곳에 그런 정신이 여실히 표현되고 있다.
‘그대가 바른 견해를 얻고 싶거든 타인으로부터 미혹을 받지 말라. 안으로나
밖으로나 만나는 것은 모조리 죽여라.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고, 조사를 만
나면 조사를 죽이고, 아라한(성인)을 만나면 아라한을 죽여라. 부모를 만나면 부
모를 죽이고, 친척이나 권속을 만나면 친척이나 권속을 죽여라. 그래야 비로소
해탈하여 그 무엇에도 구해받지 않으리라.’
부처를 죽이라고 하면 타종교에서는 이해하지 못한다. 화형감이고 신성모독이
다. 그러나 불교에서는 그것을 당연시한다. 제자가 자신의 스승을 죽여야 한다는
것은 일반적인 사회 윤리로 보면 패륜아의 짓이다. 하지만 임제 선사는 정신적
인 굴레를 벗어 던지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부처와 조사, 전통이나 스승을 최고의 가치로 삼는다면 그것은 자승자박이 된
다. 왜냐하면 사람을 얽어매는 인혹이기 때문이다. 타인에게 붙들리고, 외부의
권위에 사로잡히면 본래의 자기를 잃어버린다.
임제는 무위진인 또는 무의도인을 이야기 했다. 어디에도 의존함이 없는, 누구
에게도 기대지 않는 당당한 참사람이라는 뜻이다. 무위진인은 범부도, 성인도,
중생도, 부처도 아닌 절대자유의 주체를 말한다.
선사들의 표현이 거칠고 과격한 것은 산 체험을 죽은 언어와 문자를 빌어 표
현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파격적인 표현을 쓰지 않을 수 없다. 거죽의 표
현보다 그 속뜻을 알아차리면 정신이 번쩍난다.
임제 선사는 어록에서 말하고 있다.
‘함께 도를 닦는 여러 벗들이여, 부처로써 최고의 목표를 삼지 말라. 내가 보
기에는 부처도 한낱 똥단지와 같고, 보살과 아라한은 죄인의 목에 거는 형틀이
요, 이 모두가 사람을 구속하는 물건이다.’
우리를 부자유하게 만드는 것들로부터 단호히 벗어나라고 임제는 요구하고 있
다. 다시 말해 탈종교이다. 종교의 틀에서 벗어나라는 것이다. 그러면 무엇이 남
는가. 그 남는 것이 바로 진정한 종교의 세계이다. 이런 의미에서 임제는 가장
종교적인 사람이었다.
거죽의 세계에서, 껍데기에서 다 벗어나라. 왜 남에게 의지하고, 타인의 졸개
가 되려 하는가. 부처라 하더라도, 성인이라 하더라도 그는 타인일 뿐이다. 그
가르침을 통해서, 그 자취를 통해서 오직 내 길을 갈 수 있어야 한다.
불고는 부처를 믿는 종교가 아니다. 스스로 부처가 되는 길이다.
새로운 부처, 새로운 예수가 필요한 것이지 이 인류에게 똑같은 존재는 필요
없다. 따라서 진정 뛰어난 종교가나 사상가는 일인 일파일 수밖에 없다.
임제는 우리에게 말하고 있다.
‘수처작주 입처개진. 언제 어디서나 주체적일 수 있다면, 그 서 있는 곳이 모
두 참된 곳이다.’
어디서나 주인 노릇을 하라는 것이다. 소도구로서, 부속품으로서 처신하지 말
라는 것이다. 어디서든지 주체적일 수 있다면 그곳이 곧 진리의 세계라는 뜻이
다.
나를 필요로 하는 내 삶의 주인공이 되어야 한다. 내가 몸담고 있고 그 공간
에 살아 있기 때문에 내 자신이 주인이 되어야 한다. 그곳이 극락이고 천당이다.
어디서든 당당하게 주인 노릇을 할 수 있어야 한다. 타인이 아닌 바로 내 자신
이 내 삶의 주인이 되어야 한다.
모든 가르침은 약의 처방에 불과하다. 약의 처방은 진정한 약이 아니다. 약의
처방은 병을 낳게 하는 임시 방편일 뿐이다. 약중의 약은 본래의 건강에 눈 뜨
는 일이다. 생활 습관과 음식 조절, 적절한 침묵 등을 통해서만이 근원적인 치료
가 가능하다.
그렇듯 스스로 자기의 삶을 되돌아보면 스스로 알게 된다. 불교에서 말하는
본래 청정, 본래 성불이란 말이 그 뜻이다. 본래의 자기 의식으로 돌아가면 이미
완전한 존재라는 뜻이다.
임제 선사는 또 말한다.
‘바로 지금이지 다시 시절은 없다.’
지금이 바로 그때이지 다른 시절이 있는 것은 아니다. 우리들의 삶과 죽음이
지금 이 자리에서 이렇게 전개되고 있다.
어떤 사람이 불안과 슬픔에 빠져 있다면, 그는 이미 지나가 버린 과거의 시간
에 아직도 매달려 있는 것이다. 또 누가 미래를 두려워하면서 잠 못 이룬다면,
그는 아직 오지도 않은 시간을 가불해서 쓰고 있는 것이다.
과거는 강물처럼 이미 지나가 버렸고, 미래는 아직 오지 않았다. 과거나 미래
쪽에 한눈을 팔면 현재의 삶이 소멸해 버린다. 보다 직설적으로 표현하면, 과거
도 없고 미래도 없다. 항상 현재일 뿐이다.
지금 이 자리에서 최선을 다해 최대한으로 살 수 있다면, 여기에는 삶과 죽음
의 두려움도 발 붙일 수 없다.
저마다 있는 그 자리에서 자기 자신답게 살라!
임제는 마지막 눈 감을 때까지 자유인의 기상을 가르쳤다. 임제 어록에 가장
많이 등장하는 단어 중 하나가 ‘자유’이다. 9세기에 이미 그는 ‘자유’라는
말을 사람들의 마음 속에 심어 놓았다.
임제 선사가 임종에 이르러 훗날 임제록을 편찬한 제자 삼성을 불러 말했다.
‘내가 죽은 후 내 정법안장(가풍, 가르침)을 잃어 버려서는 안 된다.’
삼성이 말했다.
‘저희가 어떻게 스님의 정법안장을 잃어 버릴 수 있겠습니까?’
임제 선사가 물었다.
‘뒷날 누가 나의 정법안장을 물을 때 너는 어떻게 대답하겠는가?’
이때 삼성이 ‘할(고함)’을 했다. 스승이 지금까지 해온 그 ‘할’을 그대로
모방한 것이다.
이것을 듣고 임제 선사는 한탄을 한다.
‘대체 누가 생각이나 했겠는가. 이 눈먼 나귀한테서 내 정법안장이 소멸될
것을.’
임제 선사는 이 말을 끝내고 바로 그 자리에서 눈을 감았다.
누구든 자신의 길을 가야 한다. 좋은 제자란 스승을 뛰어넘어야 한다. 그래야
스승에 대한 은혜 갚음이 된다.
여기 한 가지 일화가 더 있다. 배휴라는 이름의 지방 장관이 새로 부임해 절
을 찾아갔다. 배휴가 절을 안내하던 원주에게 어느 영정을 가리키며 물었다.
‘이 분은 누구십니까?’
원주가 대답했다.
‘이 절에서 살다가 돌아가신 큰스님입니다.’
배휴가 말했다.
‘얼굴은 그럴듯하군. 고럼 이 큰스님은 지금 어디 계십니까?
원주는 대답을 못하고 그 절의 노승인 황벽 선사를 소개했다. 조금전의 이야
기를 듣고 나서 황벽 선사는 배휴에게 처음부터 다시 물으라고 말했다.
그래서 배휴가 다시 물었다.
‘얼굴이 그럴 듯한 이 큰스님은 지금 어디 계십니까?’
이때 황벽 선사가 큰 소리로 ‘배 장관!’하고 부르자, 배휴는 깜짝 놀라 ‘
예!’하고 대답했다.
황벽은 다그쳐 물었다.
‘어디 있는가?’
과거 사람의 자취를 찾아 물을 것 없이 현재의 너는 지금 어디 있느냐는 것이
다. 이 말끝에 배휴는 눈이 번쩍 뜨였다.
배휴는 이 인연으로 제자가 되어, 훗날 황벽 선사의 어록인 <전심법요>를 편
찬하고 서문을 지었다.
그건 그렇고, 이 자리의 여러분은 지금 어디에 있는가? 지금 내 말을 듣고 있
는 그대는 어디 있는가? 남의 이야기가 아니다.
처음에 우리가 이 책의 제목으로 삼았던 것은 이것이었다.
‘바로지금이지 그때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